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 흘리지 않는 체험은 가치가 없다
땀 흘리지 않는 체험은 가치가 없다
  • 언론인 배병휴 
  • 입력 2007-10-15 15:47
  • 승인 2007.10.15 15: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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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휴의 재계 원로 탐험 ⑮
-전중윤 삼양식품 회장<하>

전중윤 삼양식품 회장은 배고픔을 모르고 자란 귀골이었다. 강원도 철원군 금화군 임남면 달전리 223번지에서 양반댁 정선 전씨가에서 탄생했다. 중시조가 경북 달성에서 웅지를 틀어 달성파이지만 임진왜란 때 송도를 거쳐 금성으로 옮겨 강원도 출신이 됐다. 강원도민이라고 모두 감자와 옥수수로 끼니를 때운 것이 아니고 전 회장댁은 철원평야 오곡백과가 넉넉한 집안이었다. 향리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조선인 학생들이 입학하기 어려운 선린상고로 진학할 수 있었던 것도 양반댁 위세였다. 이 같은 배경을 가진 전중윤 소년이 배고픈 국민을 생각하며 필생의 식품산업에 투신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전 소년은 금성공립 6학년 때 골절상으로 철원 도립병원에 입원했다가 뒤에 내금강 장안여관에서 요양하면서 조선방송사업협회장인 일본인 호사카씨를 알게 됐다.

그리고 호사카씨의 추천으로 용산우체국 서무과에 특채가 됐다가 선린상고에 진학, 총독부 체신국 보험과로 출세하게 됐다.

전 회장이 나중에 자신의 사업으로 동방생명을 창업하고 제일생명 경영을 맡은 것은 총독부 시절 보험업무를 익혔기 때문이다.

총독부 벼슬자리는 좋았지만 전쟁 말기 현상이 빚어지자 부모를 모시겠다는 생각으로 철원 우체국으로 지원, 전근해 있다가 사직하고 해방을 맞았다. 낙향한지 43일 만에 8·15를 맞았다.

미군정 하에서 다시 체신부 행정관으로 기용됐지만 1년 만에 그만두고 6·25 전까지는 국유재산으로 관리되던 도시바 전기와 중앙공예물산 등에서 일했다.

6·25는 직장동료가 살고 있던 전북 이리에서 피난했다. 훗날 삼양식품이 이리에 호남지사와 공장을 설립한 것이 바로 피난 시절 온정에 대한 보은이었다.

전 회장의 첫 창업사업은 1959년 설립한 동방생명이었다. 사장 강의수, 부사장 전중윤씨로 기록돼 있지만 공동창업이었다.

그 뒤 잠시 제일생명 사장으로 근무한 적이 있지만 이때는 전문 경영인 지위였다. 그러니까 굳이 전 회장의 기업사를 정리하자면 보험에서 식품으로 변신한 셈이다.

동방생명 시절 전중윤 부사장은 한껏 업무능력을 발휘했다. 전후 복구공사에 시달리며 공무원 처우가 빈약한 때지만 경찰 공무원 퇴직보험을 몽땅 유치해 설립 3년 만에 업계 1위 자리를 확보했다.

당시 내무부 장관 장경근, 법무장관 이호 씨 등 동경제대 출신이 관료사회를 지배할 때 경찰 공무원 보험 유치는 장관 결재 사항이라 유치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일제말기 평창군수 출신의 이근직씨가 내무장관으로 부임하자 ‘말이 통해’ 4만 명의 경찰 퇴직보험을 계약하기 이르렀다.

그러나 전 부사장의 사업적 성공에 과로가 따르고 위장염이 겹쳐 백병원에 입원, 수술 후 동방생명을 사직하고 말았다.

그 뒤 재무부의 요청으로 부실경영이던 제일생명 사장으로 취임해 재기를 추진하다가 식품산업계로 옮기는 계기를 맞았다. 동남아와 일본 시찰을 통해 안목을 넓혀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에 목을 걸고 있던 식량문제에 몰두하게 된 것이다.

1961년 유지공업체를 인수해 삼양제유로 개칭했다가 다시 삼양공업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라면을 생각해 낸 것은 남대문 시장 바닥에서 5원짜리 꿀꿀이죽을 사먹으려 장사진을 치고 있는 비참한 현장을 보고 느낀 전광석화 같은 영감이었다.

일본에서 먹어본 라면이 생각났다. 패전 후 일본은 하루 겨우 두 끼를 먹으며 배를 주리고 있다가 1958년부터 라면이 생산됐다.


JP 귀띔으로 5만 달러 불하받아

라면은 중·일 전쟁 때 관동군이 중국의 전시 비상식량인 건면을 보고 개발코자 하던 것을 종전 후 미국의 밀가루 원조로 국수를 만들다가 이를 기름에 튀겨 영양식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삼양이 라면을 생각고자 구상했을 때 제조기술과 설비도입이 지극히 어려웠다.

일제라면 제조기 1개 라인을 도입하는데도 6만 달러가 필요했다. 당시 한국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외화는 총 16만 달러에 불과했다.

이 중에서 6만 달러를 끄집어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전 사장은 JP를 통해 박 대통령에게 라면 샘플을 전해 올리고 졸랐다. 대통령은 신기하면서도 맛이 좋다고 평하더라고 했다.

전 사장은 새로운 식품개발이라는 훌륭한 사업계획서를 들고 다니며 정부를 설득했지만 나라에 달러가 없으니 통하지 않았다.

JP가 귀띔하기를 농림부가 미 잉여농산물 대금으로 10만 달러쯤 보유하고 있을 것이라고 일러 줬다.

그래서 온갖 통로를 거쳐 5만 달러를 불하받아 기계를 도입, 주황색 포장지에 담긴 100g짜리 라면을 생산할 수 있었다.

쌀이 모자라던 시절 라면은 보조식이 아닌 대용식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삼양라면은 어렵게 생산한 라면을 널리 보급코자 관철동에서 영업소를 차리고 라디오 광고를 시작했다. 그러나 라면이란 이름이 생소했다.

“도대체 라면이 뭣이요, 옷감이요 실이요”라는 빈정거림도 나왔다. ‘후루룩 삼양라면’은 팔리지 않고 재고로 쌓였다. 궁리 끝에 가가호호를 찾아다니며 무료시식으로 판촉하기 시작했다.


‘라면이 옷감이요 실이요’

무료시식 선전은 효과가 있었지만 원료구입난이 문제였다. 소맥도 구하기 어렵고 튀김용 유지도 수입금지로 구입난이었다.

임시방편으로 도살장을 찾아다니며 쇠기름을 얻기도 했다. 도살장에서 확보한 생지를 가마솥에 끊여 기름을 짜내니 탈산이 제
대로 안 돼 라면의 보존기간은 1주일밖에 안됐다.

1966년 우지의 수입허가가 나올 때까지 이 같은 곤궁한 원료난은 계속됐다.

따지고 보면 라면사업은 초창기부터 전성기에 이르러 우지파동을 겪기까지 우지와의 번거로운 싸움이었다는 회고이다.

삼양라면 창업 1년6개월 만에 밑천이 거의 바닥이 났었다. 럭키라면, 동방라면, 내외라면 등 소문을 듣고 참여했던 후발 회사들도 손을 들고 말았다.

경쟁사들이 철수한 후 삼양은 다시 은행융자로 생산을 확대하고 무료시식으로 인식을 넓혀 3년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이때가 1964년으로 한 그릇에 10원짜리를 월 100만개씩 대량공급하게 됐다. 그리고 1965년 10월 삼양공업을 삼양식품공업으로 개칭하고 ‘정직과 신용’으로 번창기를 누리게 된 것이다.


백년을 살되 천년을 내다본다

삼양이 식품그룹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전중윤 회장의 집념이 원동력이었다. 전 회장은 한 때 식품황제라는 칭호를 받았다. 동탑에서 은탑과 금탑산업 훈장도 받았다. 그러다가 우지파동에 낙마했다가 재기했으니 순탄한 여정보다는 곡절과 파란으로 점철된 인생이다.

전 회장의 좌우명은 ‘인간백회 천세우(人間百懷 千歲憂)’이다.

비록 인간이 백세를 살기 어렵지만 천년 뒤를 걱정하며 살자는 뜻이다. 삼양식품그룹을 이끌어 온 에너지가 이 말에서 나왔다.

전 회장이 창업 이래 지금껏 강조해 온 이념과 행동을 정리한 경영실록에 따르면 그의 신념과 소망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풍요의 바탕은 근면’이고 ‘건전한 기업이 곧 국력이다’ ‘신용은 기업의 생명이고 삼양의 생명이다’

‘경영은 국가에 공헌하는 사상’이며 ‘땀 흘리지 않는 체험은 가치가 없다’

‘삼양식품에 국경은 없다’ ‘라면을 세계인의 식량으로’ ‘소비자의 말은 하늘의 소리다‘ ’초심을 잊지 말자’ 이 같은 정신과 신앙이 전 회장의 출생과 성장과 독서에서 나왔다.

전 회장은 끝임 없는 독서로 자원과 지식을 얻어내는 경영자이다. 전 회장은 우지사건의 결말이 나기 전에 “양심과 도덕에 한 치의 부끄러움 없다”고 선언하고 “우지사건의 조작은 반드시 정의의 심판을 받는다”고 확신했다.

전 회장은 지금도 일을 예찬하고 근면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조상님들은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봄에 하루를 놀면 겨울에 열흘을 굶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젊어서 부지런히 일해야 노년이 편안해 집니다”


박 대통령은 기업편이었소

전 회장은 일제 해방과 6·25를 몸으로 체험한 원로세대이다. 나라의 안위와 사회질서를 유달리 걱정하는 것이 원로세대들의 공통점이다.

정계에도 할 말이 많고 남북관계를 두고 믿지 못할 사항도 많게 느낀다. 그렇지만 구태여 말하려 하지 않는다. 기업인이 하고 싶은 말을 다하게 놔두지 않는 세태 때문일 것이다.

전 회장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박 대통령이 기업을 이해하고 잘 독려한 것으로 이해한다. 가난을 알고 핍박받는 민족의 서러움을 안 박 대통령이 밥 먹고 살만한 나라를 건설하지 않았느냐는 뜻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는 집안이라 할 수 있다. 전 전 대통령은 합천의 완산파이고 전 회장은 성산파이다.

전씨 중앙종친회장을 지낸 전 회장이 종친 모임 때 전 전 대통령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렇지만 교분이나 친밀감을 표시하지 않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YS, DJ에 이르기까지 역대 대통령과 관련된 이야기는 노코멘트다. 단지 박 대통령과 관련된 이야기만 조금씩 털어 놓는다.

전 회장은 육영수 여사가 다닌 배화여고에 딸 셋을 보냈다. 이 인연으로 배화학원 이사장을 맡고 기념관을 건립해 주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육 여사에 관한 회고도 적지 않다.

노 기업인이 무엇이 두려워 그토록 비정치를 강조하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는 소감이다.

<언론인>

언론인 배병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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