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중윤 삼양식품 회장<상>
세칭 ‘우지파동’을 겪은 뒤 라면업계가 어떤 상황일까. 특히 라면의 대명사이던 삼양식품의 뒷 소식이 궁금하다. 우지라면은 분명 무죄로 확정된 바 있지만 라면업계 정상에 삼양은 보이지 않는다. 한때 식품공업협회장으로 업계를 대표하던 전중윤 회장의 소식도 궁금하다. 1922년생이니 벌써 연로한 창업1세대로 은퇴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뜻밖에도 성북구 하월곡1동 창업지 본사에서 만날 수 있는 전 회장은 왕성한 현역이다. 도무지 산술적 나이를 믿을 수 없을 만큼 건강하고 의욕이 넘친다. 전 회장은 미래의 식품을 개발하는 삼양식품그룹을 재건하기 위해 창업정신으로 되돌아 와 제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라고 한다.
전 회장은 더 이상 분노하기보다 분발하고 있다면서 심경을 담담하게 밝힌다. 온 삼양가족이 똘똘 뭉쳐 분발한지 꽤 오래됐다고 한다. 한때 즐겼던 골프는 손을 떼고 그 대신 아침 산책이나 하고 휴일이면 대관령 목장에서 아무런 근심 없이 젖소와 산천초목과 호흡한다고 소개한다. 목장은 일손 구하기 어렵고 수지도 안 맞지만 자연과 함께 하면 심신이 그렇게 편안할 수 없다고 자랑한다.
신념 앞에 떨어진 청천벽력
사실이야 세상이 알고 있듯 가혹한 시련을 겪은 후 계열 기업들이 떨어져 나가고 골프장도 처분한 울적한 심정을 어찌 감출 수
있을까. 골프를 치고 싶은 생각이 남아 있을 리 없다.
전 회장은 우스개로 ‘암하노불’(岩下老佛)이라고 소개한다. 강원도 사람들의 본성이 ‘감정을 삭이고 부처님처럼 꿋꿋하다’는 세간의 평판에다 자신의 심정을 비유하는 말이다.
우지파동으로 삼양식품은 풍전등화격의 위기를 겪었다. 웬만했으면 그때 재기불능이었다. 장장 9년여 법정투쟁을 치렀으니 회사가 거덜 날 지경이었다.
끝내 고법과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으니 명예는 회복했다. 그렇지만 1000여 삼양가족을 잃고 6500억원의 매출액이 고작 2500억원으로 줄어들었다. 시장 점유율 65%가 15%로 떨어졌다. 그러므로 잃을 것은 다 잃고 빈껍데기 명예만 되찾은 셈이다.
기업가로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이자 치욕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분노와 적개심으로 제풀에 쓰러질 수 있는 형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전 회장은 더 이상 분노하기보다 분발하기로 작정하고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않기로 했다. 오로지 기업가로서 명예를 되찾았으니 회사를 재건시키는 것이 중요하고 시급했기 때문이다.
성북구 하월곡1동 삼양식품 본사는 40여 년 전 온 나라가 배고플 때 ‘기적의 쌀’로 불리는 라면을 생산하기 시작한 창업터이다.
그때 하월곡1동은 온통 논밭이었고 공동묘지가 가까이에 있었다.
창업터 주변에만 겨우 20여 호가 올망졸망 들어섰던 외진 시골이었다. 이곳에 삼양이란 옥호를 내세운 것은 시대 상황을 말해
준다.
천·지·인 셋이 화목하자는 삼(三)에다 배불리 영양을 공급하자니 양(養)이다. 실제로 삼양은 식품공업의 혁명을 일으켰다. 라면이란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간편한 주식으로 떠올랐다.
한마디로 당시 ‘배고픈 국민들에게 밥을 먹여 주겠다’고 공약하고 집권한 나라님도 즐겨 먹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라면에 고춧가루를 넣어 먹으니 얼큰해서 좋아”라며 술 먹은 다음날이면 라면을 찾았다.
삼양은 창업자 전중윤 회장의 신념이 경영철학이었다. ‘진실한 기업의 성장추구’, ‘안전하고 맛있는 식품공급’, ‘미래의 식량자원 개발’ 등이 그것이다.
전 회장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남대문 시장에 실업자들이 우글거리던 시절에 창업했다. 당시 실업자들은 5원짜리 꿀꿀이죽으로 연명하는 처지였다.
그래서 라면을 생산하자마자 값을 10원으로 매겼다. 배고픈 이들을 상대로 가장 싼값으로 판매하겠다는 배려였다. 그로부터 라면은 값싸고 요긴한 식품으로 각인돼 지금도 한 그릇 1000원이란 싼값의 한계를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절치부심의 분발이었다오”,/b>
전 회장은 속으로 애국애족의 심정이었다. 나라와 소비자를 속인다는 생각은 엄두도 내지 않았다.
창업 이래 35년간 정직과 신용만으로 우리의 식품문화와 국민보건에 헌신해 왔다고 자부하던 시절인 1989년 11월 날벼락을 맞았다. 세칭 우지라면 파동이었다.
라면업자들이 온통 악덕이고 돈 벌레로 묘사됐다. 먹지도 못할 공업용 우지로 라면을 생산했다고 고발돼 재판을 받았으니 무지막지한 형벌이 아니고 무엇인가.
전 회장은 통탄, 비참, 청천벽력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10년 세월을 독서로 보내며 하늘의 심판을 기다렸다. 장서 1만여 권의 대부분을 이 무렵에 읽었노라고 한다. 그리고 암하노불의 심정으로 오늘이 다시 오기를 기다렸었다는 이야기다.
가혹한 시대상황의 형벌이 내려진 10년간 삼양인들은 오로지 절치부심이었다.
1998년 11월 삼양식품 임직원 일동이 재기를 선언한 바 있다. 1989년 11월 조작된 우지파동으로 우리는 몹시 분통해 속을 썩혀오며 절치부심했다. 우지파동으로 사생(死生)한지 10년 동안 겪었던 인고의 세월과 억울함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오늘날 화의의 원인도 조작된 우지사건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은 결과이다.
이제 10년 전을 상기하면서 일심 단결해 그간의 역경을 극복했듯이 총력을 기울이고 분발해 빼앗긴 우리의 시장을 기필코 탈환해 우리의 삶터인 삼양식품을 ‘제2의 창업정신으로 재기시키자’ 듣고 보면 가슴이 뭉클하게 느껴온다. 삼양가족은 아니지만 얼마나 억울하고 비통했을까 짐작할 수 있다. 절치부심이라는 표현이 매우 적절하다고 인정된다.
악덕 누명 벗고 무죄 확정
전 회장은 악몽 같은 그때를 일일이 회상하기보다 메모지 한 장으로 오늘의 자신을 대변해 준다.
메모에는 도덕력(道德力)과 백화요란이라고 적혀있다. ‘우리는 자칫하면 지식과 학력, 돈과 지위로 인생의 행복을 저울질하게 된다. 공부 많이 해 지식과 학력을 힘으로 돈과 지위를 획득하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게 된다. 그러나 지식과 학력을 겸비했다고 해도 인간으로서 품성이 결여된다면 존경을 받을 수 있겠는가. 도덕력, 품성이 행복의 원동력이라 믿는다’
전 회장은 10년 악몽을 이겨내면서 도덕력이 행복의 원천이라 확신하게 됐다는 뜻이다. 그리고 백화요란이란 조화나 평화를 다짐하고자 생각해 낸 명구이다.
‘사람과 사람은 국가, 민족, 종교, 사상, 문화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남을 인정함으로써 사이좋게 조화를 이룬다. 백화요란처럼 수많은 꽃이 피어있지만 흰꽃, 붉은 꽃이 서로 남을 탓하지 않고 자기 아름다움을 자랑하니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가’ 이처럼 인간도 화목하고 조화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도 우스꽝스럽고 믿어지지 않는 해괴한 사건이었다. 1989년 11월 신문과 방송은 라면 5개사가 공업용 쇠기름으로 라면을 생산한 것이 뒤늦게 들통이 났다면서 난리를 피웠다. 언론은 검찰 수사를 따라 다니면서 시시각각 전황을 보도하기에 바빴고 소비자들은 속을 뒤틀려 마음을 진정 시킬 수 없었다.
그렇지만 사건발생 5년 8개월만인 1995년 7월 서울고등법원은 이를 무죄로 판결했다. 그리고 3년여 뒤 대법원마저 최종 무죄로 확정 판결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는 것이 10년이 훨씬 넘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삼양식품은 당시 20여년 간 적법한 절차에 의해 수입사용하고 있던 우지를 검찰이 갑자기 수사라고 기소한 사실에 배경이 있었을 것으로 믿는다. 터무니없는 고발을 믿고 거대한 공권력이 5개 라면회사를 죽이려 달려든 것이 정상일 수는 없다. 게다가 검찰의 잘못된 발표를 언론이 한술 더 떠 과장 보도한 것도 믿어지지 않는다고 고개를 내 젓는다.
공업용 우지를 사용했다는 억지고발은 엉터리였고 전문가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무리한 고발이었다. 또한 무죄를 유죄로 끌어가려다 필요이상 시간을 오래 끌면서 업계는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어야만 했다.
서울지방법원에서는 4년간 재판부를 5번이나 교체하는 진통 끝에 무거운 징역형과 벌금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고법과 대법원이 무죄로 확정판결 하기까지 검찰은 유죄를 입증코자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언론보도도 끝까지 검찰편에 서 있지는 않았다.
고법의 무죄 판결 이후 ‘검찰 기소권 남용’을 탓하고 전문성 없는 식품단속과 수사를 비판하고 ‘잘못된 공권력 행사’의 피해를 무엇으로 보상하느냐고 반문했다.
이 무렵 전 회장은 공직자가 잘못을 스스로 책임질 줄 알아야 하지 않느냐고 항변하며 잠시 손해배상청구 소송까지 생각했지만 마음을 고쳐 포기했다고 밝힌다.
그렇지만 그때 그 사건을 되돌아보면 아직도 풀리지 않는 우지파동의 의혹 여덟 가지를 기록으로 남겨두고 있다.
첫째, 검찰은 투서와 제보로 수사했다는데 과연 비과학적 음해성 투서를 한 사람이 누구이며 그를 처벌했는가.
다시는 우지파동 없어야
둘째, 수사과정에 업계의 주장이나 식품과학자, 대학교수 등 전문가 의견을 묵살한 이유는 무엇인가.
셋째, 우지의 유해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참고인 진출에 비전문가만 증언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넷째, 정제 우지의 성분검사에서 수사관이 샘플수거 규칙을 위반하며 검사한 결과를 일방적으로 발표한 검사의 태도는 무엇인
가.
다섯째, 정제 우지를 사용한 라면회사가 많았는데도 이북출신 기업인과 야당의원이 경영하던 회사만을 수사, 기소한 것은 다른 의도가 없었는가.
여섯째, 업계 관계자를 소환한지 이틀 만에 구속, 송치하고 ‘공업용 우지’라는 말도 안되는 용어로 여론을 조작한 것은 무슨 저의가 있는가.
일곱째, 당시 주무부인 보사부 김종인 장관이 TV에 출연, 우지라면이 무해하다고 공식입장을 발표했는데도 검찰은 계속 유해하다고 강변한 이유는 무엇인가. 여덟째, 국제공인연구소와 삼양이 정밀분석해 우지의 무해를 증명했는데도 검사가 계속 유해라고 주장한 이유는 투서가 과학적분석보다 신빙성이 있다는 논리인가. 삼양은 이 같은 풀리지 않는 의혹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지금은 재기의 갈 길이 바쁘다는 입장이다.
-다음호에 계속<언론인>
배병휴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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