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 후 두 사람의 관계는 역전되었다.종래의, 유유낙낙한 전두환을 추종했던 노태우는 변모하여 독자 행동을 취했다. 국민에 의한 선거로 뽑힌 자신은, ‘추종 세력을 모아 당선 위주로 짜여진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 선거로 뽑힌 대통령’과는 다르다는 자신감이다.우선 전두환이 법정 의장을 맡았던 원로급 국정 자문 회의를 여론을 동원해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전임자의 참견을 제거하려는 것이다.총선을 앞두고 전임자가 내정한 여당의 ‘공인’ 후보를 제거하고 바꿔치기 했다. 선거법도 개정해 종래의 중선거구(정원 2인)를 소선거구로 바꿨다. 이는 공천에서 탈락시킨 여당 후보가 무소속으로 입후보해 당선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심혈을 기울여 제도까지 바꿨으나 88년 4월 총선거에서 여당은 참패했다.정원 299명 중 여당인 민정당은 125명으로, 과반수 150명에 훨씬 못 미쳤다.
야당인 평민당(총재 김대중)은 70명, 민주당(총재 김영삼)은 59명, 공화당(총재 김종필)은 35명, 그 밖에 10명이다.한국에서는 대통령의 강대한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야당 의원을 다수 당선시키는 균형 감각이 있다. 그 균형 감각이 작용하였다. 그렇더라도 야당이 여당을 앞선 경우는 자유당 붕괴 때 말고는 단 한번도 없었다. 그 뿐만 이 아니다. 참패를 부른 원인은 애써 뜯어고친 소선거구에 있다. 여당 소수 국회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정국 주도권을 뻬앗겼다.국회는 광주 유혈 사건의 책임과 제5공화국의 부정 비리를 추궁하였다. 노태우 정권은 광주 사태에 대해서는 ‘광주 시민과 학생에 의한 민주화 운동’이라고 평가하며 공식 사죄를 하였다. 5공 비리에 대해서는 5공 비리 특별 수사부가 전두환 대통령 친족과 재벌 소유주 등 478명을 체포, 29명을 자택 기소하는 등 사법처리를 하였다.
그 과정에서 전두환은 정권 당시의 과오를 사죄, 재산 139억원의 국가 헌납을 성명한 후 산사(백담사)로 들어갔다.89년 12월에는 전임 대통령이 5공 비리 청산 청문회가 열린 국회에 출석하여 증언대에 세워졌다.‘악마’라 불리며 ‘국가의 역적’ 으로 죄인 취급당하며 야당으로부터 혹독한 규탄을 받았다. 이는 일종의 ‘야대여소’정국에서의 야당 의지와 정국과 ‘전 정권과 이별’을 꾀한 여당의 이해 타산이 맞아떨어진 결과이기도 했다. 일종의 ‘여야간 정치 거래 성립 기념식’이었다. 이를 끝으로 1년 6개월 지속되던 5공 청산은 여야당 합의로 결말이 났다.해를 넘긴 90년 1월에 민정, 민주, 공화 3당이 합당을 선언하고 민주자유당을 결성하였다.
보수 세력의 대합동이다.노태우 대통령은 신당 민자당 안에서 구민정당을 대표, 관리하는 대표 최고 위원으로 박태준(포항종합제철 명예 회장)을 임명했다. 3당 합당에 맞추어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세 사람은 의원내각제 이행 각서에 서명하였다.그러나 합당 후, 김영삼은 의원 내각제를 거부하고 야당인 김대중과 제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며, 의원 내각제를 이행하려는 파들을 견제하였다.노태우는 3당 합당으로 김영삼을 구슬러 정국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정치의 아수라장에서 오랫동안 단련된 김영삼에게 콧등을 물려 주도권을 빼앗겼다.게다가 여당 내에서도, 차기 대통령 후보는 오랫동안 민주화 투쟁을 해 온 김영삼을 추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를 차지했다. 이른바 대세론이다.결국 3당 합당으로 노태우는 은혜를 원수로 갚음 당한 꼴이 되고 말았다.
재벌 신세진 정권
국민의 민주화 욕구는 경제 분야로도 확산되었다. 87년 민주화 선언 이후, 노사 분쟁도 급증하였다.또 재벌에 대한 비판도 격화되었다. 재벌에 대한 경제력 집중을 규제하자는 요구도 높아졌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들 요구에 대응해 재벌 규제와 경제력 집중 완화를 위한 대규모 기업 집단 지정과 계열 기업에 대한 출자, 상호 보증 규제, 여신 관리 제도 강화, 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 등 잇따른 대책을 내세웠다.그러나 정권의 성격으로 보아 취해진 조치는 눈 가리고 아옹하는 식에 지나지 않았다. 근본적인 구조 개혁은 불가능했다. 경제력 집중 규제도 소유 집중에 대한 규제를 뒤로 미눈 채로는 실효를 거둘 수 없어 오히려 정경유착을 심화시켰다.80년대 후반에는 버블 경기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였다. 정부는 89년에 토지 공개념 정책을 추진했다. 택지 소유 상한제, 개발 부담금제, 토지 초과 이득세 등 토지 사유권을 제한하는 입법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이 정책도 저항 세력에 의해 흐지부지됐다.무엇보다도 87년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은 재벌의 자금을 지원 받았다. ‘신세를 진 처지’인 것이다. 금융 실명제 실시는 커녕 정경유착은 더욱더 심화되었다. 재벌의 발언력은 점점 높아졌다.그 결과 92년 대통령 선거에서 현대그룹 소유주인 정주영이 입후보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도중에 바꿨지만, 대우그룹의 김우중도 출마할 야심을 굳혔었다. 노태우 대통령 본인도 사돈 관계인 SK그룹에 이동 통신 사업의 특혜를 주었다는 비난을 받았다.주가는 85년 이후 계속 오르고 또 올랐다. 평균 주가 지수는 85년의 138에서 89년 4월 1,007까지 폭등했다. 그러나 그것을 피크로 미끄러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노 정권은 주가를 유지하기 위해 투자 신탁등을 동원했으나 실패하였다. 이것이 후일 한국 증권시장을 뒤흔들게 된다. 국제 수지 흑자도 90년을 경계로 다시 적자로 전락하였다. 한국은 80년대의 국제 수지 흑자 관리에 실패하였다.
88올림픽과 외교의 눈부신 성과 영남 군벌의 막을 닫는 역할도
노태우 대통령은 외교 분야에서 경제력을 업고 전방위 외교를 전개하여 눈부신 성과를 올렸다. 당시는 냉전 말기다. 사회주의 국가가 한꺼번에 붕괴한 시기다.88년의 서울 올림픽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올림픽 대회 직전인 7월 7일,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 선언’을 발표하였다.이 선언은 북한과의 적대·대결 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있다. 이는 한국이 냉전 체제에서 벗어날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남북 관계의 일대 변화이다.성과는 즉시 나타났다. 헝가리와 한국은 서울 올림픽 직전 국교 수립을 공표하였다. 한국은 헝가리에 차관 6억 2,600만 달러를 제공하였다. 이어서 동구 여러 나라도 잇달아 한국과 국교를 수립하였다.90년 6월, 노태우는 고르바초프와 샌프란시스코에서 회담하였다.
이렇게 해서 사실상 소련은 한국을 인정한 것이 된다. 당시 소련 경제는 붕괴 중이었다. 고르바초프는 돈만 주면 누구라도 만났다. 한국과 소련은 90년 9월 30일 국교 수립을 공표했다. 노태우는 같은 해 12월에 소련을 방문,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그러나 공짜가 아니다. 한국은 뱅크론(은행 대부) 10억 달러, 소비재 15억 달러, 시설재 5억 달러 등 총액 30억 달러의 대 소련차관 제공을 결정했다.북한은 소련의 한국 접근을 심하게 비난하며 ‘달러로 사고 판 외교관계’라고 욕을 해댔다.고르바초프는 91년 4월, 일본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제주도에 들러 노태우와 정상 회담을 가졌다. 이 때 노태우는 고르바초프에게 미 달러 지폐 10만 달러를 비밀리에 건넸다. 돈은 명목상 체르노빌의 희생자를 위한 것으로 돌렸다. 고르바초프는 이 돈을 아동 병원으로 보내도록 하는 문서를 작성시켰다고 한다.91년 9월 17일, 국제 연합에 한국과 북한은 동시 가입을 하였다. 북한은 국제 연합 가입에 소극적이었다.
국제 연합에 가입하면 정보 공개 의무 등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단독 가입에 거부권을 발동해 온 소련과 중국은 이번엔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북한 입장에서는 한국의 단독 가입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북한은 하는 수 없이 국제 연합에 동시 가입했다.92년 8월, 한국은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은 한반도를 둘러싼 4강 모든 국가와 외교 관계를 정상화했다.노태우 대통령은 9월에 중국을 공식 방문하였다. 임기 마지막의 성과다. 그렇지만 중국과의 국교 수립으로 대만 단교라는 대가를 지불했다.남북 관계도 개선되었다. 91년 4월, 치바켄에서 열린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남북 통일팀 ‘코리아’가 참가하는 등 화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남북의 직접 대화도 진전되어 그해 12월, 남북 총리가 회동한 남북 고위 회담에서 남북 기본 합의서와 비핵화 공동 선언이 채택되었다.노태우 대통령이 주도권을 잡은 전방위 외교는 냉전 종식과 타이밍이 일치했기 때문에 성공하였다. 군인 출신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전방위 외교가 용공 좌경(공산주의의 주장을 받아들여 좌익으로 기울어짐)의 비판을 부르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돈을 들이민 더티 외교였다는 비판도 있다. 소련에 제공한 차관 30억 달러는 돌려받지 못하게 되었다.냉전 종식은 군벌의 ‘마지막 종’이 되었다. 냉전이 끝나면 군벌도 존재 이유를 잃는다. 노태우 대통령은 영남 군벌의 막을 닫는 역할이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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