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3월에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었다. 여당의 정·부통령 후보는 이번에도 이승만, 이기붕이다. 야당 민주당의 정·부통령 후보는 조병옥, 장면으로 결정되었다. 정부 여당은 이번이야말로 모든 난관을 물리치고 여당 후보를 당선시키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유권자는 여당에 정나미가 떨어져 있었다. 미국도 이승만 대통령의 통치 능력을 가망 없이 보았다.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은 지병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출국했으나, 투표일을 1개월 남긴 2월 15일에 사망하였다. 3월 15일, 예정대로 선거가 실시됐다. 투표율은 97%였다. 3월 15일 선거에서 대통령 이승만은 12년간 지속된 장기 집권 체제를 연장하고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하여 대규모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그 결과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이 95~99%에 이르렀으나 하향조정하여 이승만 936만 표(85%), 이기붕 833만표(73%)로 발표하였다. 여당이 총동원한 부정 선거 수법은 경악스러웠다.전국적으로 유령 유권자 조작, 4할 사전 투표, 입후보 등록의 폭력적 방해, 관권 총동원에 의한 유권자 협박, 야당 인사의 살상, 투표권 강탈, 3~5인조 공개 투표, 야당 참관인 축출, 부정개표 등이 자행되었다.본인이 아닌 제3자에 의한 유령투표, 군대 내의 공개 투표, 투표 용지 바꿔치기, 야당 후보 득표의 무효화, 집계 과정을 속이는 등 모든 부정 수법이 난무하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여당 후보의 날조 득표가 유권자를 넘어, 황급히 축소 수정하는 코미디까지 있었다.야당은 선거 무효를 선언했다. 신문도 일제히 부정 선거를 비난했다.
마산, 부산 등 야당이 강한 지방 도시에서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시작되었다. 4월 18일, 서울에서 대학생이 부정선거 규탄을 호소하며 시위 행진을 하였다. 그들을 정부 고용의 폭력단이 습격, 학생 다수가 부상을 당했다.이것을 계기로 4월 19일 서울에서 학생과 시민이 합류한 시위가 일어났고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시위 군중은 경찰과 충돌했다. 시민과 학생 186명이 사망, 6,200명을 넘는 엄청난 부상자가 나왔다. 흥분한 시위대는 정부 계열로 분류된 서울 신문사와 반공회관을 불태웠다.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 시위를 진압하려 했다.그러나 미국은 이승만을 돌아보지 않았다. 맥코너기 주한 미국 대사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민중이 정당한 불만에 대응해야 한다. 임시 방편은 없다’는 최후 통첩을 내밀었다.
군부는 엄중한 중립을 표명했다.이승만 대통령은 4월 24일,자유당 총재를 사임했다. 이기붕 부통령도 당선 사퇴를 표명하였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발표했다. 이튿날 국회에 사표를 제출했고 허정 외무 장관이 대통령 권한 대행에 취임, 과도 내각을 조직하였다.28일, 이기붕과 부인 박마리아 여사, 이승만의 양자가 된 장남 강석, 차남 등 일가 4인 전원은 권총으로 자살했다.하야 후 이승만이 옮겨 간 사저 이화장 앞에는 오랜 독재 정치를 규탄하는 시위가 연일 끊이지 않았다.
‘건국의 아버지’에서 ‘망명 독재자’로 조국 땅 다시 못 밟고 외로이 운명
5월 29일 이른 아침, 전날부터 극비리에 김포공항에서 대기하고 있던 노스웨스트 항공 전세기 편에 이승만 부부 두 사람만이 탔다. 하와이 망명길에 오른 것이다. 배웅한 이는 단 한 사람, 허정 대통령 권한 대행이었다. 15년 전에 열렬한 환영 속에서 귀국한 노 혁명가는 이제는 국민의 증오와 원망의 대상이 되어, 사람의 눈을 피하여 한밤중에 도망하는 것과 다름없이 몰래 고국을 빠져 나갔다.항공기에 탑승하는 이승만의 특종 사진을 보도한 것은 <경향신문>이었다. 이승만 정권에 의해 1959년 4월 폐간되었다가 하야 후인 1960년 4월 27일 복간한 언론이 <경향신문>이고 보면 이 또한 아이러니이다.이승만이 출국한 후 보복과 징벌 선풍이 휘몰아쳤다. 부정 축재한 실업가에 대한 추궁이 시작되고, 부정 선거에 관련한 각료 9명, 자유당 간부 13명이 체포되었다.
시위 군중에게 발포를 명령한 최인규 내무 장관, 곽영주 대통령 경호 실장과 폭력단 간부 들은 사형에 처해졌다.허정 대통령 권한 대행이 이끄는 과도 정부는 정권 이양을 재빨리 진행했다 6월에 헌법을 개정, 내각 책임제와 국회 양원제를 채택하고 부통령직 폐지를 골자로 하는 개정안을 채택하였다.제 2공화국의 발족이다.7월에 참·민의원 선거가 실시되고, 8월 12일 국회는 제2공화국 대통령에 윤보선을 선출했다.하와이로 망명한 이승만은 그 후, 마우나랄리 양로원에서 만년을 보냈다.양로원의 창가로 망연하게 바다를 응시하며 여생을 보낸 노 혁명가의가슴속을 지나간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는 없다.조국 독립을 위해 생애를 바치고 한때는 국부로 숭상되었지만, 최후엔 시민과 학생들에게 쫓겨간 이국 땅에서 고독을 씹는 나날이었다. 하와이 망명 5년 후인 65년 7월 19일, 이승만은 다시 고향 땅을 밟아 보지 못한 채 향년 90세로 눈을 감았다.
천리를 달리던 호랑이도 죽을 때는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한다.이승만은 죽은 뒤에나마 고국에 묻히길 열망했다. 정부 내에서는 이승만의 장례 의전을 둘러싸고 이견도 있었으나 건국 공적을 인정하여, 국립묘지에 매장하기로 결정하였다.이승만의 관은 미공군기로 운반되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군악대는 ‘고향의 봄’을 연주하며 유해를 맞이했다. 연도에선 많은 구경꾼들이 영구차가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에게는 애도하는 마음도 중오의 기색도 없이 호기심뿐이었다.혁명가 이승만은 사생활에도 운이 없었다. 동갑인 첫 번째 아내 박씨는 장남 봉수(요절)를 낳았으나, 이승만의 해외 망명으로 생이별을 했었다.
이승만은 34년, 제네바에서 만난 오스트리아 출신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재혼하였다. 박씨는 독수공방했지만 해방 후 귀국한 이승만은 프란체스카가 어려워 전처를 떳떳하게 대면하지 못했다. 박씨는 50년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와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제사를 끊어선 안 되는 유교 관습을 중시하여, 같은 가계인 이기붕의 장남 강석을 양자로 들였다. 그러나 하야 후, 이기붕 일가가 자살하는 참극을 목격하였다.그 후, 같은 가계인 이인수가 양자가 되어 서울에 살고 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 사망 후 서울로 돌아와 양자에게 의지하여 92년까지 살았다.
‘외교는 천재, 내정은 둔재’
그러나 미·일 모두 이승만과 반목한국인 사이에서는 이승만을 ‘외교는 천재, 내정은 둔재’라고 한다. 외교의 천재라 불린 것은 친미 반공 노선으로 미국으로부터 거액의 경제 원조를 끌어내, 공산주의자의 침략을 막았기 때문이다.그러나, 이승만의 외교에 대해서도 혹독한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승만은 국제 연합 외교에서 단독 총선거 결의를 통과시켜 정권의 정통성을 국제적으로 승인 받았다. 그 후에도 매년 국제 연합에 한국에 관한 결의안을 상정시키는 전략을 고집했다. 그러나 이 방식이 고정화되어 독자적인 노선을 내보이지 못한 것이다.이승만 정권은 6·25 전쟁의 휴전 협정에 조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의 휴전 협정 당사자에게 제외 당하는 사태를 초래했다. 무엇보다도 한일 관계에 상처를 깊게 남겼다. 오랫동안 해외에서 반일 독립 운동을 계속해 온 이승만의 반일 강경 노선은 양국의 국교 단절을 오래 끌게 하였다.
50년, 맥아더 원수의 초청으로 방일한 이승만은 요시다 시게루 수상과 회담하였다. 그 때 요시다 수상이 신변잡기 얘기에 이어 “호랑이가 아직도 있습니까?”하고 물었는데 “임진왜란 때 카토우 키요마사가 모두 죽여 버려 없습니다”고 대답, 분위기가 썰렁해졌다.두 사람 모두 기가 세고 자손심이 강한 정치가다. 서로 반발했다. 이후 이승만 정권 기간에 4회나 개최된 한일 회담은 의견 대립으로 결렬, 양국 관계는 계속 냉담하였다.6·25 전쟁 때, 일본의 경찰 예비대를 활용하는 안이 나왔을 때 이승만은 “만일 일본병이 한국에 온다면, 나는 공산군에 대고 있던 총부리를 일본병에게 대겠다”고 할 정도였다. 이승만은 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한국이 전승국의 일원으로 참가할 것을 미국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이 제2차 대전 중 일본과 정식으로 대전 상태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요청을 거부했다.전후 동경의 GHQ(general headquarters)는 일본 열도 주변에 선을 그어 일본 어선의 조업을 제한했다. 이 선은 맥아더 라인이라 불렸다.
이승만은 대일 강화 조약 후, 맥아더 라인 철폐를 대비하여 어업 자원 보호를 위한 ‘평화선’을 선언했다. 이른바 ‘이(李) 라인’이 그것이다. 평화선의 한국측에 독도가 위치해 있었다. 일본은 ‘이(李) 라인’을 불법이라고 항의, 고기잡이를 계속했다. 이승만이 불법 어로를 하는 어선을 붙잡아 억류한 어민의 수는 922명에 달했다. 일본에서는 반한 감정이 끓어올랐다.59년 12월 10일부터, 재일 한국인의 북한 귀한이 시작, 67년까지 8만8,611명이 북으로 향했다. 한국 정부는 이를 저지하려고 기를 썼지만 실패하였다. 재일 한국인의 북한 귀한은 제2차 대전 후, 자유 세계에서 공산권으로 자발적으로 집단 이동한 유일한 케이스다.일본 정부는 귀찮은 재일 한국·조선인을 쫓아 버리려 했다. 전쟁으로 황폐한 한국 정부는 국내의 일로 힘겨웠다. 일본 정부의 일에까지 손쓸 여력이 없었다.기민 정책(버림받은 국민에 대한 정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반해, 북한은 6·25 전쟁으로 인적 자원이 고갈되어 있었다. 송환자가 반입할 재산을 노려, 오히려 인질로 받아들인다는 약은 목적이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재일 조선인 집단 북송은 이승만 정권의 외교에서 최대의 과실이었다
미국서 돌아온 자, 박사 아닌 놈 없고 중국서 돌아온 자, 장군 아닌 놈 없다
해외 생활이 40년인 이승만은 국내 정세에 어두웠다. 영자 신문밖에 읽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래서 들어오는 정보가 한정되어 있었다.내정의 실수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인사의 실패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돌아온 인사들과 북의 박해를 피해 38도선을 넘어온 월남파를 관직에 기용하였다. 대통령 자신이 미국에서 돌아온 인사이다. 장관과 대사 등 요직에 해외파를 발탁, 기용하였다.행방 후, 한국에서 경력 사칭이 유행하였다.‘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자들 중에 박사 아닌 놈 없고, 중국에서 돌아온 자들 중에 장군 아닌 놈 없다’고 할 정도였다. 조선 총독부에서 근무했던 관료들도 대부분 다시 임용되었다. 훈련된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가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들 테크노크라트는 ‘친일 경력’이라는 부담이 있었다. 특히 군부와 경찰이 그러했다. 그것을 누를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의 반일 독립의 카리스마적 권위다.
한국군은 전시 중 70만 대군으로 불어났다. 군은 가장 훈련된 근대적 조직이고, 당시 한국에서 최대 최강의 집단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군 수뇌 역시 일본군 근무라는 친일의 약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상황에서 감히 이승만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었으나 다른 한 쪽에서는 곪고 있었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반일로 일관한 아마추어 정치가 그룹과 테크노크라트와의 사이에 충돌이 시작, 금이 가고 있었다.이승만 정권의 부정과 부패에 실망한 테크노크라트는 야당 지지 성향으로 흘렀다. 야당 내에서도 명문 출신 아마추어 정계 활동가 그룹의 구파에 대해 신파 그룹이 형성됐다.이승만은 반일 노선으로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을 자극하여 내정의 실패를 감추고 국민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려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일 노선은, 격화하는 동아시아의 냉전에 대처하기 위해 일본을 축으로 하는 북동아시아 안보 체제를 구축하려는 미국의 전략과 어긋났다.미국은 냉전의 최전선에 있는 한국의 정국 불안정은 동아시아의 안전 보장 체제를 뒤 흔들지도 모른다고 판단하였다.
미국은 완고한 노 대통령을 주체하지 못해, 그 이상 지지하지 않을 것을 결정했다. 이것이 이승만 몰락의 진정한 이유다. 미국은 같은 이유에서 63년 11월, 베트남 고 딘 디엠 정권의 붕괴와 군사 정권의 출현을 후원하였다.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로서 평화적 정권 교체라는 전통을 남기지 못했다.미국의 국부로 존경받는 워싱턴 대통령은 2대까지 재임하고 은퇴, 미국 대통령제에서 ‘삼선 불가’라는 불문율을 만들었다.그에 반해 이승만은 3선 당선을 위해 ‘관권의 선거 개입’이라는 나쁜 전례를 만들었다.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않고, 후임자에게 업보의 유산을 남겼다.그에게 국토 분단 고정화의 책임을 씌우는 것은 가혹하다. 그러나 독재에 의한 장기 정권으로 민주 정치의 톱니바퀴를 역전시킨 일부분의 책임은 있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으로서 그의 공과는 독립의 공적과 독재의 과실로 공과 죄가 반반이라 하겠다. 이는 이승만 혼자만의 책임은 아니다. 한국인 전체의 책임이기도 하다.저널리스트로서 정계에 입문한 이승만이지만 90년의 생애를 뒤돌아본 회고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 대신 남긴 것은 한국에서의 친미와 반일, 반공의 전통이고, 대통령 전제와 장기 정권이라는 ‘어깨가 무거운 유산’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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