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휴의 재계 원로 탐험 <24> 김상훈 전 부산일보 사장

김상훈 전 부산일보 사장은 동해바다 외로운 섬 독도 옆에 자리 잡은 울릉도 바닷가 오두막에서 태어난 섬사람이다. 그러나 본토인 대구에서 성장하고 대구사범을 나온 대구사람으로 대구일보에서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다. 1967년 논설위원으로 시작했으니 처음부터 논객으로 세상에 나왔다. 논객 이전에 시심을 타고난 시인이고 문학가였다. 울릉도 오두막집 태생이 곧 넉넉한 시심을 안겨 주었을 것이 틀림없다. 1973년 부산일보로 자리를 옮길 때도 논설위원이었다. 김 전 사장의 태생적 기본기가 논객이었으니 다른 직책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부산일보에서는 논설주간, 주필, 전무를 거쳐 대표이사 발행인을 거쳤다. 신문을 경영하는 경영인이기보다 필생의 현역 논객인 셈이다.
김상훈 전 부산일보 사장의 재직당시 집무실 권위는 한점 없고 소탈, 텁텁한 만물 창고의 맛이다. 직접 술 냄새가 풍기는 것은 아니지만 주인양반의 맛이 막걸리류라고 짐작된다.
해운대 자택엘 가면 부인의 내조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워 두시간이나 소요되는 시간낭비를 각오해야 한다. 부인마저 바쁜 직업인이다. 대학에 나가고 사회활동과 사회봉사 해야 하는데 시간을 뺏기가 민망하다. 장성한 자녀들은 미국으로 서울로 자기 일을 쫓아갔으니 김 전 사장 부부는 떨어져 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부부가 자기일을 몰두하다보면 자연스레 떨어져 사는 시간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고 일러준다. 김 논객의 시심은 문학계로 전파되었지만 언론계에서는 필명으로 중앙에까지 퍼졌으니 최장수 논객 발행인으로 인식된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시인은 무엇인가 토해내고 우러 낼 것이 있어 시를 쓸 것이다. 생각이 많고 본 것이 많고 느낀 것이 많은 이가 시를 쓸 것이다. 시인이 생각할 때 묵상을 많이 할까, 대화를 많이 할까 궁금하다. 아마도 김 논객은 대화를 많이 하면서 시심을 불태우고 시정을 축적할 것이다.
김 논객이 주종을 가리지 않고 술잔과의 장기전에 강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 언변이 워낙 구수하니 어느 주모인들 밤새워 마신다고 “장사 안 되니 그만 귀가하시라”고 권고할 용기가 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부산일보 재직당시 집무실에서 매일 밤을 새는 동안 회사 경영은 중단이 없고 입주기업들의 불편이나 사소한 사고도 없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시인 논객이 경영하는 부산일보는 24시간 경영이 쉬지 않는 유일한 일간지라는 말이 된다.
내 구름 되거든 자네는…
우리네처럼 시를 읽지 못하는 사람은 시가 어렵다는 점이 불만이다. ‘?? 하려 알아듣지 못할 시’를 쓰느냐고 시인들을 비판한 적이 여러 번이다. 그렇지만 김 논객 시를 읽고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다.
김 시인은 우리네 보통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감동 시를 많이 쓴 것으로 소문이 났다.
내 구름 되거든
자네 바람 되게
그래서
너무 세게나 급하게는 말고
알맞게 날 상천(上天)으로 밀어 올려
천애(天涯)에서 천애로
유유(悠悠)히 떠 놀게나 하게
자네 구름 되거든
나도 바람 될라네
그래서
자네 내게 했듯
나도 자네에게 갚음 함세
구름과 바람
바람과 구름
생각하면
바늘에 실 같은
아자창(亞字窓) 돌저귀 같은
연분(緣分)일세 그려
내 구름 되거든
자네 바람 되게
자네 구름 되거든
난 바람 됨세
김 시인이 섬을 버리고 육지로 상륙해 구름과 바람을 잊을 수 없다는 본색을 드러냈다. 울릉도 섬바람이 오죽했으면 동해의 먹구름에 얼마나 가슴이 쿵쿵거렸을까.
1시집 파종원, 2시집 우륵의 춤 등 다작을 남겼지만 영역시집 ‘대밭바람.솔밭바람’도 김 시인의 피 속에 넘실거리는 바람을 그려냈다.
김 시인에게 각종 문학상이 주어진 것은 예상할 수 있었다. 중견 논객으로 활약하던 1980년대에 수많은 문학상을 받기 시작해 발행인으로 신문을 경영하던 1990년대까지 수상기록은 그치지 않았다.
성파 시조문학상으로부터 노산문학상, 파성문학상, 조연현 문학상, 일백문화대상, 부산시 문화상 등을 수상했고 언론인으로서도 카톨릭 언론대상, 위암 장지연 언론상을 수상했으며 국민훈장 석류장,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했다.
장애인 봉사에도 지극정성
중후한 시인, 논객에게 명예학위가 주렁주렁 달린 것도 이색적이다. 김 논객은 언론인의 바쁜 생활 속에서도 다양하고 폭넓은
활약으로 명예 문학박사, 명예 정치학 박사, 명예 경영학 박사 등 명예의 중량이 매우 무거워진 것이다.
김 논객의 1인 다역은 지역사회에 대한 무한봉사였고 그의 명예는 지역사회에서 주어진 것이다.
논객으로서 김 전 사장은 일찍부터 지역사회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아 천부의 시심을 부산일보사의 봉사 프로그램으로 발전시켜 왔다.
1982년 4월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높이고자 부일여성대학을 개강해 김 전 사장이 첫 강좌를 맡은 후 147기생을 졸업시키기에 이르렀다.
여성대학 강좌에는 김 논객의 폭넓은 섭외력에 의해 전국적 명성을 지닌 유명인사들이 고루 초청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부산일보는 부일 여성노래교실, 시낭송 대회, 어머니 동화구연 대회, 영남여성 백일장 등 여성교양프로그램이 다채롭고 부일 미술대상, 부일 보훈대상, 무궁화 봉사상, 경영자 조찬회 등 공익 프로그램도 적지 않다.
전국의 모든 언론사들이 사회봉사와 공익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여성과 문화부문 프로그램이 가장 많은 것이 부산일보의 특징이며 여기에 김 논객의 취향이 듬뿍 실려 있다는 소감이다.
또 김 논객은 장애자 문제에 일찍부터 깊은 관심을 보여 장애인들의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17개 국회에 비례대표로 원내에 진출한 한나라당 정화원 의원은 “김 사장이 원내로 보내 주셨다”고 밝혔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수석 부회장인 정 의원의 홈페이지에는 김 전 사장의 글이 첫 페이지에 올라 있다.
김 전 사장은 부산맹인복지협회와 부산장애인연합회 후원 회장을 오래도록 맡고 있다. 또 부산장애자고용촉진 위원장, 한국장애인재활협회 고문 등으로 장애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모든 활동에 줄곧 앞장서 왔다. 김 논객이 문인협회나 국제펜클럽 등에 참여해 활동하는 것은 본연의 역할이라고 믿지만 대한택견협회 초대회장을 역임한 것은 뜻밖이다. 지금은 상임고문으로 있지만 김 논객은 글과 사회봉사에 몰두하고 있으면서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택견 때문이라 자랑할 만큼 우리 고유의 체력 수련기인 택견에 심취하고 있다.
남의 탓 그만하고 내 탓이나…
논객 37년, 김 논객은 늙을 생각이 전혀 없다. 혈색이 너무 건강하고 악수할 때 전해오는 체온이 따뜻하다. 건강을 타고 나기도 했지만 몸과 마음이 잠시도 쉬지 않고 활동하는 것이 체력운동에 속한다.
부인의 내조를 받기보다 스스로 챙기고 찾아 먹고 씻고 책 읽고 글 쓰는 생활이니 마음에 병들 시간이 없고 몸이 녹슬 겨를이 없을 것이다.
글쟁이가 글쓰기 싫으면 끝장이고 죽은 목숨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래서 인지 김 논객은 본능적으로 쓰고 싶은 성미다.
부산일보에 연재한 칼럼을 추려 시사 칼럼집 두 권을 발행했다. 제1집 ‘내 탓이고…’에서는 ‘신한국 건설은 새 인간형부터’라고 했다. YS정부의 신한국 건설을 비판할 글임을 알 수 있다. ‘부산 너무 홀대 맙시다’는 칼럼이 눈길을 끈다. 당시 논쟁이 한창이던 삼성상용차의 부산유치가 늘어지자 부산경제의 침체상을 걱정한 칼럼이다.
‘누구나…’에서는 ‘대통령 아무나 하나’, ‘물거품 정당과 철세정치인’. ‘두 김씨에게 바란다’는 제목이 눈길을 끈다. YS와 DJ의 정치 행각이 보여준 추태. 민자당 후보 싸움, 철새 정치인 등을 매섭게 비판한 칼럼임은 물론이다.
김 논객은 칼럼집을 발행하면서 책임주의와 3애정신을 강조했다. 남의 탓 하지 말고, 내집 앞 쓸어달라고 요구하지 말고, ‘우리’를 사랑하고 ‘책임’다하고 ‘의무’ 다하자는 호소이다. 김 논객은 모든 직업인들이 천직관과 소명의식을 가져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자임, 자발, 자력, 자주 등 스스로 참여하고 사랑하고 실천하는 운동을 제창한 것이다. 무사안일, 은둔과 도피, 요행, 적당, 보신, 한탕 등은 다 버리고 믿을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자는 말이다.
김 논객은 정치평론집도 출간하고 학술논문도 많이 썼다. 정치 평론집 ‘고발과 비판’, ‘응시와 도전’이 우리 정치의 현실을 그때그때 냉혹하게 비판한 글집이다. 그리고 학술논문‘냉전시대의 동북아’와 ‘한국과 국제관계’가 격변과 위기 시대를 살아온 문학도와 평론가의 안목이라고 인식된다. 마치 기인처럼 접근했던 김 논객과 두 시간 가량 낮술을 나눈 소감은 무애 양주동 박사와 유사한 대목이 많이 느껴진다. 김 논객은 동국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문인으로 양 박사의 강의를 많이 들었노라고 한다. 그래서 객담 속에 양주동 박사 냄새가 물씬 풍긴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기인이라는 말은 불경스럽고 ‘늙지 않는 부산 논객’으로
불러야 할 것 같다.
언론인 배병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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