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일 가나안 농장 이사장 <하>
김종일 가나안 농장 이사장은 6·25때 배가 고파 자진 입대해 헌병 중사로 제대했다. 서울 경동고 재학 중에 피난길 대구에서 헌병학교를 거쳐 6사단 헌병대에 배속돼 전선을 누볐다. 상주로부터 원주, 철원을 거쳐 금강산을 지나 평양에 입성했다가 초산까지 다시 밀고 올라갔던 그때를 평생 잊을 수 없다. 전쟁 중의 군생활이 고달프기 짝이 없었지만 김 목사는 오래도록 머물려고 온갖 방도를 다 생각했다. 집에 돌아가면 선친께서 또 농군학교를 시킬테니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무려 5년1개월간 복무 끝에 헌병중사로 재대할 수밖에 없었다. 운명의 가나안 농장으로 돌아와 1962년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방문을 받는다. 당시 박 의장은 옆에서 권유하자 준비 없는 즉석연설로 농군들의 사기를 높여주는 자신의 소신을 들려줬다. “내가 군인이 되지 않았다면 바로 이 같은 개척운동을 했을 것”이라는 요지로 가나안 농장을 격려했다. 또 사범학교 출신답게 바른 인간을 강조했던 것으로 김 목사는 기억한다. 이때 박 의장은 가나안 농장 정신에서 새마을 운동을 발상했을 것으로 믿어진다.
실제 새마을 운동이 시작됐을 때 김 목사는 수없이 정신교육, 민족교육으로 참여했다. 또 중앙정보부, 외교안보연구원 등 국가안보기관을 상대로 많은 특강도 했다.
동남아 각국 박정희 대통령을 우상으로
박 대통령이 가나안 농장을 방문한 후 관계기관에 지시했음이 분명하다.
김 목사는 이 시절 안보기관 특강이 문제가 돼 YS시절 방북단 참가를 신청할 때마다 비토를 당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지금 김 목사는 북한 지원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중국 흑룡강성 왕청에 있는 가나안 농군학교를 통해 다각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두만강에 인접한 이곳의 조선족에게 농사일과 근로정신을 열심히 가르쳐 북한주민들에게도 복민주의가 파급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김 목사는 농군학교의 해외수출에 더욱 역점을 두겠다는 각오다. 대북지원의 결실도 소망하지만 고려인 25만명이 무국적으로 서럽게 살아가는 우즈베키스탄 3만8000평 규모의 농장과 농군학교 개설을 목표한다.
스탈린의 강제 이주 방침에 쫓겨나온 25만명의 고려인들은 가난하게 살며 조국애에 목말라 있다. 이 나라는 종교적 선교활동은 거부하지만 농군학교는 적극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그래서 10만 달러의 모금액으로 공산당 간부 휴양소 건물과 대지를 구입키로 가계약했다.
김 목사는 우즈베키스탄이 농군에게는 최상의 옥토라고 찬양한다.
수박이 제대로 자라면 30㎏짜리가 나오고 대추와 포도송이도 주먹크기까지 자란다.
잉어와 메기도 황소만큼 크다고 비유한다. 토지가 비옥하고 일조량이 많아 농사에는 더 이상 좋을 수 없다.
김 목사는 이곳 농군학교가 개교되면 고려인들의 사기도 올라가고 가난과의 투쟁도 종식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동남아 각국은 물론 중국과 우즈베키스탄까지 고 박정희 대통령과 새마을 운동에 대한 신뢰와 존경심 때문에 가나안 농장의 해외수출은 매우 유망하다고 자신한다.
김 목사는 각국이 박 대통령을 우상처럼 섬기는데 깜짝 놀랐다고 들려준다.
미얀마 군사정부 실력자의 한 사람이던 어느 3성장군은 영문판 박 대통령 전기를 성경처럼 휴대하고 다니더라고 한다.
그래서 원주와 하남의 농군학교 교육과정의 내실화도 추진하면서 기존 동남아와 중국은 물론 우즈베키스탄 농군학교 신설로 새로운 50주년 대장정에 진입하겠다는 포부이다.
다만 팔레스타인 농군학교의 경우 전쟁통에 6년간이나 운영이 안 되니 인접 요르단으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 고민 중이라고 한다.
부친의 강요, 설득 없지만 대물림
김 목사는 선친으로부터 농장의 근로정신을 가업으로 승계한 만큼 아들에게 물려주기를 소망한다.
외아들은 미국에서 화학을 공부하고 분자 생물학 학위를 받았으니 학자의 길로 가게 돼 있다. 그러다가 지난해 다시 신학대로 진학해 목사가 되고자 공부하고 있다.
여기에 강요나 설득이 없었노라고 해명한다.
그렇지만 이는 김 목사가 선친으로부터 강요받은 피가 대물림 됐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딸 셋이 출가했지만 사위들마저 직간접으로 가나안 농군 정신의 울타리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역시 강요없는 자발적인 참여라고 해명한다.
맏사위는 미국서 원자력과 기계공학을 공부한 학자로 성공하고 있지만 “언제든지 오라고 하시면 귀국하겠다”고 언약했다.
둘째 사위는 의사로서 가나안에 참여했고 따님은 직접 김 목사의 비서로서 온갖 역할을 다 맡고 있다.
셋째 사위는 쌍용자동차에 근무하고 있는데 외아들이라 독자적인 길을 걷도록 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다.
‘밖에서 온 다섯 식구’에 감사
이렇게 짚어보면 김 목사는 자신이 걸어온 운명과 팔자의 길이 자연스럽게 다시 가업으로 대물림 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자신은 낙천가의 성품으로 어느 자식에게도 강요하지 않고 일가 정신이 이어지리라고 확신하게 됐으니 얼마나 자족감을 누릴 수 있을까.
김 목사는 겉으로 자족감을 느낀다고 하지만 실상 가나안 50년사에 ‘잊을 수 없는 다섯 식구’가 있노라고 실토한다.
창업주 김용기 장로의 직계 5남매는 자랄 때부터 선친의 교육과 훈련으로 살아 왔기에 가나안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운명으로 받아 들여 진다.
반면에 가나안 태생이 아닌 또 다른 다섯 식구가 본의 아니게 가나안 정신으로 살고 있으니 김 목사로서는 마음에 걸린다는 뜻이다.
또 다른 다섯 식구는 일가 장로의 사위 2명과 며느리 3명을 말한다.
이중 맏사위인 평택대 림영철 교수는 가나안을 위해 30년간 혼신의 열정을 살아왔다고 한다.
또 그의 모친도 가나안에서 일생을 바쳐 노고를 다했으니 잊을 수 없는 식구로 꼽힌다.
둘째 사위 서울대 김기석 교수는 아직 젊은 나이라 가나안에서 봉사경력은 짧은 편이지만 가나안 정신만은 맏사위 못지않다.
며느리 셋도 가나안 식구로 시집와서 끝까지 가나안 정신으로 살아가야할 팔자이다.
김 목사는 이들 또 다른 다섯 식구를 주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그들의 헌신적 노고를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가나안 농장 창업주인 김용기 장로는 1909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으니 조선조와 일제를 산 선조이다. 어릴 적부터 기독교 신앙에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정신으로 독립운동, 농촌운동으로 일관했다.
8·15후 고양군 삼각교회와 농장건설로부터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번도 초심을 바꾸지 않았다.
생전에 남긴 발자취의 기록이 어떤 삶을 살아갔는지를 설명하고도 남는다.
1966년, 사회공익 부문 라몬 막사이사이상 수상으로부터 독립운동사에 오른 독립운동가, 일제하 농민운동 투쟁사, 영국 케임브리지 국제인물사전에 오른 정신적 지도자 1000명, 한국 5000년사 위인, 명현, 명사 3000명, 대한상록명감 1000명 중 제1호, 주님의 손 시대대변 교직자 56명, 기독교 100주년 위인 20명, 기독교 100년사의 100명에 등에 오른 기록이 가나안 농군 운동가의 빛나는 개척정신을 추앙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용기 장로가 남긴 농군학교란 일종의 민족정신 도장이다.
농군학교 가르침의 근본이 이 시대와 이 나라의 지도자 양성에 목적을 두고 있다. 교육의 원칙 6가지가 고인의 깊은 뜻을 그대로 대변하고 지금도 실천되고 있다.
맏사위 등 친지들 가나안에 협력
우리민족의 주체성 확립, 도덕교육을 통한 윤리규범의 생활화, 책임 있고 민주적인 지도자 자질 배양, 올바른 국가관, 사회관, 인생관의 확립, 자기극복을 통한 개척정신의 생활화, 근검절약의 생활화를 통한 건전한 경제생활 등이 그것이다.
한마디로 가나안 정신은 생활화의 실천이다. 이론이 모자라고 지식이 모자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실천과 생활화가 문제인 시절이다.
그러므로 배우고 알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게으름을 자기극복으로 깨우쳐 실천하고 행동토록 해야 한다는 정신이다.
가나안 농장이 50주년을 넘기고 새로운 50주년이 시작됐다. 다시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운동이 전국민에게 부활되기를 기대해 본다.
언론인 배병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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