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학렌즈와 함께 침식하는 ‘수도승의 삶’
광학렌즈와 함께 침식하는 ‘수도승의 삶’
  • 언론인 배병휴 
  • 입력 2007-09-28 13:29
  • 승인 2007.09.28 13: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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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휴의 재계 원로 탐험 ⑬
이지웅 서울광학산업 회장

천직을 다 마치고 은퇴한 노인의 삶을 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례다. 올해 여든 다섯의 서울광학산업 이지웅(李志雄) 회장은 벌써 20년째 산사와 같은 숲속의 정밀공장에서 첨단렌즈와 침식을 함께 하고 있다. 이 회장은 맑은 공기와 무아(無我)의 삶 때문인지 이곳 충청도 음성 땅에 살면서 안경의 도수를 점차 낮추고 있다는 근황을 소개한다.


이 회장이 오랜 언론계 생활을 마감하고 음성공장으로 내려와 생소하던 광학산업에 심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엉뚱하게 여겨진다.

이 회장은 6·25전쟁 종군기자로 활약하면서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국가 유공자다. 동양통신 편집국장과 상무이사로 언론계를 떠나기까지 통신기자로서의 명성을 생각하면 노후의 변신이 너무나 획기적이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60대 중반의 노년기의 서울에서 도피하듯 산중으로 내려갔다. 생활근거가 서울에 남아 있지만 이른 새벽부터 늦게까지 시계바늘 움직이듯 공장 내에서 똑같은 일상을 보낸다.

충북 음성군 생극면 병암리 68-1번지, 서울광학산업 찾아가는 길은 마치 절간입구나 다름없다. 안내간판도 없는 꼬불꼬불 비탈길을 오르내리다 울창한 숲속에 나지막한 건물 몇 동을 만나게 된다.

입구에 광학탑이 세워져있고 노태우 대통령이 1988년 10월, 이곳을 방문했었다는 기념돌이 눈에 띈다. 당시 국가원수가 무슨 일로 이곳까지 방문했을까 믿어지지 않는다.

세계 각국으로 첨단 광학용품을 수출하는 유명 광학공장이 예상보다 너무 한적하니 뜻밖이다. 광택이 나는 것도 없고 분주한 것 같지도 않고 고요한 수도원과 같은 느낌이다.


고요한 공장서 첨단 광학용품 수출

주차장에는 자동차가 적지 않게 주차하고 있지만 이동하는 사람이 전혀 없으니 문의할 곳이 없다. 1인이 근무하는 경비실에서 “서울광학이 맞다”고 하기에 겨우 안도했다.

“차라리 공장이기보다 수도원이라야 맞다”고 했더니 경비원이 “그런 소릴 종종 듣는다” 고 동의했다. 이 회장은 에너지 절약을 이유로 형광등도 끈 집무실에서 신문을 읽고 있다. 머리만 깎으면 누가 봐도 수도승의 모습이다.

이 회장은 공장에서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전까지 만근한다. 새벽 5시면 기상해 각국에서 들어온 이메일 체크하고 조간신문 읽고 가벼운 운동한 후 구내식당에서 아침밥 먹고 다시 출근한다.

출근이라야 공장 내 침실에서 집무실로 몇 걸음 이동하면 그만이다. 종업원 기숙사와도 별도로 이 회장의 생활공간은 1인실이다.

퇴근은 오후 8시20분경으로 정해져 있다. 드라마 시청하고 9시뉴스를 보기 위해 퇴근시간이 일정하다. 평생을 언론계에서 생활했기에 신문과 TV뉴스와는 한순간도 떨어질 수 없다. 토요일 오후에는 일주일간 밀린 빨랫감을 싣고 서울 본가로 올라온다. “길이 좋아 1시간 30분이면 올라가니 외진 곳으로 낙향했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고 한다. 또 “적적하게 혼자 생활하는 것이 전혀 외로움 없고 불편한 점도 없다”고 단호하게 부인한다.


일본 귀화 교포의 모국사랑

이 회장은 1922년 5월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중학교를 나온 반골 기질의 우국형 언론인이었다. 서울로 올라와 건국대 법정대 나오고 일본 도쿄대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해 사회부 전문기자로 맹활약했다.

8·15직후 서울중앙통신 기자로부터 출발해 6·25때 전선을 종횡무진 누비고 그 뒤 통양통신에서 편집국장으로 기자의 꽃을 피웠다.

이 회장이 광학산업과 우연한 인연을 맺은 것은 1967년 통양통신 부국장으로 동경대에 유학할 때였다.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귀화한 노리다도시오 사장을 만난 것이 오늘의 서울광학산업의 발상이었다. 노리다 사장은 2차 대전 후 일본인으로 귀화했지만 노리다 광학을 일으켜 모국에 기여하고 싶은 소망을 안고 있다가 유학생 이지웅을 만나 의기투합했던 것이다.

노리다 사장은 군사용 조준경 기술을 지원하고 싶어 했다. 모국에 광학기술을 심어주기 위해 중견 기술자와 가공 기계들을 무상으로 지원했다. 1974년 9월,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서울광학공장이 첫 가동할 수 있었던 것이 노리다 사장의 특별한 지원 때문이었다.

광학렌즈를 가동해 전량을 노리다 광학에 수출하면서 서울광학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으니 우리나라 광학산업사에서 노리다 사장의 모국애를 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서울광학은 노리다 사장의 뜻을 기리고자 광학탑을 세우고 지금도 동상 앞에 꽃바구니가 바쳐져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산업경쟁력

서울광학이 창업 10년을 맞아 충북 음성공장으로 이전한 것은 정밀광학산업의 최적지를 찾아 나선 것이다. 1985년 음성군 생극면 병암리에 2만6000평의 대지를 확보해 1987년 공장을 신축 이전했다.

이곳 음성공장이 우리나라 첨단 광학산업을 선도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산업경쟁력을 뒷받침하고 있다. 서울광학은 종업원 70~80여명, 외형 50억원에 불과한 중소기업이지만 최근에 시장규모가 확대되고 있는 영상기기나 군사용, 의료용, 천체 우주용 핵심기술 부품이 이곳에서 나온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영상기기, 의료장비 등에 필요한 핵심요소

광학제품은 대부분 최종 소비제품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 국민은 광학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쉽지 않다. 그렇지만 세계 최첨단 시장에서 경쟁하는 글로벌 일류기업들은 광학산업의 경쟁력이 글로벌 경쟁력의 원천임을 잘 알고 있다. 이 때문에 보수 논객 출신의 이 회장은 서울광학산업이 국가적, 경제적 역할에 기여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다. 다만 스스로 말하지 않을 뿐이다.

서울광학 내부 공정을 구경하며 친절한 설명을 들어보나 마나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공장시찰의 경험이 적지 않았지만 렌즈가공의 오묘한 공정이나 관련기술은 설명을 들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겨우 띄엄띄엄 놀랄 수 있는 대목들만 기억에 남을 뿐이다.

영상기기용 비구면(非球面) 렌즈 가공술은 세계에 3개국 밖에 없다고 한다. 미국과 일본과 한국뿐이라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있는가.

서울광학은 지난 1990년부터 비구면 렌즈를 각국으로 수출하고 있다는데 아마도 일본 노리다 사장의 음덕이 아닐까 짐작된다.

노광(露光)장비는 요즘 한 장 인기인 PDP, LCD 등에 소요된다고 하니 삼성이나 엘지전자 등으로 공급되고 있을 것이다. 일반인들이 대형화면을 즐기면서 음성공장에서 공급된 화면을 보고 있노라 고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첨단 의료장비에는 특수 렌즈가 필수품이다. 각종 사무용품도 렌즈가 성능을 좌우한다. 천체 망원경이나 우주선에 수많은 렌즈가 소요된다는 것은 어렴풋이 듣고 알고 있을 정도다. 광학산업이 방위산업의 핵심임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서울광학이 삼성과 협력해 야간에도 300m을 투시할 수 있는 야시경을 개발해 동해안에 침투한 북한 잠수정을 타격할 수 있었지만 일반인들은 알지 못했다. 이렇게 광학산업이란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중요한 산업마다 결정적인 경쟁력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 수 있었다.


렌즈 직경 4m시대 선언

서울광학은 ‘렌즈 직경 4m시대’ 개막을 선언했다. 지난 2000년 10월 준공한 대형가공실 앞에 현수막을 내걸고 있지만 보고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깊은 산중 공장에 찾아오는 이가 별로 없으니 서울광학 사람들만의 자축 현수막이나 다름없다.

대형 가공실 내부에는 4m짜리 코팅기가 돌고 있다. 한대 제작하는데 3년가량 소요된다는 고가 장비가 혼자 시름시름 돌고 있다. 무려 4m짜리 렌즈를 어디다 쓸려고 저토록 미련스럽게 가공하고 있을까.

이 회장은 앞으로 한대를 더 추가 설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열심히 설명을 듣고 공정에 관해 안내를 받았지만 속으로는 요령 부득이 아닐까 싶었다. 중소기업이 무슨 용맹으로 대형가공실을 설치해 옥동자 출산을 바라듯 위험을 부담하고 있는지 답답한 소감이었다.


고급 인력난은 중소기업의 팔자

이 회장은 이곳 충북 음성으로 공장을 옮긴 후 전문 인력난 때문에 죽을 맛이라고 호소한다. 또 전량 수입해야 하는 원자재 확보에도 애로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실토한다.

제조공정은 대부분 자동화됐지만 요소마다 인력으로 다듬고 가공해야 하는 것이 광학산업의 특징이다. 고도로 숙련된 가공 기술공이 품질과 성능을 최종적으로 좌우한다.

그래서 기술공 훈련에 막대한 투자를 감행하고 박사학위까지 취득케 뒷받침하지만 대기업이 스카우트해 갈 때는 맥이 풀린다.

박사학위 기술자는 자녀교육 등을 핑계로 세칭 일류기업으로 옮겨가고 싶어 한다.

서울광학이 32년의 오랜 역사를 쌓아 왔지만 쪼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 중소기업들의 일반적인 팔자를 말해준다. 그러나 광학산업을 일으키지 않고는 21세기 첨단산업이 핵심경쟁력을 해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끔찍하게 여겨진다. 은퇴한 언론인 출신이 음성 공장에서 광학산업과 함께 침식하고 있는 사명감을 알고도 남을 지경이다. 모쪼록 고달픈 광학산업을 위한 햇볕정책이 나오기를 기원한다.

언론인 배병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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