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출판인 김상문 회장
영원한 출판인 김상문 회장이 뉴파스칼 세계 대백과사전으로 되살아났다. 동서문화사는 이를 ‘180억원짜리 과외선생’이라고 선전한다. 동아출판사 대명사이던 김상문회장이 어떻게 동서문화사 회장으로 다시 태어났는지 궁금하다. 김 회장은 올해 아흔셋을 넘겼노라고 한다. 언제 적 동아출판사이며 김상문 회장인가를 헤아려보면 까마득하다는 느낌이다. 그런가하면 한때 동아전과, 완전정복 시리즈 등으로 사상 최대 28억 부를 돌파했었다는 타고난 출판인이 아니었느냐고 생각하면 벌써 옛일로 회상될 지경이다. 김 회장에게 출판황제라는 칭호가 따를 만도 했었다. 그러나 동아백과 출판 이후 좌절로 황제는 추락하고 제국은 멸망했다고 기억한다. 그러던 것이 동서문화사가 180억원짜리 과외선생님이라며 세계대백과사전을 내놓으면서 김상문 회장의 위엄은 살아 있노라고 선전하고 있다. 와신상담 15년 만에 ‘파스칼 세계대백과’로 복귀했다고 만방에 고하고 있는 것이다.
정암(靜巖)으로 불리는 김상문 회장은 ‘문장경국지대업(文章經國之大業)’을 신봉하는 선천적 출판인이다. 문장경국대업이라면 좋은 글이 나라경영의 근본이라는 어마어마한 뜻이다.
문장이란 나라를 경영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일뿐더러 결코 썩지 않는 성대한 사업이다. 목숨이란 때가 되면 사라지고 영화도, 즐거움도 일시적이지만 문장이란 목숨이 다할 때가 없는 법이다. 이 때문에 옛부터 글을 짓는 사람들은 문장에 몸을 맡기고 글 속에다 온갖 뜻을 펼쳤다.
옛 사람들은 구슬과 같은 보배는 천하게 여기고 한 치 시간을 중히 여겼다. 시간이 자신을 지나쳐 흘러가 버려도 사람들이 애써 더 힘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두렵다.
목전에 닥친 일만 생각하고 천년을 갈 공훈을 놓치게 된다. 해와 달은 하늘에서 노닐다가 지나가고 인체는 땅에서 만물과 더불어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뜻있는 선비가 가슴 아파하는 일이다.
필생의 출판인생 김상문 회장의 정신세계에 이 같은 문장경국대업론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해방직후 창업한 동아출판사의 운명과 함께 사라질 뻔 한 자신의 운명을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면서 재기하는 집념을 보이게 됐을 것이다.
좋은 문장이 나라경영의 근본인데 출판인으로서 경국대업을 완수하지 못했으니 도저히 죽을 수 없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해 아흔셋의 노구를 이끌고 뉴파스칼 세계대백과사전으로 경국의 대업에 나섰다고 믿어진다.
정암 김상문 회장은 1915년 9월 대구에서 태어났으니 아흔셋을 헤아린다. 정암은 외골 성품에다 조급했던 조부와 유순하고 사교적인 부친아래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는 성당에 다녔지만 부친은 기독교신자였고 안경집을 경영했다.
조부는 겨울에도 새벽에 얼음을 깨어 세수를 하고 손자 김상문을 데리고 성당으로 갔지만 부친은 개화 인텔리로 일찍부터 아들에게 한글과 한문을 가르쳤다. 김상문은 대구 일어학교 제1회 졸업생이다.
가톨릭 계통의 해성보통학교에 다니면서 필생 출판동지인 학원사 창업자인 김익달과 교우했다.
15세 때 대구사범에 응시해 합격, 매월 7원의 학비보조금을 받았다. 1935년 경국 달성군 유가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가 청송군 진보초등으로 전근했다. 일본인 교장과 다퉈 이내 전보 당했기 때문이다.
25세 때 도쿄로 건너가 1년 속성 과정의 흥아 공학원 채광과에 입학했다. 한창 노다지 꿈이 젊은이를 유혹하던 시절이자 일제가 군수물자 증산을 위해 광산업을 장려하던 때였다.
그러다가 본국에서 송금이 끊어지자 프린트사인 금문사가 필경생을 모집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응시해 필경 아르바이트를 했다. 흥아 공학원 졸업 후에
는 규수에 있는 시멘트 회사에 취직했지만 5개월 만에 나왔다. 1941년 9월 귀국해 대구 근교 중석광을 캐는 소림광산에 취직했지만 소장과 다투다가 사표를 내고 물러났다. 꿈이 많은 김상문은 뜻 있는 사업을 하고 싶었다. 보통학교 동기생 김영호의 중매로 만난 아내 박봉향이 사업적 후원자가 돼주었다.
‘철판 수리공’, ‘만년필도 수리함’이라는 그의 첫 사업은 아내의 절대적 후원이 밑천이었다.
1942년 4월 꿈에 그리던 ‘동아 프린트사’를 창립할 때까지 벌어 모은 돈이 3600원에 달했다. 동아프린트는 필체가 뛰어나고 영업에도 억척이던 김상문의 발로 경북 도청의 일감을 독차지 할 수 있었다.
창업 1년 반 만에 대구은행 예금액이 1만2000원에 달했으니 떼돈을 번 셈이다.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 동아는 무려 2만부에 달하는 그림책 주문을 받아 제작했다가 아슬아슬하게 대금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돈으로 종이를 사두었던 것이 나중에 신생 국어독본을 제작할 수 있는 귀중한 원재료가 되었다.
이효상 과장 요청으로 국어독본 제작
8·15 해방 후 김상문은 종이를 확보하고 있는 자산가였다. 어느 날 경북도청 학무과장 이효상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 과장은 맏형의 친구로서 뒷날 국회의장을 지낸 바로 그 분이다. 이 과장은 동아프린트사에 들어오자마자 ‘이제 우리 세상이 되었으니 경북에서 제일 먼저 우리말 국어독본을 만듭시다’라고 제의했다.
4·6배판 80페이지 국어독본 3만부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김상문의 동아프린트가 우리나라 출판계에 큰 획을 긋는 동아출판사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국어독본은 글씨를 김상문이 쓰고 삽화는 부인 박봉향씨가 그렸다. 박 여사는 경북여고와 경성사범을 졸업한 인텔리였다.
뒤이어 동아는 국어자습서, 종합입시 문제집, 한글 맞춤법 해설, 우리국사, 신생 국어독본 등을 출판해 명성을 쌓아 올렸다. 그리고 동아의 명성과 함께 출판무대를 서울로 옮기게 됐다.
1950년 5월 서울 수표동에 60평 한옥을 장만하고 참고서 집필을 준비하다 6·25를 만나 집은 전소하고 9·28 서울 수복 시까지 숨어 지내야만 했다.
서울 수복 후에는 엉뚱하게 빨갱이로 지목돼 홍역을 치루기도 했고 대구로 내려가서는 브로커왕이라는 일시 지탄을 받는 시련을 겪었다.
그러다가 1951년 9월 동아출판사를 다시 등록해 본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이때 제일 처음 손댄 것이 중학입시 예상 문제집으로 없어서 못 팔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어 국내 최초로 교사용 전과지도서를 발간하고 1954년 다시 상격해 동아출판 전성기를 개척할 수 있었다.
사상 최대 베스트셀러 기록
동아는 1955년 10월 서대문 네거리 900평에 3층 건물을 세우고 이듬해에는 주식회사로 개편했다.
신사옥 건축 3년 뒤 동아전과와 동아수련장을 출판했다. 그리고 벤턴자모 2대를 도입, 한글 활자체를 몽땅 개조했다. 동아의 인쇄활자 혁명은 인쇄계의 혁신바람을 불러왔다.
1958년 국어대사전도 획기적이었다. 국내 최초로 월부판매를 시도한 대사전은 무려 20만부가 판매됐다.
1959년 동아출판 사옥이 5층으로 증축될 때 종업원은 600명의 대기업이었다.
이 무렵 새 백과사전을 출판하고 백 만인의 의학, 세계문학전집, 고어사전 등을 내 놓았다.
1978년 동아 새 국어사전 출판에는 숨은 이야기가 있다. 당시 북한에서 발행한 조선말 사전을 참고용으로 구입해 오다가 공항에서 연행되고 말았다.
연구용 자료라고 해도 공안당국에서 용서치 않아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이 힘을 써주어 겨울 풀려 났었다.
이렇게 만든 동아 새 국어사전은 지금껏 300만부가 팔린 사전 출판사상 최대 베스트셀러로 자부하고 있다. 동아는 61년 제1회 한국출판문화상, 63년 제1회 우량출판사, 64년 198종 도서간행 등의 화려한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계속적인 확장투자가 무리를 낳아 회사는 부도나고 김상문 사장은 피신하고 3년간
채권단에 의해 위탁경영을 받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김상문은 물러서지 않고 ‘완전정복’ 시리즈의 대량판매로 사세를 회복하고 1976년부터 다시 시설확장으로 돌아설 수 있었다. 1976년도 인쇄물 수출 1위를 기록하고 78년에는 참고서 시장 점유율 70%를 돌파했다.
참고서 판매 최고기록은 1983년 1학기로서 초중고를 합쳐 4000만부에 달했으며 동아의 매상고도 1000억원에 이르렀다.
동서문화 백과사전에 마지막 투혼
1980년대 동아는 웅지를 펴기 위해 계열사를 설립한 시기였다.
동아인쇄공업과 대아지공을 설립하고 국내에서는 최초로 전산 사식 체계를 도입했다. 또한 LA올림픽 가이드 출판, 판매권을 얻어 미국에 동아서적을 설립했다.
1983년에는 한질에 30권에 달하는 거대한 ‘동아원색 세계대백과사전’을 완간했다. 정부로부터 보관문화 훈장을 받은 것이 이때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김상문의 출판인생에 실패가 다가왔다. 덤핑출판사의 엉터리 신판 학원세계대백과사전이 난장을 쳤기 때문이다. 동아는 빚을 지고 두산 그룹에게 회사를 넘겨야 하는 운명을 맞았다. 1985년 2월 정부의 강압에 의해 동아는 두산으로 넘어가고 김상문은 40년 정든 회사와 이별해야 했다.
그 뒤 상문 출판사를 설립, 제2의 출판인생을 개척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출판을 떠날 생각을 해야만 했다. ‘내가 죽은 뒤 관속에는 동아원색 세계대백과사전과 동아전권을 함께 넣어 달라’고 유언을 남기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후학 고정일의 동서문화사 명예회장으로 노익장을 과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출판황제의 고집스런 외침이 동서문화사의 파스칼 세계대백과사전으로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뜻이다. 실로 김상문 회장은 기억될만한 출판인이자 기록될만한 외길인생이라는 소감이다.
배병휴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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