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대 대통령 전두환 장군은 영남 군벌의 제2세대다.박정희 대통령 암살 후, 갑작스런 권력의 진공 상태가 발생하였다. 박 정권을 비판해 온 세력도 정권을 담당할 만한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혼란 속에서 영남 군벌의 젊은 대표로서, 한국 최대 최강의 조직인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이 권력을 계승하였다. 그것은 타성으로 움직이는 역사의 필연적인 결과였다.‘전두환은 역사의 톱니바퀴를 거꾸로 돌려놓았다’고도 평가한다. 그러나 톱니바퀴를 역회전시켰다는 것은 아니다. 회전의 타성을 막지 않았을 뿐이다. 전두환은 박정희 장군을 정점으로 하는 영남 군벌 중 제2세대의 선두 주자였다.그는 박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체포, 처형하였다. 그 실적을 배경으로 일약 영남 군벌의 대표로 뻗어 올랐다.대조적으로 박 대통령의 후계자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김종필 공화당 총재는 군부의 지원을 얻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충청도 출신이라는 그의 지역적 약점도 작용하였다. 혼란 속에서 김종필은 용의주도하게 움직일 수 없었다.
화려한 경력, 노숙한 경륜, 군선배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의 쿠데타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한국 군벌의 역사는 해방 후의 국군 창설로 거슬러 올라간다.한국에 주둔한 미군은 1945년 12월, 군사 영어 학교(밀리터리 랭귀지 스쿨)을 개교했다. 영어를 잘하는 장교 양성에 착수한 것이다. 군사 영어 학교의 5개월 코스 졸업생들은 46년 1월에 창설된 국방 경비대 간부로 등용되었다. 이들 간부 중 군사 영어 학교 출신 장교는 110명이었다. 일본 육사 출신은 112명, 학병(학도출진조)72명, 육군 특별 지원병 6명, 만주군 188명, 중국군 2명이었다.군사 영어 학교 출신 110명 중 대장 8명, 중장 20명 등 장군으로 승진한 사람이 68명이다. 또 군의 최고 자리인 참모 총장에도 13명이나 임명되었다.군사 영어 학교 폐지 후, 국방경비사관학교가 창설되었다. 1기부터 6기까지 1,600명을 단기 훈련하였다.박정희는 경비사관학교 2기다.48년 정부 수립 직후, 경비 사관학교 7기부터 육군사관 학교로 개칭되었다. 6·25 전쟁 발발 당시 10기생까지 교육하였다.48년 12월에 입학한 8기생이 김종필 등으로서 박정희 장군 쿠데타의 주역이 된 인물들이다.육사는 전쟁으로 휴교된 후, 51년 12월에 정규 4년제 과정의 육사로 다시 문을 열었다.이 때 전두환, 노태우 등 11기생이 입학하였다.
정규 4년제의 11기생은 자신들을 ‘사실상의 육사 1기생’ 이라 여겼다. 한국군의 엘리트임을 자부하는 등 자긍심 또한 대단했다.초기의 한국군 수뇌부는 일본 육사 졸업생을 주체로 학병 출신과 지원병 출신 등 일본군계, 만주 군관학교 출신, 거기에 광복군(돌립군), 중국군 출신 등의 파벌이 대립되어 있었다.1933년부터 45년까지 일본 육사를 졸업한 한국인은 70여 명이 있다. 이들 중 태평양 전쟁에서 살아남은 장교들은 초대 육군 참모 총장 채병덕 소장을 중심으로 한국군의 주류를 형성하였다.정일권 대장은 만주계의 리더다. 박정희는 일본 육사에 재학하여, 만주군계와 일본군계의 쌍방에 걸쳐 있는데, 만주군계로 보여진다.이승만은 군부를 경계했다. 일본군 출신과 만주, 중국군, 광복군 출신을 경쟁시켰다. 만주군맥에는 만주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북한’ 출신자가 많았다. 이 대통령은 특히 북한 출신자를 편애했다. 군 고급 간부에 채병덕, 정일권, 백선엽, 장도영 장군 등을 거듭 기용하였다. 역대 육군 참모총장 자리는 78년까지 일본 군·만주군 출신자가 독점하였다.
박정희의 마키아벨리즘
영남 출신의 박정희 장군이 정권을 잡자 영남 군벌이 대두하였다.그러나 영남 군벌 내에서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다. 중앙정보부장인 김종필은 박 대통령의 조카사위지만 충청도 출신이다. 영남군벌에서는 아웃사이더이다. 이것이 그가 후계자가 될 수 없었던 큰 원인 중 하나이다.영남 군벌에서 초기에 각광을 받은 것은 수도권 경비 사령관 윤필용 소장이다. 윤 소장은 육사 8기생으로 박정희 사단장 밑에서 대대장, 군수 참모 등을 역임했다. 박 장군은 전임할 때마다 윤필용을 데리고 갈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쿠데타 후 최고 회의 의장 비서실장 대리, 방첩부대장, 베트남 파견 맹호 사단장을 역임했고 70년에 수도 경비 사령관으로 등용되어, 출세 가도를 치달았다. 선배 장군도 윤 소장의 기분을 살필 정도였다.윤 장군의 위세가 높아짐에 따라 질시도 심해졌다. 박 대통령도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와 김재규 보안사령관도 윤 장군의 대두를 좋아할 리 없었다.대통령 자신이, 측근을 경쟁시켜 ‘분할해 통치한다’ 는 마키아벨리즘을 신봉하였다.
72년 여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평양에 들어가 김일성 수석과 남북 대화 재개의 계기를 만들어 인기가 절정에 올랐다. 대통령은 이후락의 인기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은 은밀히 종신 정권을 기도하고 있었다. 윤필용은 대통령의 이러한 의향도 모르고, 3선 후 퇴임을 전제로 ‘정권 이양 후의 후견인’ 역할을 대통령에게 진언하여 격노를 샀다. 그 무렵, 이후락과 윤필용이 매우 친밀하다는 소문이 대통령의 귀에 들어갔다.의심을 하기 시작한 대통령은 강창성 보안사령관에게 지시, 윤필용과 그 측근을 전원 체포해 군법 회의에 넘겼다. 윤 장군은 부정 부패 혐의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권력을 잃었다. 윤필용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이후락은 만회를 꾀했다. 그 방책으로 다음 해인 73년 8월 동경에서 김대중을 납치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대통령은 이후락에게도 김대중 납치 사건의 책임을 물어 해임하였다.74년 8월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암살되었다. 경호 책임을 물어 박종규 경호실장도 사임했다. 이렇게 해서 박 정권 초기의 영남 군벌의 주역이었던 인맥은 교체되었다.대신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이 무대 전면에 등장하였다. 차지철, 김재규 두 사람의 삐걱거림이 대통령 암살을 불렀다. 영남 군벌 내의 항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젊은 그룹의 리더로 전두환이 두각을 나타냈다.
하나회 결성과 독주
전두환은 1931년, 경상남도 합천에서 빈농의 5남으로 태어났다. 8세 때 양친을 따라 만주로 갔으나 1년도 채 안 되어 귀국해 대구에 정착했다. 집이 가난하여, 대구 공업 고교에 다닐때는 신문 배달 등의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었다. 학업 성적은 보통이었지만, 스포츠가 특기로 축구에 열중했다. 동료 사이에서도 강한 친화력을 발휘해 카리스마적인 기질의 한 단면을 보였다.육사 졸업 석차 역시 중간 정도였지만 교우의 폭을 넓히는 데는 수석이었다.6·25 전쟁 중인 51년 12월, 전두환은 육사에 제 11기생으로 입학했다. 전쟁으로 휴교하던 육군 사관 학교는 이 해 재개되어, 비로소 정규 4년 과정으로 학생을 입학시켰다. 11기생 중에는 노태우, 정호영, 김복동 등, 후에 영남 군벌의 주류를 형성하는 얼굴들이 있다. 입학식은 이승만 대통령, 리치웨이 국제 연합군 사령관이 출석하여 성대히 거행되었다. 육사 11기생은 당초부터 한국군의 엘리트로서 촉망받았다.
빈곤한 가정에서 자라, 이렇다 할 사회적 배경이 없는 전두환으로서는 육사 입학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군의 엘리트 코스호에 승선한 것이다.55년 임관 후, 전두환 대위는 공수 부대(낙하산 부대)의 창설 멤버로 선발되었다. 60년 미국 포트베닝의 특수 교육 기관에서 레인저 트레이닝 코스(특수 훈련)의 낙하산 강하 훈련을 받고 귀국, 공정단 창설에 관계하였다. 이 때 함께 훈련을 받은 사람이 차지철 대위다. 61년, 박정희 장군이 쿠데타를 결행했을 때, 전두환 대위는 서울 대학교 문리과 대학 ROTC 교관이었다. 그는 재빨리 쿠데타에 동조했다. 육사 교장의 반대를 무릅쓰고, 후배인 육사 생도들에게 쿠데타 지지 행진을 촉구했다. 서울 시청 앞에서의 육사 생도에 의한 군사 혁명 지지 행진은 큰 선전 효과가 있었다.이 공적을 인정받아, 전두환 대위는 최고의회 회장 비서관으로 발탁된다. 이후 중앙정보부 인사 과장, 수도경비사령부 대대장, 육군 참모 총장 부관으로 순조롭게 출세 가도를 달렸다. 그는 육사 11기 동기생 회장 뿐 아니라, 11기 이후 졸업생 동창회(북극성회)에서도 회장으로 선출되는 등 인맥을 넓혔다.
진급면에서도 동기생의 선두를 끊고 대령으로 승진하여, 젊은 장교의 리더로 부상하였다. 70년, 베트남 파견 백마 사단 제29연대장으로서 실전을 겪고 귀국한다. 그는 명실공히 정예 장교로서 그 유명한 제1공수 특전 단장에 보임하며 73년 준장으로 승진하고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를 역임, 77년 소장으로 승진한 뒤 제1사단장을 거쳐 79년 3월, 보안사령관으로 부임하는 등 순풍에 돛을 달고 뻗어 나갔다.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의 묵인 아래, 육사 졸업생 중 주로 영남 출신의 우수한 장교를 모아 사조직 하나회도 결성하였다. 이는 박 정권의 군부 내의 경호 그룹이다. 박 대통령은 하나회를 묵인했을 뿐 아니라 전원에게 군검과 휘호 등을 하사하며 격려했다.윤필용과 박종규 등 영남 군벌의 실력자도 젊은 장교들의 리더 전두환에게 거액의 활동 자금을 건넸다. 전두환은 그것을 시원스럽게 전원에게 뿌렸다.
이 하나회 멤버는 서로 통하며 수도경비사령부, 보안사령부, 특전사령부, 대통령 경호실, 서부 전선의 각 사단 등 요직을 자기들끼리 옮겨 다녔다. 전두환의 장인 이규동 소장도 만주 귀국자로서 육사 장교를 거쳤다. 이 처가 세력의 힘도 작용하였다.73년 윤필용 사건으로 윤 장군과 가까웠던 하나회 회원은 퇴역처분되었다. 이 사건으로 전두환의 지위는 높아졌다. 하나회 내에서 경합하던 동기생 손영길 대령도 사건에 연루되어 물러났다. 손영길은 박 대통령이 사단장일 때부터 부관을 역임, 대통령의 신뢰가 투터웠다. 그러나 윤필용 사건으로 레이스에서 탈락하고 말았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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