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 쿠데타 교훈 “역사는 반복한다”
신군부 쿠데타 교훈 “역사는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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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4-05-25 09:00
  • 승인 2004.05.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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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은 비극, 다음은 희극으로...
전두환은 준장 때,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과 여단장을 5년간 맡아 특전 사령부 인맥을 구축하였다. 하극상의 쿠데타에서 전두환측에 선 노태우, 정호영과 군 간부들은 모두 특전사령부 공수 특전단 출신이다.6·25 전쟁 때 미군은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장악했다. 박정권은 대통령 경호 등을 이유로 일부 병력의 지휘권 반환을 요구해 일부나마 지휘권을 돌려받았다. 박 대통령은 미군의 간섭없이 독자로 지휘할 수 있는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특전단으로 개편했다. 쿠데타 방지 역할은 자동으로 이루어졌다. 공수특전단은 여러 가지 동기로, 전략 부대의 성격을 지닌 최정예 부대다.미국은 특전단의 강화 확대에 대해 그 폭주를 염려하고 난색을 지었을 정도이다.공수특전단은 유사시를 대비해 서울 교외로 배치되었다. 12·12사태(순국 쿠데타) 때, 이 특전단은 보안사령부에 가담하여 국방부와 수도경비사령부 제압의 선봉에 나섰다.79년 박 대통령 암살 사건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행동은 과감하고 기민했다.

암살범인 김재규 부장을 재빨리 체포했는가 하면 암살 음모의 소굴로 여겨진 중앙정보부를 단숨에 제압하고 접수했다.계엄 사령부 합동 수사 본부장이 되어 모든 정보와 수사 활동을 총괄하였다. 12월 12일에는 삼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관인 계엄 사령관 겸 육군 참모 총장을 느닷없이 체포, 최규하 대통령에게 사후 결재를 강요하며 군부를 장악하였다.12·12 사태 후, 신군부 세력이 단행한 군 인사는 하나회의 막강함을 보여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1기생 노태우 소장을 수도경비사령관, 정호영 소장을 특전사령관으로 배치해 군 수뇌부는 하나회로 뭉쳐진 것과 다름없었다.최 대통령은 유명무실한 로봇으로 전락하였다. 전두환 장군은 보안사령부 스태프에게 ‘박정희 장군의 군사 혁명 선례를 상세히 연구하도록’ 명령하였다. 정권 장악의 사례 연구인 것이다.

그 후, 신군부가 취한 행동은 박정희의 61년 혁명 시나리오를 그대로 그린 것이다.‘역사는 반복한다. 처음은 비극으로, 다음은 희극으로…’.12·12 사태 이후, 그는 9개월 동안 여한 없이 중장, 대장으로 2계급 승진하였다. 5월 17일, 학생 시위 운동을 구실로 비상 계엄령을 확대했다. 이에 저항하는 광주 시민의 민주화 결의를 피로 진압하였다. 그 후, 진압 부대 출동을 둘러싸고 한국 내에서 미국을 비난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미군은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쥐고 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억압한 신군부의 행동을 미국이 용인했다는 비판이다. 이것이 한미 마찰의 큰 원인이 되었다.광주 사태 후의 살기 등등했던 분위기 속에서, 삼권 모두를 장악하고 행사하는 국가 보위 비상 대책위원회(전두환 상임위원장)가 발족되었다.

김대중 살려 주면 당신을...."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이하 국보위)는 재야의 리더 김대중을 체포하는 한편, 김종필, 이후락 등을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단정, 그 재산을 몰수하였다. 숙청 선풍은 정계뿐만 아니라 관계, 학계까지 몰아쳤다. 국보위는 공무원, 교원, 국영 기업 간부 대부분을 부정 부패와 반체제 등의 이유로 추방하였다.신군부에게 정당과 매스컴 통제는 지상명령이다. 정치 풍토 쇄신 특별 조치법을 제정, 정치가 567명의 정치 활동을 금지하였다. 언론 기관도 80년 말까지 지방 신문을 한 도에 1개지로 통합, 신문 64가지 중 44종이 폐간되었다.신문사 소유의 라디오, TV방송도 강제 몰수해 공영화 하였다.TV는 국영 KBS, 공영 MBC등 3사로 정리되었다. 국영 방송광고 공사를 신설하고 TV광고를 독점시켰다.

이렇게 해서 TV는 완전히 어용 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정기 간행물 172종도 폐간 처분되었다.언론 기본법을 제정해 모든 매스컴도 통제했다. 매스컴 관계자 600여 명도 반체제 활동 혐의로 추방하였다.노조 활동과 학생 운동도 탄압했다. 사회악을 없앤다는 명목하에 6만 명을 영장 없이 체포 구속했다. 그 중 3만 7천 명을 ‘삼청교육대’ 로 끌고 가, ‘교정한다(바로 잡는다)’는 명목으로 강제 노동을 강요하였다.입시 전쟁의 폐해를 없앤다고 하여 과외 수업을 금지하였다.신군부는 사회 전반에 걸쳐 정화 방침으로 강권을 발동하였다.유명무실한 최 대통령은 8월 16일에 사임했다. 이와 때를 같이해 전두환 대장은 퇴역, 통일 주체 국민회의는 그를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최 대통령이 사임한지 불과 11일 만이었다.전두환 대통령은 9월 1일 정식 취임식을 갖고 9월 29일 헌법개정안을 공고했다. 개헌안은 임기 7년 단임제로 대통령 중심제이다. 대통령은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되는 간접 선거 방식을 존속시켰다.

이 개헌안은 국민 투표에 붙여져 90%의 찬성을 얻어 공포되었다. 신헌법에 기초해 81년 2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제5공화국이 성립된 것이다.미국무성은 80년 8월 16일, ‘한국 지도자 선택과 채택되는 헌법의 내용은 한국인이 해결해야 할 과제’ 라고 하며 전두환 정권을 인정하였다.전두환의 정권 장악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애매했다. 카터 정권은 박정희 독재 정권과는 불화였다. 79년 말 박 대통령 암살사건 직후, 이란의 미국 대사관 점령 사건, 소련군의 아프가니탄 침공 등 국제 정세는 격동하고 있었다.신군부는 ‘광주 민주화 궐기 진압은 미국의 승인과 지원 아래서 실시했다’ 고 넌지시 정보를 흘렸다. 미국이 숙군 쿠데타와 광주 궐기를 무력 진압한 전두환 정권을 지지했다는 정보는 한국인 사이에 반미 감정과 원한을 남겼다.그러나 당시 카터정권은 이란에서의 미국 대사관원 인질 구출작전에 실패, 궁지에 몰려있어 한국 정세에 개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81년 레이건 대통령 취임 직후 전두환 대통령은 어느 국가 원수보다 제일 먼저 미국을 방문했다. 미국이 한국에 대해 ‘김대중을 구명하면 전두환을 초청한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 대통령의 방미는 12년 만이었다. 한미 정상 회담 후 양국은 ‘주한 미군의 계속 주둔과 한국군의 현대화 계획 지원’을 공동 발표하였다. 레이건은 주한 미군을 4만3천 명까지 증강했다.이는 72년 이후 최대 규모의 병력이다. 공표되지는 않았지만 미국은 F-16전투기의 16대 매각에도 합의했다.‘매’ 스타일(발톱을 감춘다)인 레이건과 전두환 두 사람은 말을 쥐고 있었다. 냉전 말기 미·소 양국은 군비 경쟁이 한창이었다. 미국은 반공 최전선인 한국의 불안정을 원하지 않았다. 신군부 정권은 박 정권 시대에 뒤틀린 대미 관계 정상화에 성공하였다.군법 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무기 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이던 김대중은 82년 12월,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면서 ‘정치 활동 금지’를 조건으로 미국으로 출국하였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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