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김일성, 한국 현대사의‘쌍벽’ 등극
박정희-김일성, 한국 현대사의‘쌍벽’ 등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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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4-03-11 09:00
  • 승인 2004.03.1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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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평가 부동의 1위, 눈부신 빛만큼이나 암흑도
박정희 대통령만큼 평가가 극단적으로 양분된 대통령은 없다. 그것은 한국의 어제와 오늘, 내일에의 가치관을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역대 대통령 중, 누구를 가장 평가하느냐는 한국의 여론 조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항상 톱의 자리를 차지한다.그러나 그를 독재자, 한국 경제를 일그러지게 한 장본인으로 혹평하는 경향도 많다.한국인 중에는, 박 대통령을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한글을 창제한 조선 왕조 세종대왕(즉위 1419~1450),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격퇴한 이순신 장군(1545~1598)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인이라고 존경하는 사람이 많다.그 한편에서는 배신과 탄압을 일삼아 한국의 민주주의를 죽이고, 최후엔 자신도 심복에게 암살당한 폭군으로 지탄받는 경향도 적지 않다.하지만 무엇보다, ‘박정희가 북의 김일성과 나란히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쌍벽’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대통령으로서의 그의 업적은 ‘빛’과 ‘어둠’이 뒤얽혀 있다.‘빛’이란 개방 독재를 강행, 최빈국이었던 한국 경제를 고도 성장시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는 기반을 만든 것을 말한다. 이에 따라 남북 체제의 경쟁에서 북에 뒤처져 있던 한국이 북을 압도하여 우위에 서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 때까지 싸움에 져 뒷걸음질치던 개와 같은 근성에 물들어 있던 한국인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이것이 박정희 대통령이 남긴 최대의 공헌이다.그러나 빛이 눈부시면, 그 그림자 또한 어둡다.그의 친일 경력, 배신과 방향 전환, 인권 유린과 억압, 게다가 비명의 최후에 얽힌 처참한 기억은 애쓴 공적을 지우고 있다.그의 일생을 기록한 어느 전기의 제목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이다.그 타이틀처럼 아직도 그를 존경하는 사람과, 침을 뱉는 자가 확실히 나뉘어져 있다.더구나 최근 한국에서는 박정희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었다.거기에도 세대 차가 있다.

젊은 세대에게는 독재 정권 시대의 암울한 기억이 없다.박정희는 청렴 결백하고 강력한 지도자로서 이상화되고 있다. 연령이 지긋한 세대에서는 열심히 일한 자신들의 젊은 시절 추억과 오버랩되어, 고도성장의 선두에 선 리더로 미화되고 있다.국내뿐 아니다. 미일 양국에서도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 미국에서는 박정희를 자국 내에서 인권 유린을 반복, 미국 정계까지 매수하려고 하여 코리아 게이트 등의 스캔들을 일으킨 호전적 독재자라는 이미지가 강하다.그러나 일본에서는 박정희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다수이다. 박 정권 시절, 20년만에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어, 양국 경제는 나날이 발전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 등 복잡한 일이 있었는데도 기본적으로 한일 관계는 양호하였다.

특히 일본의 보수 세력은 친일적 인사가 박 정권에 다수 포진되어 있는데에 친근감을 가져왔다.박 정권 말기, 일본 매스컴은 그 독재를 혹독히 비판했다. 그러나 박정희 사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본에서 박정희를 재평가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것은 박정희 안에 나타나고 있는 전전의 일본적인 것에 대한 공감과 재평가다.박정희 대통령은 전임인 이승만, 윤보선 두 대통령이 친미파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반미, 친일적이었다. 그가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고 비참한 최후를 마칠 때까지의 18년간, 끊임없이 미국과의 마찰이 거듭되었다.박정희가 비참한 최후를 마친 그 뒤에는 미국의 그림자가 숨어 있다.

네 번이나 바꿔 입어야 했던 군복, 다카기 마사오와 오카모토 미노루
박정희는 1917년 9월 30일, 경상북도의 한 시골 마을인 선산군 구미에서 빈농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은 가난했지만 구미 보통 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고 1932년에 수업료 면제인 대구 사범 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당시는 조혼이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사범 학교 4학년 때 부모의 권유로 결혼을 했다.1936년 2월 26일, 동경에서는 쇼우와유신을 외치며 궐기한 청년 장교 궐기 사건이 일어났다. 그 2·26사건 주모자의 한 사람인 이소베 아사히토 대위는 대구에 주둔하는 제 80연대에서 근무했던 적이 있었다. 그만큼 이 사건은 박정희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37년 3월 졸업생 70명 중 69번째의 석차로 졸업하고 벽촌인 문경 보통학교에 부임하였다.

그 해, 중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조선에서 육군 특별 지원병 제도가 시행되고, 조선인도 군에 동원되게 되었다. 박정희는 출세도 할 수 없는 시골 교사로 일생을 마칠 생각이 없었다. 아내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박정희의 시선이 만주로 갔다.‘썰매 소리조차 쓸쓸하게 울려 퍼지는 눈의 광야여 마을의 등불이여 산 하나 넘으면 타국의 별이 꽁꽁 얼어붙은 국경…’가요 곡 ‘국경의 마을’로 불려진 만주는 일본과 한국에서 성공할 수 없는 청년들에게는 신천지였다. 일본은 여기에 만주국을 만들어 ‘오족협화, 왕도낙토(5대가 화합하고, 덕이 있는 나라)’를 세운다고 선언하였다.일본의 꼭두각시였던 이 만주국은 새 나라 세우기의 열기로 꽉차 있었다. 큰 꿈과 권력에의 욕구가 뒤얽혀 판치는 도가니였다. 김일성과 유소기의 항일 빨치산 활동도 여기서 펼쳐졌다. 일본의 우익도 좌익 퇴물도 기존의 가치 질서에서 비롯되는 얽매임이 없는 만주에 뉴프론티어(신개척자)로서 들어왔다.만주에 가면 자신들의 나라보다 자유로웠다.

만주에서 조선인은 일본인에 버금가는 지위를 차지하고 거들먹거릴 수 있었다.박정희는 40년 4월 만주 군관 학교에 입학하였다. 수험 연령은 19세까지였다. 22세인 박정희는 연령 제한에 걸렸지만 특례로 수험이 인정되었다. 합격생 240명 중 15번째의 성적을 냈다.박정희는 창씨 개명 정책에 따라 다카기 마사오로 개명했는데, 나중에 오카모토 미노루로 다시 바꾸었다.42년, 박정희는 만주 군관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일본 육군 사관 학교(57기에 해당)로 편입하여 44년에 졸업했다. 그 후 열하성에 주둔하는 만주군 보병 제8사단에 배치되어 복무하다가 만주군 중위로 해방을 맞이했다.박정희는 북경 임시정부계 광복군 제2지대(본대에서 떨어져 나와 별도로 행동하는 부대)로 편입되었는데, 미군정청은 임시 정부를 인정하지 않아 광복군은 이도 저도 아닌 상태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옛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자는 본시부터 광복군에 소속돼 독립 운동을 해 온 병사들로부터 심한 학대를 받았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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