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택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의 파란만장 인생역정
이기택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의 파란만장 인생역정
  • 선태규 기자
  • 입력 2008-10-21 09:26
  • 승인 2008.10.21 09:26
  • 호수 756
  • 10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다 7선 정치인생 30년 야당생활로 점철
지난 9월 10일 오후 청와대 녹지원에서 열린 이명박 대통령 주최 미주지역 평통자문위원 초청 간담회에서 이기택(오른쪽에서 두번째) 수석부의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기택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본인 말처럼 30년 정치인생을 야당생활로 채운 사람이다. 그만큼 그 삶은 질곡이 많았다. 최근 MB 정부에 입성했지만,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는 이에 대해 “후회한다”고 밝혔다. 정치인생을 마감한 뒤에야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의장은 대통령)으로 MB정부에 합류한 이 수석부의장의 인생을 들여다봤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9월2일 이기택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이하 민주평통) 신임 수석부의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이 수석부의장이 여권에 합류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 수석부의장은 경북 포항출신으로 이 대통령과 동향이고 고려대 상대 선후배 사이며, 지난해 대선에서 한나라당 중앙선거대책위 상임고문을 맡은 바 있어 보은인사 논란이 일기도 했다.


“노무현 지지 후회”

이에 앞서 그는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하기도 했다.

정치계를 떠나서도 평탄치 않았던 이 수석부의장의 정치인생은 그야말로 ‘우여곡절’과 ‘파란만장’의 수식어로 점철돼 있다. 30년 정치인생에 야당생활만 해왔다는 것이 이를 반증하기도 한다.

이 수석부의장은 경북 포항에서 태어나 부산상고를 거쳐 고려대 상과대학을 졸업했으며, 학창시절과 정치 경력은 대부분 부산에서 쌓았다.

1960년 고려대 학생위원장으로 자유당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도해 4·19 혁명의 도화선을 당겼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67년 청년대표로서 신민당 소속의 전국구로 7대 국회에 입성했다.

그후 부산 동래구로 지역구를 옮겨 8, 9, 10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신군부 집권 이후 정치규제에 묶여 11대 총선에는 출마하지 못했으나 규제가 풀리자 85년 12대 총선에서 부산 해운대에서 출마해 당선됐다. 이 때 규제에 묶였던 양김씨를 대신해 실권이 별로 없던 이민우 신민당 총재 아래에서 부총재를 역임했다.

1987년 신민당이 내세운 직선제와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내각제가 맞서 정국이 파국으로 치닫자 “민주화 조치가 이뤄지면 내각제 개헌도 무방하다”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두고 야당 내 갈등이 커졌다.

이로 인해 양김씨는 탈당해 통일민주당을 창당했으며 이 수석부의장도 계보의원들과 탈당했으나 바로 통일민주당에 합류하지는 않았다.

이 수석부의장은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조치 발표 뒤 15일간 항의단식을 했고, 6월 항쟁이후 여당이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자 비로소 통일민주당에 입당했다. 그는 부총재를 역임하고 13대 총선에서도 당선됐다.

그러나 3당 합당을 거부하면서 변화가 찾아왔다. 3당 합당 거부와 함께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결별한 뒤 노무현, 홍사덕, 이철 의원 등과 함께 민주당(꼬마 민주당)을 창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 수석부의장은 개헌 후 처음 실시된 기초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뒤 신민주연합당과 합당했다. 이어 ‘민주당’을 창당하고 DJ(김대중 전 대통령)와 함께 공동대표가 된 뒤 1992년 14대 총선에서 지역구인 해운대를 떠나 전국구로 당선됐다.

1992년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고 정계를 은퇴하자 이기택 수석부의장은 제1 야당 총수로 부각됐다. 그러나 당내 최대지분인 동교동계와 주도권 다툼을 벌인 끝에 결별하게 됐다. 1995년 지방선거와 관련한 공천 다툼이 계기가 된 것이다.


MB와 동향 고려대 선배

이 수석부의장은 이후 15대 총선에 민주당 소속으로 부산 해운대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1997년 고향 포항의 보궐선거에 출마했으나 역시 떨어졌다.

15대 대선에서는 서울시장이었던 조순을 대통령 후보로 영입했으나 조 후보가 신한국당과 연합해 한나라당과 합당하게 됐다. 그러나 유력했던 이회창 후보가 패배하면서 이 수석부의장은 또 다시 야인의 길을 걷게 됐다.

16대 총선에서는 이회창 총재의 개혁공천에 밀려 당내 중진들이 대거 탈락했는데, 이 때 이 수석부의장은 김윤환, 김광일, 장기표 등과 함께 민국당을 창당해 부산 연제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002년에는 부산상고 후배이자 과거 민주당 동지인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으나 철회했고, 17대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지지한 뒤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 수석부의장은 취임과 관련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이 되는 해에 수석부의장을 맡게 돼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고 밝혔다.

민주평통은 대통령의 통일정책 자문을 담당하는 헌법기관으로 대통령이 당연직 의장을 맡고 있으며, 수석부의장이 상임위원회와 운영위원회를 담당하며 실질적으로 조직을 이끌고 있다.

선태규 기자 august@ilyoseoul.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