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일 가나안 농장 이사장 <상>
배고픈 시절, 개척정신으로 살만큼 살게 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족정신 도장’으로 자부해 온 ‘가나안 농장’이 창립 53주년을 맞았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가나안 농장은 기독교 정신으로 살다간 일가(一家) 김용기(金容基) 장로가 남긴 근로정신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지금은 고인의 장남 김종일(金鍾鎰) 목사가 이사장을 맡고 동생 김평일 씨가 제1가나안 농군학교 교장, 셋째 김범일 씨가 원주에 있는 제2가나안 농군학교장을 맡아 이끈다. 그러니까 오늘의 가나안 농장과 농군학교는 고 김용기 장로가 생전에 엄격하게 교육하고 타계하기 전에 유언한 대로 한치 어김없이 민족정신의 도장으로 승계돼 53주년을 넘긴 것이다.
고인의 장암 김종일 목사는 가나안 농군학교 이사장, 가나안 복민회 이사장, 일가 기념상 이상 등을 맡아 가나안 농장을 대표한다.
선친의 농군 교육
은퇴목사지만 농군마저 은퇴할 수 없기에 이사장직을 한가롭게 맡고 있노라고 스스로를 낮춘다.
올해로 일흔 여덟에 이르지만 새벽기도와 인간교육 민족교육 등은 언제까지나 계속돼야 할 일이니 자신도 은퇴시기를 알 수 없다고 한다.
가나안 농장의 기본정신은 복민주의이다. 일제하의 농촌운동, 민족운동으로부터 성경의 복음을 실천하기 위해 황무지 개척과 의식개혁 운동을 복민주의로 체계화한 것이다.
김종일 목사가 이 복민운동에 일생을 바친 것은 운명이거나 팔자일지언정 스스로 선택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김 목사에게도 청소년적 꿈이 있고 이상이 따로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하면 신앙과 근로라는 개척자의 일생이 운명이었노라고 회상한다.
그는 불과 다섯 살 때부터 선친으로부터 호미자루를 들고 김 메고 가꾸는 농군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선친의 훈육은 엄격을 넘어 무서울 정도였다.
호미자루를 잡은 위치와 방식에서부터 풀을 뜯는 길이까지 일일이 지시하니 죽을 맛이었다.
나중에 수련이 되고 체질이 닮아가자 선친의 가르침이 효율적이고 경험에서 우러나온 실천적 방식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김 목사가 농군으로 단련돼 가면서 젊은 날의 취미나 꿈은 사라지고 ‘이유 있는 반항’도 절로 수그러들었다.
농토를 일구고 고구마를 심고 양돈, 양계의 재미를 느끼면서 농촌 신용협동조합운동에 심취하고 가나안 교회와 복민회 활동에 신명을 바치게 됐다.
김 목사에게는 투사와 혁명가의 꿈이 없지 않았었다. 황폐하고 가난했던 세월에 젊은 피가 끊을 때는 누구나 변혁을 생각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암울한 일제시대를 살아온 선친의 훈육이 철저한 농군으로 인도해 오늘의 자신을 낳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오늘의 김 목사는 근면과 근로정신의 상징이며 실천철학의 산 교범으로 불린다.
지금도 강단에 서서 두 시간 넘게 정신교육과 인간교육을 줄줄 외우다 시피 열강할 수 있는 힘이 신앙이자 개척정신에서 분출되고 있다는 소감이다.
김 목사는 경기도 하남시 풍산동의 가나안 농군학교에 기거한다.
서울시와 하남시가 연결되는 이곳이 53년 전 김용기 장로가 터를 잡은 복민주의 발상지다.
학교가 아직도 초창기의 흙벽돌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은 그린벨트 지역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씨 뿌리는 교육
가나안 농장의 실천강령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이다.
이에 대해 노사분쟁이나 반란이 있을 수 없다. 가나안 농장에 노조란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창업정신에 따른 엄격한 생활헌장이 살아 실천되고 있을 뿐이다.
밥 한끼에 꼬박 4시간은 근로해야 한다는 정신이다. ‘버는 재수 없거든 쓰는 재주도 없어야 한다’거나 ‘물질이나 마음의 빚을 지지 말라’, ‘하라고 하는 국민이 되지 말고 스스로 하는 국민이 되라’는 정신이 이곳 농장과 농군학교의 배움이자 질서이다.
창립 이래 60만명이 넘는 농군 사관생도가 배출된 것으로 집계된다. 농민은 물론 정치인, 장군, 기업인, 공직자 등 각계각층 지도자급 인사가 입소 교육을 받고 졸업했다.
태국의 청백리로 소개된 잠롱 방콕시장도 다녀갔다.
해외로도 널리 소문이 퍼져 농군학교 프로그램이 11개국에 수출되기에 이르렀다.
동남아 일대 와 중동에까지 가나안 농군이 한국형 새마을 운동과 유사한 근로운동의 불을 지피고 있다.
필리핀에서부터 태국, 방글라데시, 미얀마, 인도, 라오스, 캄보디아, 팔레스타인, 중국, 우즈베키스탄 등지에 이른다.
김 목사는 우리민족이 나라 잃은 일제의 서러움을 겪고 배고픈 농경시대를 살며 개척정신을 보여준 교훈이 있기에 각국이 가나안 정신의 해외수출을 받아들이고 있을 거라고 해석한다. 그러면서 가나안 농군학교는 “마음에 씨를 뿌리는 교육”이라고 풀이해 준다.
‘양복 입지 말고 고깃국 먹지 마라’
김 목사는 지난 세월동안 정신없이, 잃어버린 시간 없이 일하고 강의하고 설교하느라 어느새 세월이 지났는지 잘 알 수 없노라고 했다.
그러나 아득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생각해 보면 열심히 듣고 실천하는 이들은 의식이나 인격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실감했고 생애 목표까지 바뀌게 되는 현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김 목사는 서울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대 농학부 대학원에서 수학했지만 순탄한 과정을 누리지는 못했다.
동경대에서는 농학부 연구실에서 1년간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겨우 공부할 즈음이면 필리핀을 다녀오던 선친이 귀국하자고 해서 할 수 없이 따라와야만 했다.
일제하에 온갖 박해와 싸워온 김용기 장로가 바로 그런 분이었다.
자식들을 철저한 농군으로 단련시키기 위해 자신의 목표를 2세에게 거의 강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일가 댁 가정 규칙이 무려 27가지라고 한다.
가령 ‘머리를 짧게 깎아야 한다’, ‘양복과 넥타이와 구두는 안 된다’, ‘생일잔치도 안된다’, ‘국민소득이 1만달러 넘어설 때까지는 고기국은 안 된다’는 것이 규칙이다.
실제로 지금도 작업복을 평상복처럼 입고 다니는 김 목사는 선친이 타계하고 국민소득 1만불을 넘어선 YS시대에야 처음으로 고깃국을 먹을 수 있었다고 털어 놓는다.
선친 김용기 장로는 ‘장례식도 안된다’, ‘호화분묘는 더욱 안 된다’고 유언했다.
그래서 1988년 8월 임종했을 때 가족장을 준비했지만 농민단체와 종교계의 반대로 겨우 농민장으로 대신하고 가족묘에 안치
했다.
휴일 없지만 낙천가의 삶
김 목사가 이 같은 선친의 피를 고스란히 승계해 지금은 이미 타고난 팔자와 운명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낙천가로 유쾌하게 살고 있노라고 자랑한다.
김 목사는 청년기의 ‘이유있는 반항’을 회상하며 다소 쑥스럽다고 한다. 한때 양주고을 안동 김씨 문중에서 국회의원에 입후보하라고 권유해 눈치를 살폈더니 예상대로 불호령이 내렸다.
문중에서는 김용기 장로에게 권유하다가 듣지 않으니까 장남인 김 목사에게 입후보토록 설득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도 김 목사는 당연히 선친이 가르치는 농군의 길이 팔자소관이라 믿었기에 더 이상 항거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김 목사는 고혈압이 지적돼 약을 복용할 뿐 건강에 큰 문제는 없다.
천성으로 낙천인 데다 할 일이 많으니까 병을 앓을 틈이 없다고 한다.
매일 저녁 농장 인근 뚝방길을 한 시간 동안 걷기 운동으로 건강을 다진다.
하남시와 강동구를 잇는 뚝방길이 걷기 운동하기에는 쾌적한 환경이다.
밤 12시가 넘게 책 읽고 명상을 끝내야만 취침한다. 낮에는 근로하고 교육해야 하기 때문에 독서시간이 없다.
새벽 4시에 기상하면 새벽기도회 참석하고 6시 반에서 8시까지 90분 아침 강의가 하루도 뺄 수 없는 필수 과정이다.
8시에 조반을 마치면 또 온종일 근로와 일정이 기다린다.
휴일도 각종 예배로 쉴 틈이 없고 혹 미국교회의 부흥회에 참석하는 해외일정 때 몇 일간 휴가를 누릴 수 있을 뿐이다.
술, 담배하며 노래방 가거나 대모행사 등에 참가할 까닭이 없으니 휴가 없이 일해도 괜찮다는 것이 일을 숭상하는 낙천가의 삶이다.
배고파 헌병으로 6·25 참전
김 목사는 6·25 때 배가 고파 자진 입대해 헌병 중사로 제대했다. 김 목사 얼굴에 헌병 헬멧을 씌운 모습을 연상하면 우습게 여겨지지만 사실이다.
서울 경동고 재학 중에 피난길 대구에서 헌병학교를 거쳐 6사단 헌병대에 배속돼 전선을 누볐다.
상주로부터 원주, 철원을 거쳐 금강산을 지나 평양에 입성했다가 초산까지 밀고 올라갔던 그 때를 평생 잊을 수 없다.
전쟁 중의 군 생활이 고달프기 짝이 없었지만 김 목사는 오래도록 머물려고 온갖 방도를 다 생각했다. 집에 돌아가면 선친께서 또 농군 교육을 시킬 테니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무려 5년1개월간 복무 끝에 헌병 중사로 제대할 수밖에 없었다.
김 목사는 장기복무를 지원하지 않으려면 나가라고 해서 사실상 “좇겨났다”고 실토했다.
언론인 배병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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