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의 전은 돈 전(錢)자?
전두환의 전은 돈 전(錢)자?
  •  
  • 입력 2004-06-23 09:00
  • 승인 2004.06.23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은 돈 전(錢)자?
노태우의 눈부신 진출은 전두환과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두 사람은 늘 함께 지내는 사이의 절친한 동기생이지만 대개는 전두환이 지도적 역할을 했다. 노태우는 지지하고 따르는 역할이었다. 군에서의 보직과 보임도 그 같은 형상이었다.끝내는 대통령 자리도 물려주고 물려받는 사이로까지 전개된다. 그 뒤에는 반목과 질시 속에 비극의 길로 치닫지만….한국인은 노태우와 전두환을 이렇게 비교한다.‘전두환은 백이냐 흑이냐로 상황 판단하는 단순한 남자이다. 그의 지도력의 비밀은 단호한 자기 주장에 있다. 노태우는 주위와 상황을 보고 움직이는 남자이다. 그 성공 비결은 빠른 계산과 깊은 주의력이다.’외국인들의 평가도 마찬가지이다.‘전두환은 결단력이 좋고, 강력하고 야심이 있다. 노태우는 화해적이고 유연성이 좋아, 공연히 야심을 내보이는 타입이 아니었다’ 고 던 오버드퍼는 <두개의 코리아>에서 묘사하고 있다.육사 동기 사이에서도 두 사람에 대해서 이런 농담이 있었다.

‘전두환도 노태우도 선배 장군을 열심히 찾아다닌다. 그런데, 전두환은 선배에게서 돈을 얻어온다. 노태우는 아부하고 온다.’ 노태우는 겉보기에는 온화한 타입이나, 외유내강형이다. 소프트 터치지만 본심은 강하다. 그래서 ‘위선’이라거나 ‘더블 플레이어’라는 비판을 받는다.전두환은 후계자 선택으로 고민했다. 정권 내에서는 온건파와 강경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노태우는 강경한 전두환과 달리 온건파로 여겨지지만, 전두환의 뜻을 거스르는 언동을 일체 삼갔다.전두환은 결국 최대의 발언권을 지닌 TK의 인맥이 후원한 노태우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택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그 결정을 후회하게 된다. 그는 후에, ‘동기생을 후계자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한탄을 하였다. 그러나 이는 권력을 사물화하려고 한 데 대한 인과 응보이다.87년 6월 7일, 노태우가 여당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직후 대통령 직접 선거를 요구하는 대대적인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노태우는 6월 29일, 대통령 직접 선거를 받아들이는 ‘민주화 선언’ 을 발표했다. 더구나 민주화 선언은 전두환 대통령의 반대를 무릅쓰고 노태우의 고뇌에 찬 결단이라고 내외로 홍보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전두환을 악역으로 내세우고 노태우를 영웅으로 떠받들어 스포트라이트를 대주는 과감한 계획에 의한 진행이었다. 그렇듯 이 도박은 밖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내부적으로는 신중하고 세심한 검토 끝에 양자가 합의한 것이다.그 많은 민주화 선언 목표 중에 진짜 핵심 목표는 김대중의 사면·복권에 있다.‘김대중은 복귀하면, 반드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야당 후보는 단일화 되지 못한다. 야당 지지표는 분산한다. 여당 후보가 반드시 이긴다’고 본 것이다.도박은 적중했고, 몇 년 후 5공 비리 청산 정국에 즈음하여 민주화 선언의 내막에 대해 전두환측은 ‘민주화 선언의 시나리오는 전부 전두환의 작품이며, 노태우는 처음에 대통령 직접 선거에 반대하였다. 망설이는 노태우를 설득하여 선거에 이기기 위해, 일부러 전두환이 악역이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5공청산 청문회가 열리는 국면에서 내막을 폭로하는 등 ‘이제 와서 아무리 분해한들’ 소용없었다.

‘나를 밟고 넘어가라’ 전두환…
DJ, YS가 ‘노 대통령’ 만들었다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민주화 선언에 이어, 여야당은 헌법 개정에 착수하였다. 정부 수립 이후 9회째인 이 개헌은 ‘대통령 직접 선거제, 단임제의 대통령 임기 5년, 대통령의 국회 해산권, 국가 비상 사태 선포권 폐지, 언론 집회의 자유를 헌법으로 명문화, 국회의 행정부에 대한 국정 감사를 부활, 91년에 지방 의회를 구성해 30년만의 지방 자치제 부활’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개헌안은 10월 27일 국민 투표로 확정, 29일에 공표되었다.이 헌법에 따라 제 6공화국 시대가 열리게 된다.6·29 선언에 의해 유발된 민주화의 움직임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로 확산되었다. 무엇보다 노동 쟁의가 격화되었다. 강권 통치 아래서 억눌렸던 노동 운동이 봇물 터지듯 분출했다. 쟁의 내용도 보다 과격화되었다.

임금은 연간 평균 17%나 매년 연속해 인상되었다. 이것이 한국의 수출 경쟁력을 저하시켜 무역 적자를 확대시켰다. 그러나 시민의 구매력은 증가해 소비 경기를 올려 놓았다. 이 현상들도 여당 입장에서는 순풍이었다.<한겨레 신문> 등의 반체제 색이 강한 신문도 나왔다. 대기업 신문사는 역대 정치권과 서로 돕는 관계를 여전히 지속했다. 즉 정권은 신문을 통제했지만, 신문도 독점의 달콤함을 만끽했다.TV는 공영으로 완전히 정부의 조종 아래 있었다. 매스컴은 자신의 득실에 따라 대통령 선거를 보도했다. 이는 여당 밀어 주기 보도가 된다더구나 민주화의 도를 넘는 자유는 사회의 혼란과 불안정을 가속화 시켰다. 시민은 급격한 변화보다 점진적 변화와 안정을 바란다. 이것이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 후보의 득표로 연결된다.87년 12월 16일에 16년 만에 국민이 직접 뽑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여당의 예상대로 야당 후보는 세 사람이 입후보했다. 그들은 서로를 깎아내렸다.노태우 후보는 828만 표(37%)를 득표했다. 김영삼의 633만 표(28%), 김대중의 611만 표(27%), 김종필의 182만 표(8%)를 누르고, 당선이 결정되었다.만일 김영삼, 김대중이 후보 단일화를 단행했다면 야당 후보가 당선했을 것이다.하긴 야당 후보가 단일화 된다해도, 호남(김대중)과 비호남(김영삼)세력은 융화되지 않아, 표가 분산되어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대통령 선거의 동향은 막대한 선거 자금이 뿌려진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노태우 후보에게 선거 자금 1,970억 원(약 2억4,500만 달러)을 건넸다. 그 밖에도 여당 후보는 재계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조달받았다.노태우는 선거 운동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거리를 두고 차별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자신을 ‘보통 사람’이라 강조하여 군인 색을 감추려고 노력하였다. 전두환은 불쾌하지만 묵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다음호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