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이 장기집권 발판
6·25 전쟁이 장기집권 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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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4-01-15 09:00
  • 승인 2004.01.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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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김일성 권력 장악 비극적 숙명의 서막
5월 10일 총선거는 이승만파인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지주 유산 계급인 ‘한국 민주당’ 등의 우익 세력이 압승하였다.국회는 이승만을 의장으로 선출하고 헌법 제정에 착수하였다. 헌법 초안은 내각 책임제로 되어 있었다. 이를 기초한 법학자들은 일본의 대학에서 교육을 받아 일본식 내각 책임제에 익숙해져 있었다. 원내 다수인 ‘한민당’도 내각 책임제 안을 지지했다. 군정청의 지지 세력이었던 한민당은 초대 대통령으로 확실시된 이승만을 명목만 대통령으로 받들고, 내각을 장악해 실질적인 권력을 잡을 계산이었다.이승만은 ‘한국의 정당 정치가 미숙하다’는 구실로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를 고집했다. 그 결과 헌법 초안은 하룻밤 사이에 바뀌었다. 대통령 중심제지만 국회의 동의를 얻어 국무 총리를 임명한다는 어중간한 절충 안이 채택되었다.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월남파로서 목사 출신인 이윤영을 초대 총리로 지명, 국회에 동의를 구하였다.지지 기반이 취약한 이윤영이라면 자신이 조종하기 쉽겠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한민당은 총리에 당수인 김성수(동아일보 소유주 일가)의 기용을 기대했다. 그것이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옥신각신한 끝에 이승만은 우익인 이범석(민족 청년단 단장)을 총리로 기용하였다. 총리 지명을 계기로 이승만과 한민당의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후 12년간의 정치 싸움이 계속된다.‘대한민국’ 정부는 48년 8월 15일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이 날 동경에서 맥아더 원수가 건너와 독립을 축하했다. 북한도 5월 1일에 헌법을 공포, 8월에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 수상으로 김일성이 취임하고 9월 9일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정부를 수립했다. 분단된 남북에서 두 갈래의 정권이 태어났다. 그 후의 한반도의 운명은 이렇게 결정되었다.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도 급속히 변했다. 중국에서 국민당 정부군은 인민 해방군에 연전연패한 끝에 대만으로 도주했다. 49년 10월 1일, 북경에서 중화 인민 공화국 수립이 선언되었다.

장개석 국민당 정권의 지지를 받던 김구 등 임시 정부계 세력은 점점 위축되었다.냉전의 격화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도 달라졌다. 일본을 완전히 무력화하는 정책 방침도 바뀌었다. 일본을 반공의 병참 기지(후방에 주둔하면서 군수품 등을 보급, 운반하는 기지)로 육성하는 방향으로 180도 전환하게 된 것이다.49년 6월 26일, 우익 진영에 있는 이승만 최대의 정적이자 전임시정부 주석인 김구는 현역 육군 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의해 자택에서 암살 당했다. 향년 73세였다. 이 범행은 정권 가장자리 세력이 교사했다는 의혹을 불러왔지만, 그것을 증명할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다. 명확한 것은 안두희는 처형되지 않고, 6·25 전쟁의 혼란한 틈을 타 석방된 후 사업을 시작해 군수품 납품 업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권력자의 배려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 몰락 후, 안두희는 김구 숭배자에게 제 3폭행을 당하는 등 보복이 끊이지 않았으며 범행 47년 후인 96년, 김구 숭배자를 자칭하는 자에게 암살당했다.김구 암살 사건은 이승만 정권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군부의 정권 찬탈’ 씨앗이 된 6·25의 또다른 그림자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의 공과(공적과 과실)는 ‘반공’ 한마디로 끝난다. 대통령이 된 것도 단호한 반공 자세 덕분이다. 12년간 장기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반공 정권이었기 때문이다. 그 실각도 미국이 반공의 최전선인, 한국의 정치 안정을 위해 이승만을 버렸기 때문이다.한반도에서의 분단 국가 탄생은 냉전의 산물이다. 미국은 반공을 내걸어 친미만 일관했던 이승만을 지지해 군사,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의 지원이 이승만 정권을 떠받쳐 준 기반이다.이승만 정권은 발족 직후부터 잇달아 빨치산의 게릴라 봉기의 토벌에 전력을 기울여, 국군 내부의 좌익 분자 숙청에 도끼를 휘둘렀다. 군정청에 의해 창설된 국방 경비대에 좌익 분자가 다수 입대하였다. 당시, 경찰은 좌익 탄압과 검거의 선두에 서 있었다. 경찰의 체포를 피하기 위해 국방 경비대에 들어가는 자가 적지 않았다. 정부 수립 후, 국방 경비대는 국방군으로 개편, 신생 국군으로서 발족되었다. 그러나 그 내부에는 적색 분자가 다수 침투된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다.

48년 4월, 총선거 반대를 주창하며 봉기했던 제주도 폭동은 그 후 1년 가깝게 이어져 30여만 명의 도민이 연루되고, 6만명의 희생자를 내었다.폭동 진압을 위해 48년 10월 여수, 순천에 주둔 중인 제 14연대에 출동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연대 내부의 좌익 세력은 반란을 일으켜, 관민 다수를 살해하였다. 진압군은 1주일 후 여수, 순천 두 도시를 제압했으나, 반란 병사는 지리산으로 도망쳐 게릴라가 되어 저항하였다. 제주도와 지리산 일대는 ‘낮에는 대한 민국, 밤에는 인민 공화국’이라고 할 정도였다.이 게릴라가 완전히 토벌된 것은 6·25 전쟁 후이다.군 내부에서는 빨갱이 잡기 선풍이 불어, 군 전체의 1할에 해당하는 4,794명이 처형, 징역 또는 파면되었다. 파면된 장교 중에는 후에 대통령이 된 박정희 소령(소좌)도 있었다.49년 6월, 남한에 주둔했던 미군은 군사 고문단 500명을 남기고 철수하였다. 해를 넘긴 50년 1월, 애치슨 국무 장관은 서태평양에서의 미국 방위선은 ‘알류산 열도를 잇는 라인 상에 있다는 것을 공언했다.

이는 장개석 정권이 버티고 있는 대만과 한국은 미국의 방위 라인 밖에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었다.이 결과, 김일성은 ‘남침을 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미국은 장개석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중국을 포기하였다. 마찬가지로 미국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 한반도도 포기할 것이라고 김일성은 착각한 것이다.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군은 38도선을 돌파, 남침을 개시했다. 북한 인민군은 전차를 선두로 내세워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력을 과시하며 단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서울 시민에게 ‘전쟁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간다’는 방송을 내보내 눈과 귀를 속였다. 끝내는 인민군이 서울로 좁혀 오자 시민을 버리고, 정부 요인들만 서울을 빠져 나갔다. 이 때 경고도 하지 않고 서울 중심부에 놓인 한강철교를 폭파, 피난 중인 시민 다수가 익사하는 비참한 사건도 생겼다.국제 연합은 북한을 침략자로 규탄, 국제 연합군 개입을 결의하였다.

미군을 주체로 한 국제 연합군이 참전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군의 작전 지휘권을 내주었다. 미군은 한국군을 지휘할 권한을 장악한 것이다. 이것이 그 후의 한미 관계에 큰 그림자를 드리웠다.인민군은 파죽지세로 진격을 계속해, 2개월 후에는 부산을 불과 50㎞ 앞둔 지점에까지 도달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의 보급선은 다 미치지 못해, 제공권을 잡은 국제 연합군의 폭격으로 보급이 곤란해졌다. 국제 연합군은 9월 15일, 인민군의 배후에 붙어 인천에 상륙, 서울을 탈환하고 10월 3일에는 38도선을 돌파, 북진을 계속했다.그러나 중국 의용군이 돌연 11월에 참전, 부득불 후퇴하게 되고, 51년 6월, 휴전 교섭이 시작되었다.전쟁기간 중에 한국군은 병력 98,000에서 700,000만의 대군으로 성장했다. 군부는 한국에서의 최대 최강의 조직 단체로 성장하였다.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친일파 청 산·토지개혁 실패… 하늘이 이승만을 도운 전쟁, 6·25?
이승만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6·25 전쟁이 어느 의미에서 하늘이 도왔다고 하겠다. 전쟁 덕분에 그는 쇠퇴 상태를 만회, 장기정권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취임 당초부터 잘못된 정치를 거듭, 재선 가망이 거의 없었다.독립하자마자 그가 직면한 정치 문제는 친일파 청산이었다. 여론은 모두 대일 협력 분자 처벌을 요구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자신은 반일로 굳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발이 된 관료 대부분은, 식민지 시대에 총독부에 협력한 경력이 있다.특히 식민지 시대의 경찰은 독립 운동가를 탄압하였다. 총독부 경찰로 근무했던 조선인 경찰관은 해방 후 간부로 기용되어 공산당 단속에 기여하였다.재계 인사도 마찬가지다. 해방 후 재계는 이승만에게 정치 자금을 제공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친일파 숙청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국회는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족 행위자 처벌 특별법’을 제정해 친일파 체포에 착수했다.

그러나 경찰은 반민족 처벌 특별 위원회의 활동을 정면에 맞서 방해하였다. 반민족 특별위는 재계 거물인 백낙승(태창방직 소유주)을 체포하였다. 백낙승은 이승만의 재정 스폰서이다. 경무대(대통령 관저 청와대 전신)의 특별 지시에 따라 백낙승은 반민족 특별위로부터 석방되었다. 게다가 경찰은 실력행사로 반민족 특별위를 해산시켰다. 친일파로 체포된 인사도 재판에서 실형 판결을 받은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것도 재심에서 모두 석방되었다.친일파 숙청은 요란만 떨고 끝났다. 관계, 재계뿐만 아니다. 국군 수뇌부는 거의 전원이 전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다. 그래서야 대일 협력 분자들을 청산하고자 해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토지 개혁도 실패했다. 한반도 총인구의 7할이 농민이었다. 농업은 국내 총생산의 40%를 차지했다.

반면에 경지 면적의 40%가 소작농이었다.북조선 인민 위원회는 46년 3월, 이 소작지를 무상으로 몰수, 소작농에게 무상 분배하였다. 이것이 김일성 정권의 지지 기반이 되었다.그러나 남한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지주 계급은 보수 세력의 대표격이다. 그들은 한민당을 결성하고 군정청과 밀착하였다. 지주들은 기득권을 지키는 데 필사였다. 그러나 농지 개혁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마지못해 억지로 ‘유상 몰수, 유상 분배’의 원칙을 받아들였다.이승만은 농지 개혁을 빠르게 진행해 갔다. 이승만이 토지 개혁으로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지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월남민들은 농지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이승만은 야당인 한민당의 지지 기반을 무너뜨리는 성과까지 올렸다.

50년 3월, 농지 개혁법이 공포되고 몰수와 분배 가격은 연 수확량의 150%로 결정, 지주에게는 지가 증권이 교부되었다. 정부는 이 지가 증권을 통해 토지 자본을 산업 자본으로 전환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법 시행 직후, 6·25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의 화를 피해 떠돌던 지주는 지가 증권을 그냥 주다시피 하여 처분하였다. 전쟁으로 농지는 황폐화되었다. 그래서 미국의 농산물 원조가 물밀듯 밀려들어 왔다.결국 농지 개혁은, 자작농을 창설해 농촌 경제를 바로잡을 목적도 달성하지 못했고, 토지 자본의 산업 자본화에도 실패하고 말았다.보수 세력의 기둥이었던 지주 계급은 하루 아침에 몰락하였다. 그들은 혹독한 정권 비판 세력으로 변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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