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하 삼양그룹 회장
경제단체 맏형 격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12년을 끝으로 명예감투 세계에서 물러난 삼양사 김상하 회장의 일상은 여전히 화합과 중용이다. 오랜 경제활동과 각종 봉사 활동을 통해 ‘4통8달’의 화합정신을 보여주고 은퇴했다지만 지금도 공식, 비공식 일정이 바쁘다. 건강은 더욱 좋아 보이는데다가 신문을 읽거나 책을 보거나 이런저런 일로 ‘조금은 바쁘다’고 스스로 일러준다. 김 회장은 세상 돌아가는 관심사항에 관한 질문에 ‘꿈도 삶도 모두 물 흐르듯’ 태평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필생의 소신이라 강조한다. ‘세상만사 억지로 되는 법이 없다’는 말로 경제계와 사회에 남겨준 화합의 원로가 살아온 역정을 짐작케 해준다.
종로구 연지동 263번지, 고목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는 명당 터에 자리 잡은 삼양사는 보수적 색채가 가장 짙은 기업으로 정평이 난지 오래다. 전혀 모나지 않고 가식 없고 남을 비난하는 법이 없는 성품을 잘 알고 있었지만 행여나 경영책임을 맡고 나서 김 회장마저 어딘가 눈치 살펴야 할 곳이 생겼을까 싶기도 하다.
김 회장은 대한상의 회장직을 졸업하고 어떻게 지내셨느냐는 질문에 ‘고문 수준의 법정 회장직’에 충실하고 있다고 밝힌다. 세칭 오너 회장이 고문 수준이라고 자칭하는 것도 본래의 성품이다.
화합과 중용의 지도력이란 세평이 갑자기 생긴 말이 아니다. 얼마 전까지 수십 개의 명예감투와 봉사직을 주렁주렁 지고 다닐 때도 김 회장은 막힘이나 굴절이 거의 없었다.
경제계나 사회단체 또는 정부 일각에서도 명예감투가 생기면 ‘김상하 회장에게 맡기는 것이 적격’이라는 공론이 많았다. 그래서 김 회장은 ‘하는 수 없이’ 맡았다는 감투가 엄청 많았다.
후임 없어 장묘문화 회장직 장수
김 회장이 장묘문화개혁협의회 이사장을 맡은 것에는 배경이 있다. 재벌 가계의 혈통으로 태어났지만 뜻밖에도 선천적으로 호화분묘를 거부한 내력이 있었다. 또 고건 전 국무총리가 장묘문화 개혁을 추진할 때 이사장직 수락을 간청했다.
그래서 1998년 회장을 맡은 후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감투를 쓰고 있지만 후임자 없어 넘겨줄 방도가 없노라고 한다. 당초 궂은 일로 여겨 아무도 맡지 않으려 해서 맡았던 것이 바로 김 회장 특유의 친화와 융합성품이었음은 물론이다.
한일경제협회장과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이사장직은 김 회장이 애착과 사명감을 보이는 감투이다. 일본경제신문을 매일 탐독하는 김 회장은 한일간의 경제, 산업, 기술협력이 상호 국익신장에 기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산업기술협력재단은 노태우 전 대통령과 미와자키 전 수상간의 합의로 발족돼 양국의 기술협력과 문화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재계와 무역업계가 100억원을 출연해 재단의 기초를 쌓고 산자부로부터 주요 프로젝트 추진비를 지원받아 실질적인 협력사업이 매년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이중 일본의 정년 퇴직자를 초빙해 국내 연관업계에 숙련기술을 전파하고 사업이나 양국 대학생들의 상호연수 프로그램은 매우 각광 받고 있다고 자랑한다.
당연하다고 믿어지지만 김 회장의 대한상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유별나다. 1988년 회장을 맡아 12년을 장수했으니 미운 정 고운 정이 깊고 깊을 것이 물론이다. 게다가 부회장 6년을 합치면 대한상의와 18년을 함께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절도와 예절기관
김 회장은 삼양사에서 월급은 꼬박꼬박 받으면서 회사에 근무한 일수보다 밖에 외출했던 기간이 훨씬 길었던 ‘기이한 경력’을 소개했다.
더군다나 대한농구협회장 12년을 감안하면 삼양사에서 월급을 받기가 다소 쑥스러운 것이 사실이라고 고백하기도 한다.
김 회장은 경제단체 가운데 상의만큼 오순도순한 집안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절도와 예절이 상의의 내력이며 전임과 후임의
관계에 품위가 돈독한 것이 특징이라고 자찬한다.
김 회장이 대한상의 회장직을 맡게 된 것은 정수창 회장의 강력한 추천 때문이었다고 밝힌다. 고 정 회장의 성품도 소탈하고 가식이 없었다. 그렇지만 뜻밖에도 장수를 누리지 못하고 김 회장은 아쉽게 회상한다.
태완선 회장도 70대에 타계했고 박두병 회장과 김성곤 회장은 60대에 별세했다. 이 때문에 대한상의의 회장은 단명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김 회장은 타고난 건강으로 장수를 기록할 것으로 확신된다.
김 회장은 경영책임 위치에 있으면서 회사 경영은 잘 모른다고 한다. 이미 체제가 확립돼 잘하고 있는데 ‘공연히’ 회장 자리에 앉아 있으니 사실상 고문 격에 지나지 않는다는 농이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회의는 꼭 참석하지만 실제 할일은 별로 없다고 한다. 화요일 회의는 그냥 듣기만 하고 금요일 사장단 회의는 보고를 받기만 한다는 말이다. 두 차례 회의에 참석하는 것도 평소 임직원들이 회장실을 찾아오는 번거로운 절차를 막기 위해서라고 해석한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전통 형제애
‘공연히’ 회장 자리에 있으니까 출퇴근 시간은 자유로워 좋다고 한다. 대체로 9시에 출근했다가 책을 다 읽거나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5시에 퇴근해도 간섭이 없고 늦은 시각에 퇴근해도 상관없으니 물 흐르듯 사는 자유인이라고 자부한다.
삼양사 집안의 우애와 예절은 뿌리가 깊기로 유명하다. 김 회장은 사옥 11층 같은 위치에 있는 3년 위의 김상홍 명예회장을 극진히 모신다. 수시로 ‘접니다’라고 손등으로 노크하며 형님 방으로 찾아가 이런 일 저런 일을 깨알처럼 보고한다. 김 명예도 친구처럼 웃고 반기며 OK식으로 화답한다.
김 회장은 약속이 없는 날 형제간에 구내식당에 내려가 무료식사를 함께 한다. 이렇게 전통적인 형제애에도 불구하고 아침 출근은 형님이 9시인데 비해 아우는 9시30분이 통상이다. 김 명예회장은 “집에 있으면 할일이 없어 일찍 출근한다”고 했고 김 회
장은 형님이 너무 빨리 출근하기 때문에 자신이 늦은 출근이 되고 만다고 풀이한다.
김상홍 명예회장과 김상하 회장이 형님, 아우님 하는 삼양사 빌딩 11층은 고요하고 적막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두 분의 집무실 분위기도 비슷하게 한적하다. 각종 책이 수북이 쌓여 있고 기념패와 기념품 여러 점이 말끔하게 정돈돼 있을 뿐이다.
뜻밖에도 골동품이나 미술품 등 값나가는 수집품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두 분이 다 같이 특별한 취미가 없다고 한다. 그러니 두 분 사이는 무료함을 나두는 명랑하고 천진난만한 친구가 아닐까 싶은 소감이다.
김 회장은 실권을 행사하고 명예회장은 시어머니 역할을 맡고 있지 않을까 하는 관측은 사실이 아니었다. 두 분이 똑같이 “우린 이미 무장해제 당했다”며 고희를 함께 넘긴 세월을 말해준다.
김 회장은 서울에서의 출생과 성장과정을 잠시 회고하며 “형님께서는 스케이트 잘 타시고 싸움에 지지 않으시고”라고 들려준다.
살아있는 조선 양반댁 가풍
김 회장은 자신은 ‘종3’이 고향이고 형님은 쌍림동 시골출신이라고 우스개 한다. 선친 김연수 회장이 경성고무 사장으로 승진했던 1926년 종로3가 봉익동 저택에서 태어났으니 종3 출신이라는 말이다. 반면에 김 명예는 선친이 경성고무 전무시절, 쌍림동 공장 내의 숙소에서 침식하고 있을 때라 종로보다 구석진 마을에서 태어났다는 말이다.
그리고 김 회장이 다섯 살 때 성북동으로 이사해 8·15를 맞았으니 토종 서울 양반이다. 교동 초등학교, 경복고, 서울대 정치학과 등 명문 코스를 밟은 것도 일종의 서울 양반 특권이었다. 김 명예는 보성전문(현 고대)으로 진학해 동생과는 다소 다른 길을 걸었다.
김 회장은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하며 평생 건강과 다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 오직 선고의 음덕이라고 찬양한다. 마치 아직도 조선조 양반댁 가풍이 살아있다는 느낌이다.
김 회장은 귀골로 태어났지만 식성이나 생활이 천성으로 대범하다.
기호식이 따로 없고 싫어하는 음식이 별로 없다. 술도 가리지 않고 즐겁게 마신다.
소주나 위스키도 좋아하고 냉면과 갈비탕도 즐긴다. 부모님께서 튼튼한 위장을 주셨기에 요즘 많은 이들이 꺼려하는 쇠고기와 닭고기도 수시로 먹고 있노라고 전해준다.
특별태생이 보통사람으로 산다
다만 주량은 대폭 줄어들어 열일곱 살 처녀(발렌타인 17년)를 따는 거사는 일절 중단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 명예회장은 한창 시절에 두주불사로 너무 과음해 조상으로부터 허용 받은 한도가 소진돼 한잔도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김 회장은 무거운 감투들을 거의 벗은 후 1년에 한 두 번씩 여유를 갖고 해외여행을 즐기는 것이 낙이라고 소개한다.
정치의 계절을 맞아 재벌과 정치자금이 문제고 온갖 허욕과 과욕이 세상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을 때 김 회장 이야기는 마치 무욕의 태평세월에나 비유된다. 김 회장 스스로는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해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세상’을 약속했던 일을 상기시키며 진실로 보통 사람으로 살고자 다짐해 온 세월에 자족감을 느낀다고 했다.
출생과 성장이 특별했던 우리사회의 원로가 보통사람임을 강조하는 것도 듣고 보기에 좋았다.
언론인 배병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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