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감파행, 계파정치 이제 그만…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의 심사(心思)가 편치 못하다. 지난 13일 동생 근령씨가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4살 연하의 신동욱씨(백석 문화대 겸임교수)와 결혼했다. 이날 박 전 대표는 결혼식에 불참했다. 박 전 대표는 이달 초 자신의 미니 홈피에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자조(自照)의 글을 올린 바 있다. 정치권에선 한동안 쉬쉬했던 ‘친박’ ‘친이’라는 용어 대신 ‘친MB(이명박 대통령)’ ‘친근혜(박근혜)’란 약어가 최근 등장했다. 일부에선 계파정치의 색채가 옅어지는 징조라고 반기고 있지만, 친박과 친이를 아우르며 ‘광폭정치’에 나선 박 전 대표로서는 그리 탐탁하지 않다. 친박계 한 인사는 “앞으로 ‘친희태’ ‘친상득’ ‘친재오’란 말이 나올 수 있는 일 아니냐?”며 볼멘소리를 쏟아냈다.
박 전 대표는 동생 근령씨의 결혼식에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근령씨는 “나부터도 내 동생이 그렇게 결혼한다고 하면 말렸을 것”이라며 이해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지난 2004년 8월 지만씨의 결혼식에 참석해 “돌아가신 부모님이 저 하늘나라에서 더없이 동생의 결혼을 기뻐하실 것”이라며 애틋한 감정을 표현한 것과 대조적이다. 친박계 관계자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근령씨가 결혼을 강행한 데 몹시 화난 것 같다”고 밝혔다.
박근혜·근령 두 자매의 갈등은 지난 90년 육영재단 운영권을 둘러싼 다툼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근령씨는 육영재단 운영과 관련 “언니가 최태민 목사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며 노태우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몇 달 후 박 전 대표는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근령씨에게 물려줬다.
동생 근령씨 결혼 반대 내막
그리고 신동욱 교수는 최근 몇 년간 육영재단 운영에 관여해왔다. 그러자 전 육영재단 대변인 심모씨가 지난해 3월 근령씨와 신 교수의 약혼 사실에 분개, 차량으로 신 교수를 치어 다치게 했다. 이 일로 심씨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박지만씨 측도 지난해 신 교수와 폭행 논란에 휘말렸다. 재단 관계자는 “박 전 대표 3남매의 얽히고설킨 갈등이 신씨로 인해 분출된 면이 있다”고 말했다.
신동욱 교수의 정치적 행보도 박 전 대표를 고민스럽게 하고 있다. 신 교수는 지난 대선 때 한나라당 중앙당 전국위원과 MB 당선인의 정책 특보를 맡았다. 그리고 지난 18대 총선 때 서울 중량을에 한나라당 공천 신청을 했다가 진성호 의원에 밀려 탈락했다.
친박계 관계자는 "신씨의 공천신청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시끄러웠다"며 "행동 하나하나가 박 전 대표에게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동욱 교수는 오히려 자신이 다른 후보보다 비교 우위에 있었는데도, 심씨에 대한 법원 판결이 면접 후에 공개돼 ‘도덕성 점수’에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친박계 한 인사는 “강력한 대권후보인 박 전 대표에겐 가족사가 아킬레스근”이라며 “근령씨의 결혼이 행여 악재가 될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파행과 고성, 상식 이하의 발언 등 거듭되는 국감 추태도 박 전 대표를 우울하게 하고 있다. 박 전 대표 측은 이번 국감을 통해 MB정부의 견제역할을 하려 했지만 극심한 여야대치로 정책 국감이 실종되면서 친박계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특히 국감초기 MB저격수로 나섰던 이정현 의원은 일부 보좌진의 상식이하의 행동으로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다.
여권 관계자는 “국감추태와 쌀 직불금 사태 등 거대 이슈로 인해 국감과 10·29재보선을 통해 MB심판론을 제기하려던 친박계가 타격을 입은 것은 사실”이라고 진단했다.
지난해 경선과정에서 박 전 대표를 비방한 혐의로 구속된 정두언 의원 전 보좌관에 대한 검찰수사가 파행 국감을 타고 속전속결로 끝나는 것도 친박계에겐 불만이다. 친박계가 YS의 차남 김현철씨의 여의도 연구소 부소장 내정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와 함께 지난해 경선 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던 '친이', '친박'이란 용어가 최근 '친MB', '친근혜'라는 말로 점차 바뀌는 추세도 ‘광폭정치’에 나선 박 전 대표에겐 그다지 반갑지 않다. MB는 취임이후 “나의 상대는 외국 국가원수”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강조해왔다. 현 정부의 명칭도 ‘이명박 정부’로 정했다.
MB의 측근의원들도 “이 대통령 당선으로 두분 간 힘겨루기 의미가 짙은 ‘친이’ ‘친박’이란 말은 부적절하다”며 “‘친이’가 ‘친이재오’를 연상시킬 수 있어 대신 ‘친MB’를 선호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일부에서는 이를 계파 갈등이 흐려지는 현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친박계 한 인사는 “당내 계파 갈등이 여전한데도 ‘친근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MB와 대등한 힘겨루기를 하던 박 전 대표를 당내 다른 예비후보군으로 격하시키려는 의도가 있다”고 반박했다. 특히 이 같은 현상은 7·3전당대회 이후 계보를 초월, 다양한 사람들과 스킨십을 강화하고 있는 박 전 대표의 ‘광폭정치’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one of them(그들 중 하나)’격하(?)-광폭정치 걸림돌
친박계의 한 인사는 “과거 YS계, DJ계, JP계 등 이니셜로 자신의 소속을 나타내는 계보정치가 판을 쳤듯이 앞으로 당내에 ‘친희태’ ‘친SD(상득)’ ‘친재오’란 말이 나올 수 있는 일 아니냐?”고 우려했다.
이상득 의원을 매개로 한 이회창 전 총재와 MB의 교감설에도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친박계와 ‘매파’의 회동설 등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고 ‘광폭정치’에 나선 이상 MB와 물밑접촉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지난 2005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을 ‘정도가 아니다’며 거부한 바 있다. 박 전 대표가 중시하는 원칙주의가 타협과 포용을 표방하는 ‘광폭정치’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 박 전 대표는 이달 초 자신의 미니 홈피에 “여러 가지 일들로 하루하루가 힘겨운 요즘,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말이 새삼 가슴에 다가 온다”는 글을 올렸다. 최근 그의 착잡한 심정이 ‘고해’란 단어에 집약된 것 같다.
오경섭 기자 kbswave@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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