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근대화 헌신한 개성상인 ‘대부’
조국 근대화 헌신한 개성상인 ‘대부’
  • 언론인 배병휴 
  • 입력 2007-07-02 17:46
  • 승인 2007.07.02 17: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배병휴의 재계 원로 탐험 ④
“세월은 바뀌어도 때론 피가 끓는다오”

이회림 동양제철화학그룹 명예회장
개성 만월동에서 태어난 송암 이회림 동양제철화학그룹 명예회장은 고향을 찾게 됐노라고 반긴다. 개성공단 착공식에 초청을 받아 놨으니 ‘곧 만월동 가게 됐소’라고 천진스럽게 즐거워한다. 출향 반세기만의 귀향이니 얼마나 설레는 심정일까. 1917년 4월생이니 올해 아흔이지만 귀향길만 트이면 단숨에 달려갈 만큼 건강하다. 개성 인삼을 많이 먹고 자란 체질인데다가 실향민 특유의 집념으로 건강을 단련해 아직 병원 신세를 질 필요가 없다. 이 회장은 “고려왕조 500년 도읍지에 관한 이야기라면 다녀와서 보자”면서 “아직 누구에게도 아무소리 하지 않았다”고 일러 준다. 일제의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가슴 두근두근 울렁이는 숱한 고비를 넘겨왔기 때문인지 미리 이야기하는 법이 아니라는 눈치다.


이 회장은 개성시 만월동 288번지 생가를 회상하며 “죄다 버리고 나왔다”고 회고한다. 너무 늦게 찾게 된 고향이니 집이며 골목이며 옛 것이 있을 리 없고 아는 얼굴이 남아 있겠느냐고 한탄한다.

“여기도 다들 가고 없는데 고향에 누가 남아 있을 턱이 있겠느냐”는 탄식이다. 재산이야 생각도 하지 않지만 선산이 어찌 됐을까 궁금하지만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고 맥없이 말한다.

“그 사람들이 남의 조상을 알기나 하겠느냐”는 말이다.

이 회장은 전주 이씨 익현군 17대손 부친과 파평 윤씨 소정공파 34대손 모친 사이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익현군은 세종대왕의 넷째아들로서 지조와 행실이 뚜렷했었다고 자랑한다.


“내고향 만월동에 가게 됐소”

이 회장이 태어난 시기는 제정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나고 국내에서는 일본의 동양척식회사가 농지를 개혁하던 어수선한 때였다. 부친은 개성시 남대문 근처에 사무실을 두고 중국과 백삼교역을 했지만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문을 닫게 됐다. 그 후 부친이 쉰다섯의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열세 살 장손은 겨우 송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해야만 했다.

그 대신 모친의 훈도가 엄격했다. “글공부를 게을리하려면 밥을 굶어라”는 것이 왕손의 피를 소중히 여긴 모성애였다. 이 회장은 “어머니의 가르침이 평생의 훈도가 됐다”고 회고한다.

이 회장이 개성상인으로 자라 훗날 조국 근대화에 헌신한 큰 상인으로 성공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이 회장의 평생사업이 순탄하지 않았지만 유감없이 성공한 뒤에도 실향의 고뇌는 한시도 잊을 수 없었다. 비단 이 회장뿐만 아니라 개성상인 모두가 열심히 노력해 성공할수록 고향을 그리는 향수를 달래지 못해 몸부림 쳤다.

아직 생업에 골몰하던 시절인 1960년 개성시민회를 발족시켜 매년 시민잔치를 벌이고 고향소식을 수소문하기 시작한 것이 개성사람들이었다. 이어 1985년에는 기금을 모아 시민회를 재단법인으로 승격시키고 격월지로 송도지를 발간해 오고 있다. 이 회장은 오랫동안 개성시민 회장을 맡아 송도지 발간에 남다른 애착을 보여 왔다. 지금은 고문으로 한발 물러나 있지만 “통일이 될 때까지 계속 발간할 것”이라는 각오를 밝힌다.

송도지는 그야말로 고향을 잊지 못하는 실향민의 회한기나 마찬가지다. 희미한 흑백사진의 ‘추억의 화보’에서부터 ‘내 고향 개성’, ‘나의 송도시절’, ‘생각나는 개성요리’ 등 온통 가슴 뭉클한 옛 이야기들로 편집돼 있다.

이 회장은 상점 점원으로부터 시작해 무역업과 기간산업으로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이 회장이 걸어온 생애는 개성인삼으로부터 시작된다. 선친이 백삼무역을 했었던 가계의 전통뿐만 아니라 어릴 적부터 인삼재배를 보고 영약처럼 즐겨먹었기 때문이다.


냉온수 탁족법으로 건강 최상

이 회장은 평생 사업상 파트너와 마찬가지이던 술을 얼마 전부터 끊었지만 인삼은 꾸준히 복용한다. 그러나 요즘 시중에 나오는 인삼은 “인삼도 아니다”라며 개성인삼은 절대 인분을 사용하지 않고 선별된 자연퇴비만으로 재배하여 동양의 명약으로 자리매김 해 왔었다.

이 회장은 이를 기호식품처럼 상시 복용하면서 주위사람들에게 권유하기도 했다. 소공동 미조리 일식집에서 가까운 이들과의 약속을 기다리는 시간에 주머니에서 꺼내어 “한번 드실래요”라고 권하는 것이 바로 인삼이었다. 그렇지만 개성인삼은 못되고 이곳에서 나름대로 개성식으로 재배했으니 “좀 나을 것”이라고 자랑하곤 했다.

이 회장 건강이 개성인삼 때문만은 아니고 탁족법도 있다. 과거 선비들이 한 여름을 넘기기 위해 삼복이면 개울을 찾아 탁족 천렵을 연례행사로 가졌지만 이 회장은 연중 집안에서 탁족한다.

마당에 뜨거운 물과 찬물을 담은 세숫대야를 준비해 두고 20여 차례나 냉온수 탁족을 하면 온 전신이 맑고 몸이 가벼워진다고 한다. 겨울에 눈이 쌓이면 맨발로 눈에 담그는 것이 탁족의 최상급이라고 일러준다.

또 하나 과거 송도시절 박연폭포수를 맞으며 샤워하는 광경을 연상해 욕탕에서 냉수 맞기를 즐겨했다. 지금은 대중탕에도 냉수 폭포가 준비돼 있지만 이 회장은 집안에서 줄곧 머리위에 냉수를 맞는 자가 건강비법을 실천해 왔던 것이다.

이 같은 철저한 건강관리 때문인지 이 회장은 “아직 잔병 하나 앓고 있지 않다”고 자신한다. 악수를 할 때 느껴지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각이 여든을 넘는 고령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골프를 즐겨 장춘회와 관우회 모임에 자주 나가는 편이다. 지난 1994년 1월에는 뉴코리아 CC 15번 홀에서 홀인원을 기록한 적이 있었다. 이 회장은 “홀인원이란 공이 굴러 찾아 갔을 것”이라고 겸양하며 “홀인원 치면 돈이 제법 나가는 법”이라 웃겨 준다.


고려자기 본산 안목으로 골동품 심취

고향 갈 꿈에 부푼 이 회장은 소공동 동양화학 빌딩 18층에 있는 명예회장실에 꼬박꼬박 출근한다. 그러나 회사일은 챙길 것도 없고 간섭할 필요도 없다. 그 대신 서예 공부와 골동품을 관리하는 미술관에 자주 들른다. 개성 출신으로 이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 있다.

송도는 고려왕조 500년의 도읍지인데다가 고려자기의 본산이 아닌가. 성장기부터 자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연했다. 8·15후 서울에서 사업을 해 돈을 벌다가 6·25를 만나 많은 타격을 입었지만 자기를 비롯한 골동품을 수집할 기회도 생겼다.

피란 못가 서울에 잔류한 시민들 중에 먹고 살기가 급해 귀중한 소장품을 헐값으로 내다 팔고 있었다. 이때 겨우 1~2할로 처분하는 골동품을 적잖게 구입할 수 있었다. 개성출신 이홍근씨의 감화를 받기도 했다. 동은 이 선생은 무려 수 천 점을 수집했다가 뒤에 국립박물관에 이를 기증해 ‘고 이홍근 선생 진열장’이 마련돼 있다.

이 회장도 골동품을 수집하면 언제인가는 박물관을 건립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송도 보통학교 출신인 국립박물관 미술과장 최순우씨와 자주 만나 대화한 것도 안목을 높여 주었다.

뒤에 동양화학이 인천에 소다회 공장을 세우고 30여 년 간 인천을 터전으로 사업을 번창시키면서 인천을 위해 무엇을 할까 궁리하다 설립한 것이 송암 미술관이다. 지난 1990년 인천시 남구 학일동 동양화학 중앙연구소 옆 대지 1500평에 연건평 760평의 미술관이 1992년 10월 개관됐다.

이 회장은 이미 1987년 종로구 수송동에 송암문화 재단을 설립해 장학사업을 벌이고 골동품을 전시하고 있었지만 서울에는 미술관과 박물관이 많으니 인천으로 옮겨야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서예에 몰두하면서 이 회장은 다시 수송동으로 발길을 돌려 서예공부에 빠져 있다. 어릴 적 한학 공부하며 익혔던 서예는 일정수준 경지에 도달해 있지만 이 회장은 “매일 선생님으로부터 배운다”고 한다.

평소에 즐겨 쓰는 글귀는 ‘정신일도 하사불성’으로 ‘평생 믿고 실천해 온 경구’라고 풀이한다. 혼을 심어 최선을 다하면 못할 일이 무엇이겠느냐는 것이 실향민 이 회장의 행동규범이었다는 뜻이다.

이 회장은 송상 일대기를 더듬어가며 평생 동업이자 후견인 사이였던 이정림씨를 잊지 못한다. 이정림씨와는 끊을 수 없는 평생 인연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 회장이 자수성가한 송상의 표본이던 강형근 상점에 들어간 것이 이정림씨의 권유였다. 당시 천일고무 총판을 맡아 송상의 맥을 잇고 있던 이씨는 폐병을 앓고 있었다. 폐병은 거의 불치병으로 인식되던 시절이라 좋다는 약을 다 써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정림 회장과는 평생 동지

이때 요양을 위해 박연폭포를 찾아나선 이씨를 이회림씨가 안내했다. 송도의 삼절로 꼽히는 박연폭포에는 유람객들이 많아 환자를 받아 주려 하지 않았다.

간신히 끝자락 왜진 곳 방 하나를 얻어 한방에서 침식을 같이하며 극진히 간호해 이정림씨가 건강을 회복했으니 천운이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두 분 사이는 형님, 아우님으로 평생 동지로서 끝까지 사업적 유대를 돈독히 쌓을 수 있었다. 이정림씨는 그 뒤 박연폭포 요양이 효험이 있어 78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이 회장은 개풍재벌 동업자로 문경사람 이동준 회장도 잊을 수 없는 얼굴로 꼽는다. 종로 3가 개풍상사 시절 석회석 광산을 인수키로 계약하고 왔다는 이씨의 솔직한 말에 호감을 느껴 대한양회를 설립하고 문경시멘트를 인수했었다고 회고하며 일찍 떠난 것을 늘 아쉽게 여긴다는 소감을 밝힌다.

또 한사람 동양화학 초창기시절 물자하역을 맡아 준 선광공사의 심명구 회장을 꼽는다.

심 회장은 동양이 자금사정이 악화돼 하역요금이 아무리 밀려도 독촉하는 법이 없고 제때 하역해 줘 “지금은 영 잊을 수가 없다”고 몇 번씩이나 강조한다.

이 회장은 개성상인이 개발한 치부법이 오늘의 복식부기법과 같다고 한다. 이는 사개부기법으로 서양의 복식부기보다 200년이 앞선 것으로 비교된다.

사개는 봉차, 급차, 손실, 이익 등으로 나눈다. 차는 대차관계를 뜻한다. 또 이 장부에서는 개성상인 고유의 금융거래와 이자에 쓰이는 용어가 따로 있었다.

개성의 인삼이 유명해진 것도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고 한다. 벼슬에 나가지 않는 선비들이 생활방편으로 인삼을 재배해 개성인삼이 탄생했다는 말이다.

개성상인은 협동정신이 강하고 신용을 기업윤리로 실천해 왔으며 공동시설로 도가라는 협동체제도 발전시켜 왔다. 이 때문에 일제하 일본 상인들도 개성에는 발을 붙이지 못했었다고 전해 온다.

개성상인이 되자면 상점에 들어가 최소 3년은 월급을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필수 과정이었다.

상점에서 견습점원으로 일하는 모습이 평가되면 주인이 출자해 개업을 시켜주는 것이 관례였다. 이때 주인과는 동업관계이지만 입장과 차인으로 호칭이 바뀌게 된다.


믿음을 파는 송상정신

차인은 지방에서 장사를 해 정초에 결산하면 이익금의 절반을 주인에게 보내주는 관계이다. 그리고 이 같은 관계는 대략 10년간 지속되어 왔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해도 가업을 계승할 아들은 다른 상점에서 수습과정을 거치는 것이 관례였다. 이는 상인들 간에 상부상조하는 정신과 믿음을 쌓기 위한 제도로 보인다.

이 회장이 바로 이 같은 송상의 기본정신을 익혀 사업에 성공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요즘처럼 큰 사업가가 부도덕한 인물로 격하되고 반기업 정서가 확산되고 있을 때 송상의 정신이 아쉽다는 소감이다.

언론인 배병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