그러다가 “윤전기에 모래를 확…” 어쩌구 하면서 전화를 끊어버려.참, 어이가 없더군. 바로 직전까지 이 신문사에서 정치부장을 했다는 친구가 권력 집안의 ‘마름’이 되더니 아예 뵈는 것이 없나 했는데, 그예 안기부가 ‘출동’한 거야. 기자고 편집국장이라고 해서 전혀 업그레이드된 대접을 해 주지 않는다는 소문이야 익히 알고 있었어.아마 들어가자마자 조사관은 소지품 내 놓으라 할 것이고 주머니에서 월급(여름 보너스까지 합쳐 상당한 액수) 받은 돈 나오면 잡담 제하고 주먹부터 날아올 거라 상상했어. “이거 돈 잘 먹는 놈 아냐!” 하고 몇 대 쥐어박고 시작해도 그만이니까. 아마 그런 의식 속에는 평소의 촌지 관례가 죄의식으로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돼.어쩌면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도대체 권력이란 무엇이냐’ 하는 생각을 심각하게 하기 시작한 게 그날 밤부터야.
처음에는 ‘학원 안정법’같은 게 세상에 알려지는 게 권력으로 보아서는 이익이 될 것 같지 않으니 나를 잡아왔구나 이렇게 생각되었어. 학생들이 알면 화염병 던지고 할 터이니까. 아마 대통령 권력을 보위하는 쪽은 그러니까 정무 비서관 K는 그런 취지였을지 몰라.그러나 ‘남산’의 조사과정에서 그런 권력과 보도의 단순한 갈등관계가 아닌 다른 측면을 보았어. 이 작은 사건에 상당히 거창한 정치적 의미가 숨어 있다는 사실 말이야. 처음에야 형식대로 ‘나는 일천구백삼십칠년 구월 십일 서울 종로구 체부동 일백삼번지에서 태어나… 어쩌구’하고 예의 고백문을 써 내려갔지만 이건 어떤 시나리오의 도입부에 불과했지. 당시 집권 여당인 민정당은 한창 권력 승계문제로 내부갈등이 심각했어. 이른바 ‘비둘기파’와 ‘독수리파’의 대결이야. 한 번 잡은 정권 다른 세력에 넘겨줄 수 없으니 환경과 여건을 모두 그 쪽으로 몰아가자는 게 독수리파야. 예컨대 “다음 대통령도 유권자 투표가 아닌 통일회의 대의원으로 체육관에서 뽑자, 안보를 더욱 강화하고 화염병만 던지는 데모꾼들이 장악하고 있는 학원에는 강력한 안정법으로 대처한다” 뭐 이런 식이라. 그 세력의 보스는 역시 안기부장 장세동이었어.
나중 금강산 댐 건설 계획이 나오자 ‘아하’ 했지.반대쪽엔 온건파 이종찬이야. “학생도 설득하고 대통령선거도 국민이 납득하는 쪽으로 가야하고 정치는 카키색 그룹보다는 여의도 그룹 쪽으로 넘겨야 한다”는 주장이었어. 물론 정권은 안 바뀐다는 전제 아래지.어떻게 보면 찻잔 속의 태풍일 수도 있어. 그러나 후계 대통령의 꿈을 꾸고 있던 당사자들에겐 이건 죽기 살기 게임이야. 독수리들은 일단 이 보도 사건을 비둘기 떼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라고 보았어. 강경노선을 미리 방해하기 위한 공작으로 학원안정법을 슬쩍 흘렸다는 가설을 만들어 조지고 들어가자는 것이야.그러니까 그 소스가 이종찬 라인에서 흘렀다는 사실만 만들어 내면 되는 거지. 여러 기자들과 데스크들이 곤욕을 치렀어. 하지만 그런 의도는 소스 자체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자 흐지부지되었어.사실 그 기사는 보도가 당시로는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냐. 그러나 그 며칠 전 노신영 국무총리와 점심을 하는 중에 힌트를 하나 얻었던 거야.
노총리는 자신도 해 보았지만 안기부장의 역할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총리실의 의전이나 행정에 비능률적인 면이 얼마나 많은지를 이야기했어. 그러다가 시국에 관한 의견을 묻더니 마지막에 이런 소리를 하는 거라. “우리(정부 혹은 권력)도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 곧 결심을 한다, 두고 보면 안다” 그러더군. ‘아하, 무엇인가 움직임이 있구나’ 하고 기억 속에 접어 두었지. 그리고 사회부의 K기자가 특종을 해 오자 ‘이거다’ 했지.사실 정치권력은 반대 세력과의 쟁투가 아니라 그 세력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대립을 파악하고 이해할 때 그 본질을 탐색해 낼 수가 있어. 표면에 깔린 것을 쫓다가 보면 그 본질을 놓치게 되는데, 그게 한국 언론들의 공통된 함정이지.<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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