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윤보선-장면의 정계입문/장면 부통령
2장 윤보선-장면의 정계입문/장면 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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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4-02-19 09:00
  • 승인 2004.02.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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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기용, 조병옥 견제·가톨릭 인맥 활용 ‘일거양득’56년 장면 부통령 당선 … 당적 달라 이승만 정권서 무시 당해

이승만, 세계 가톨릭 인맥 활용코자 장면을 기용
장면의 수석 임명은 이례적인 발탁이었다. 이 때, 대표단에는 조병옥도 대통령 특사로 합류하였다. 조병옥은 독립운동 경력도 있는데다, 한마당 창립 때부터 당의 중대 업무를 맡았다. 군정청기간 동안은 경찰 총수로 좌익과 싸운 치안 책임자다. 조병옥에 비해 장면의 정치적 경험은 훨씬 적다. 교육가 경험밖에 없다.그러나 이승만은 장면을 기용하여 조병옥을 견제하는 한편, 전세계의 가톨릭 파워를 활용할 것을 계산하였다. 바티칸 교황청 주한 사절 패트릭 밴 신부는 장면이 미국 유학 중 잠깐 있던 메리놀 신학교 은사로서 그 후, 평양 교구장이 되었고, 장면은 그 밑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밴 신부는가톨릭 여러 나라의 국제 연합 대표로 장면을 추천하는 소개장을 썼다.

38년 12월, 국제 연합 총회는 한국 승인 결의안을 찬성 48, 반대 6, 기권 1의 다수로 가결했다. 장면은 귀국 길에 로마 교황청을 방문, 다시 뉴욕에 들러, 모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49년 1월 1일, 미국은 한국을 승인한다고 발표했다. 그 직후에 장면은 본국 정부로부터 초대 주미 대사로 임명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승만이 장면을 주미 대사로 임명한 이유도 역시, 미국 가톨릭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서다.장면이 주미 한국 대사관을 개설하고 3개월도 안 된 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났다.장면 대사는 국제 연합 안보 이사회에서 북한의 불법 침략을 호소, 안보 이사회는 9대 0으로 북한을 침략자로 규탄하였다. 이것이 국제 연합군 참전의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소련은 대만이 안보 이사회에 상임 이사국으로 출석하는데 반대, 이사회를 거부했었다. 소련의 거부권 발동이 없었기 때문에 결의안은 통과됐다.

장면의 정치가로서의 공적은 국제 연합의 한국 승인 결의를 실현시키고, 6·25 전쟁 때 미국과 국제 연합의 군사적 지원을 즉시 실행시킨 일이다. 전쟁이 한창 치열한 9월에 장면은 국무총리로 기용되고, 11월 23일 국회의 승인을 받았다. 다음해 51년 1월 말 귀국하여 총리로 취임했다.이승만이 장면을 총리로 기용한 것은 국회의 심각한 대립 때문이다. 50년 5월, 제2대 총선거에서 야당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초대 총리 이범석이 50년 4월에 사임한 후 이승만은 이윤영, 신성모 등을 잇달아 총리로 지명했지만, 야당이 다수인 국회는 승인을 거부했었다. 이승만은 해외에 있던 장면을 총리로 지명하고 결국 국회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러나 장면 총리 재임 중, 이승만과 국회와의 알력은 점점 깊어 갔다.

부산 정치 파동 후 체포 피해 도피 3년만에 복귀
1952년 7월에 대통령 임기가 만료되는 이승만의 재선은 절망적이었다. 이승만은 재선을 위해 여당 자유당의 결성과 대통령 직접 선거를 내용으로 하는 개헌 공작을 진행했다. 여당 결성 공작은 무소속 의원을 끌어들여 원내 자유당을 만들고 그에 덧붙여 대통령 직접 선거에 대비해 사회단체를 중심으로 한 자유당을 창설할 작업을 병행해 추진하였다.그러나 결과는 틀어졌다. 원내 자유당은 이승만 의향과는 반대로 야당과 내통하여 내각 책임제로의 개헌을 꾀하였다. 이들은 미국이 인정하는 장면을 내각 책임제에서의 대통령으로 추천할 계획이었다. 미국도 이승만의 독재에 애를 먹었기 때문에 온화한 장면을 지지했다.52년 1월, 국회는 이승만 정권이 제출한 대통령 직접 선거제 개헌안을 찬성 19표, 반대 143표의 압도적 다수로 부결했다. 야당은 4월 17일, 개헌안 채택에 필요한 의원수 123명이 서명한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했다.

이를 받아들여 장면 총리는 4월 19일에 사임하였다. 야당은 6월 2일, 국회에서 장면을 대통령으로 선출, 즉각 내각 책임제 개헌을 단행할 준비를 했다.그러나 이승만은 그 자리에서 반격하였다. 7월 4일 경찰이 국회를 포위한 가운데, 대통령 직접 선거를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이 채택되었다. 8월 5일,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함태영이 선출되었다. 이것이 소위 ‘부산 정변(부산 정치 파동)’이다.이 때 장면은 미군 병원으로 도피하여 헌병대의 체포를 면했다. 이후 장면은 <경향신문>고문으로 정치권을 떠난 상태에서 때를 기다렸다.55년, 이승만의 독재에 대항하여 합동 야당 민주당이 발족되었다. 장면은 여기서 최고 위원 5명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대표 최고 위원은 신익희(구파)로, 구파 3명, 신파 2명의 비율이다. 민주당은 발족 당초부터 한민당을 루트로 하는 구파와 그에 속하지 않는 신흥 세력인 신파가 뒤섞여 있었다.민주당 결당으로 장면은 3년 만에 정계에 복귀했다. 게다가 국제 연합 대표 단장, 초대 주미 대사, 국무총리 등 화려한 경력을 지닌 장면은 신파의 리더로 추대되었다.

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신익희, 부통령 후보로 장면이 지명되었다. 그러나 선거 운동 중에 신익희 후보가 급사, 장면은 여당 자유당 후보 이기붕을 20만 표의 근소한 차이로 물리치고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여기서 정·부 대통령의 당적이 다른 뒤틀린 현상이 생겨났다. 더구나 대통령은 81세의 고령이다. 대통령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부통령이 계승해야 한다. 이승만 정권은 위기감을 느꼈다.장면이 부통령으로 지낸 4년간은 창살 없는 감옥생활이었다. 정·부대통령 취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내외 귀빈에게 정부 각료를 소개하면서 부통령을 무시하고 제외시켰다. 국회 의사당 기공식에서는 부통령의 좌석을 만들지 않아, 장면 부통령은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56년 9월, 민주당 전당대회장에서 장면이 폭한에게 저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가벼운 부상으로 끝났으나, 이 암살 미수 사건은 경찰이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장면 부통령은 이승만 정권이 붕괴할 때까지 완전히 무시당하는 존재였다. 이승만 정권은 가톨릭계인 <경향신문>의 칼럼을 트집 잡아, 59년 4월에 폐간 처분하였다. 이것도 장면에 대한 간접적 압력이다.60년 3월,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정·부통령 후보는 조병옥과 장면으로 결정됐다. 그러나 조병옥 후보는 지병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사망하고 말았다. 여당인 자유당은 재차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이번에야말로 이기붕을 당선 시키려고 모든 부정 선거 수법을 다 행사하였다. 개표 결과는 이기붕 633만 표, 장면 후보 184만 표였다. 여당인 자유당까지 이는 지나치다고 할 정도였다. 부정 투표에 대한 항의 시위를 계기로 이승만 정권은 붕괴되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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