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호 동아제약 회장
박카스 드링크의 동아제약은 창립 75년을 훌쩍 뛰어넘는다. 생명존중, 고객 존중을 제일의 가치로 내세우고 동아제약이 일제로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오난과 영광을 충분히 설명해 준다. 1932년 이후 흑백과 컬러로 기록된 화보가 살아있는 역사로 다가온다. 청년 창업자 강중희의 한복 두루마기 사진이나 강중희 상점의 독수리 마크 등이 동아의 오랜 발자취를 말해준다. 오늘의 동아는 아직도 ‘박카스’ 신화로 인식된다. 박카스가 제약업계 마케팅을 선도하며 동아를 명문의 반열로 끌어 올렸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리고 오늘의 동아는 ‘동아소시오’그룹으로 변신해 21세기 미래의 생명존중에 도전하고 있고 창업2세 강신호 회장은 의료인이자 제약 경영자로서 독특한 행보를 걷고 있다. 강 회장은 제약을 통한 국가와 사회에의 봉사를 기업으로 실천하고 있는 대표적 얼굴이다. 전경련이 주도하고 있는 1%클럽 운동의 상징으로 추앙된다.
까다로운 제약매출 5000억 돌파
강신호 회장은 동아제약 매출액이 5000억원을 돌파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러면서 제약 75년사에 기껏 5000억원이냐는 지적이 나올까를 의식한다.
웬만한 중견기업이면 매출액이 조를 넘는 시절이다. 그렇지만 비록 70년의 오랜 세월을 거쳤지만 매출액 5000억원 돌파를 높이 평가받고자 하는 것이 제약업계의 실상이다.
제약이란 생명산업으로 아무나 생산해 판촉할 수 있는 업종이 아니다. 엄격히 사전 통제되고 사후 검증되는 산업이 제약이다.
게다가 경기변동과 상관없이 연구개발해야 하고 마케팅 활동으로 시작을 개척해야 한다. 오리지널을 선호하는 제약소비자들을 상대로 외국산 수입약과 벅찬 경쟁을 벌여야만 한다. 이 같은 중첩된 환경 속에서 그나마 동아제약이 5000억원을 돌파한 것은 오랜 세월동안 꾸준히 개척해 온 신뢰의 성과로 볼 수 있다.
동아는 일제하의 강중희 상점 시대를 뿌리로 해방 후 6·25와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면서 성장하고 혁신해 오늘의 경영 전문화와 다각화 시대를 맞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동아가 국내 정상에 오르기까지 강 회장은 인재양성과 경영혁신에 앞장서서 제약 경영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해 왔으며 각종 사회봉사단체와 봉사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보여줬다. 이런 점에서 동아가 75년사를 자랑스럽게 발간, 배포한 것은 뜻 있는 일로 여겨진다.
전쟁과 정변 속의 창업과 성장
창업자의 강중희 상점은 스물다섯이던 1932년 종로구 중학동에서 문을 열었다.
강중희는 경북 상주군 은척면 무릉리에서 명문 진주 강씨가의 3남 3녀 가운데 차남으로 출생했다. 어릴 때 죽림서당에서 공부하다 열다섯에 2년 연상의 광산 김씨와 혼인한 후 문중에서 설립한 신광학원에 입학해 신학문과 일어를 배웠다.
열여덟에 관부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직물공장과 인쇄소 견습공으로 꿈을 키우다가 부친이 별세하자 귀국했다가 다시 나고야로 건너가 봉제 공장에서 일했다. 이렇게 넓은 세계로 눈을 돌린 안목으로 스물세살 적에 서울로 올라와 일인이 경영하던 동양제약 판매원으로 입사한 것이 필생의 제약 인생길이었다.
동양제약은 을지로 4가 국도극장 건너편 2층에 사무실을 두고 아스피린과 연고제를 판매했다. 이때 강중희는 주문, 배달, 수금 등에 부지런하고 열심이었다.
뒤에 동양제약이 영업정지 되자 친분있던 일인 미야베데이자가 판매상 동업을 제안해 미야베 약방을 개업한 것이 제약인생의 첫발이었다.
곧이어 미야베가 신문사로 전출하자 약방을 인수해 붙인 상호가 강중희 상점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시절 조선인 이름을 붙인 강중희 상점은 거래처로부터 따돌림을 당해 견디지 못하고 다시 미야베 약방으로 간판을 바꾼 수모를 겪었다.
그렇지만 천성적으로 부지런한 성품으로 곧 판매량 1위의 도매상으로 올라서고 감기약, 소화제, 생명수 등으로 제조허가까지 받아냈다. 태평양 전쟁으로 각종 물가가 희귀해 지고 통제가 극심했지만 강중희 상점은 잘 버텨냈다.
해방 후 혼란기에 미야베 약방을 동아약품 공사로 개명했지만 38이북의 수금이 불가능하고 재고처분이 어려웠다.
그러나 46년 제약업 허가와 생명수 생산으로 동아는 기지개를 펼 수 있었다. 생명수는 동화약품의 활명수와 경쟁한 인기 종목이었다. 강중희 상점을 개점한 지 17년만인 49년 8월에는 동아제약으로 법인화했다. 이후 6·25로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수복 후 ICA원조 자금으로 용두동에 항생제 공장을 설립, 본격적인 제약사를 기록할 수 있었다.
독일 유학 안목으로 박카스 착상
항생제 공장을 설립한 후 동아는 경영난을 겪어야만 했다. 독일에 유학 중이던 장남 강신호 박사가 귀국해 경영에 참여한 것이 이 무렵이었다.
1959년 귀국한 내과전공 강신호 박사는 입사와 동시에 제약인재를 발굴, 육성키로 했다. 사원 공채제가 그의 첫 신 경영이었다.
공채 1기생 유상옥 전 라미화장품 사장, 공채 2기생 유충식씨 등이 동아제약을 대표하는 공채 인재들이다.
배고픈 1960년대 동남아 비타민과 미네랄 복합영양제가 인기였다.
해외시찰을 통해 제약 시장 동향을 면밀히 검토한 강신호 상무는 독일 유학시절 함부르크 시청 지하홀에서 드링크제 상표로 선정한 것이 바로 60년대 박카스 신화의 시발점이었다.
박카스 D는 제약업 판촉과 마케팅의 대명사였다. 의료인이자 제약 경영자인 강신호의 이상과 꿈이 이를 통해 유감없이 펼쳐졌다.
종합 강간영양제, 젊음과 활력을 판매한다는 박카스 광고는 호소력이 뛰어났다. 피곤하고 무기력했던 그 시절 박카스는 젊음과 활력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동아제약 역사상 가장 자랑스럽게 내 세울 수 있는 이 박카스 신화가 강신호 박사와 동아의 성공을 두고두고 대변하게 된 것이다.
사회봉사의 신념과 생활화
창업자 강중희 회장은 1977년 7월 아쉬운 일흔 나이로 타계하고 강신호 사장이 뒤를 이었다.
고인은 국내 제약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기도 했지만 공사를 엄격히 구분하고 인간애를 실천한 유지를 남겼다. 육영, 장학사업에도 열성을 보여줬다.
창업 2세로 사장이 된 강신호는 “기업이 개인 소유로 지배되는 시대는 지났다”고 선언했다. 특정인 소유이기보다 동아제약인 모두가 주인이자 후세에 물려 줄 관리자이자 책임자 일 뿐이라고 밝혔다.
1970년 아직 대다수 기업인이 창업기를 맞고 있을 때 강신호 사장의 경영방침은 획기적이고 혁명적이었다. 강 사장은 창의, 협동, 봉사를 경영방침으로 설정하고 인재 양성에 과감하게 투자했다.
동아제약이 사회봉사의 기업정신을 본격적으로 실천한 것이 강신호 사장의 정신이었다. 제약의 홍보와 마케팅도 사회봉사와 연결됐다.
그리고 이 같은 봉사가 다시 박카스와 동아를 신뢰하는 우호적 정신으로 되돌아 왔다. 강 사장이 전문 경영인에게 책임을 맡기고 각종 사회봉사활동으로 나서면서 ‘말보다 실천하는 전문인’으로 각인되기에 이르렀다. 강 회장은 신념과 생활로 사회봉사 활동을 보여줬다.
제약협회장, 산업기술진흥협회장 등 전문분야의 명예직은 말할 것도 없고 적십자사 운동이나 사회공헌 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한 것이 강 회장의 본업이었다.
전경련이 역점을 두고 있는 1% 클럽의 초대 회장으로 경상이익의 1%를 사회와 함께 나누는 운동의 기초를 닦은 것도 강 회장이었다. 그래서 강 회장은 박카스 신화로서가 아니라 실천하는 사회봉사가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봉합 안 된 동아제약 부자갈등
강문석 이사 형사고발 방침 고수
경영권 싸움이 법정 싸움으로 번질 양상이다. 동아제약 현 경영진들은 지난달 강문석 이사를 상대로 제기한 형사고소를 계속할 방침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과 강문석 이사의 부자간 갈등은 세간에 경영권을 놓고 벌어진 가족간의 싸움으로 비쳐져 눈총을 샀다.
부자간의 갈등은 지난 7월 격해지기 시작했다.
강문석 이사 등이 현 경영진이 자사주를 근거로 교환사채를 발행, 주주가치를 훼손했다고 임시 주총을 요구했다. 또 현 경영진의 퇴진을 요구하며 새로운 이사진을 추천했다.
반면 경영진들은 지난달 강 이사를 회사 내부 정보를 이용한 배임과 횡령 등의 혐의로 형사 고소하는 등 내부 갈등은 확산 일로를 걸었다.
내부 갈등은 지난달 말 열린 임시총회에서 마무리되는 것으로 보였다. 강 이사측이 제기한 신임 이사안은 부결되면서 부자간의 갈등이 봉합되는 것이 아니냐는 전망이 돌았다. 강 이사도 임시주주총회 직전에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주주 및 임직원 여러분께 최근 일련의 사태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며 사죄를 한다“고 밝혔다. 회사의 화합을 위해 백의종군 하겠다는 의사도 덧붙었다.
그러나 현 경영진이 회사차원에서 제기한 강 이사의 고소를 취하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전해지면서 부자간의 경영권 싸움이 법정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돌고 있다.
이에 따라 동아제약 내부의 갈등이 어떤 모습으로 봉합될지 경제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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