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은 오랜 기간 군사 정권과 싸운 대통령이다.그는 군인 정권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시빌리언(Civilian·문민)출신으로서 군사 정권 32년 만에 대통령으로 뽑혔다. 엄밀히 말하면 79년부터 9개월 간 외교관 출신 최규하가 대통령이었지만 그는 명목상 대통령으로 신군부 세력이 한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다.김영삼은 자칭 문민 정부라 자부하며 ‘역사 바로 세우기’가 시대의 키워드라고 칭했다.김영삼은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서, 야당으로서 김대중과 함께 민주주의를 외치며 반독재 투쟁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이 된 후에 보수 합당의 명분을 내세워 3당 합당으로 여당에 들어갔다.변절을 비난하는 소리에,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잡을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권력에의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끝내 여당 내에서의 격렬한 패권 다툼 끝에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당선되었다.대통령이 되고 나서 깨끗한 정치를 표방하며 ‘재계에서 정치 자금을 단 한푼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면서 잇달아 공직자 재산 공개와 등록, 금융 실명제, 선거법 개정 등 공명정대한 개혁을 조속히 단행했다. 재산을 부정 신고한 공직자는 용서 없이 해임하였다.경제 분야에서도 32년간 계속되었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체제를 폐기하고 규제를 대폭 완화하였다. 또한 군부를 과감하게 정리하였다. 신군부의 맥박으로 군부에서 강력한 파벌을 형성했던 하나회를 숙청하였다. 이렇게 해서 영남 군벌은 숨통이 끊어졌다. 더욱이 노·전 전임 대통령의 비밀 예금을 적발하여 두 사람을 처단하였다.한국은 96년 10월 OECD(경제 협력 개발기구)에 가입하였다. 대통령은 선진국 대열에 들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그러나 세계화를 노린 한국 경제는 좌절하였다. 임기 말에는 한보철강 부도 등 대형 도산이 속출했다. 한국은 국제 유동성 부족에 빠졌다. 대외 채무 불이행 위기에 몰린 끝에 IMF(국제 통화기금)관리 하에 놓였다.경제 파탄 탓으로, 여당 후보는 대통령 선거에 패배해 사상 처음으로 선거에 의한 여·야당 간의 정권이 교체되었다.
김영삼은 민주화 투쟁의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야당 리더로서는 과감한 결단과 저돌적인 행동이 빛났지만, 행정가·대통령으로서는 능력과 자질에 의문을 보이는 경향이 적지 않다.그는 사상 최연소인 26세에 국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 후 한결같이 정계에서만 활약한 순수한 정당인이다. 관료나 기업등, 조직 속에서 활동한 적이 없다. 군인 대통령은 군대라는 집단조직 속에서 성장해 조직을 움직이는 노하우를 우선 체득하고 있다. 김영삼은 그것이 부족하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관료 등의 공적 조직보다 전근대적인 가신 그룹 등의 사적 연계에 의존했다. 김영삼은 금전 면에서 욕심이 없었다. 돈에 얽힌 개인적인 스캔들은 없다. 그러나 가족, 비서가 돈에 연루된 비리 사건으로 처벌되었다.김영삼은 정치적인 동물적 감각이 예리했다.
그러나 이론적 분석에는 약하고 좁다. 그는 장관의 보고가 길면 바로 싫증이 나서 보고를 빨리 끝내도록 재촉했다고 관계자는 증언하였다.김영삼은 서울대학 철학과 출신이다. 그는 서울 대학 졸업생으로는 처음 나온 대통령이라고 자랑하였다. 정계 입문 후에는 오로지 어깨 너머로 지식을 흡수했다.라이벌 김대중은 목포 상업 학교 졸업이지만 왕성한 지식욕을 지녀 다수의 저작을 발표했다. ‘김영삼이 읽은 책과, 김대중이 쓴 책의 수가 같을 정도’ 라는 조크까지도 퍼졌다.김영삼의 좌우명은 ‘대도무문(大道無門)’이다. 넓고 큰길은 왕래를 막는 문이 있을 수 없다. 바른 길을 가는 자는 누구든 막을 수 없다는 신념이다. 박해와 좌절의 연속이었던 김대중과는 대조적으로 김영삼은 의지와 신념대로 쭉쭉 뻗어 나가 낙천적이고 밝다. 그것이 그를 대통령으로 끌어올린 원동력이다.
신념의 뒤안길
김영삼은 부산의 남쪽, 거제도에서 유복한 선주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산 경남 중학을 졸업, 47년에 서울 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6·25 전쟁 중, 장택상 외무 장관 비서가 되었다. 52년에 장택상 장관이 국무총리로 취임하자 총리 비서관으로 근무했다.54년 5월에는 총선거에서 여당 자유당의 공천으로 당선됐다. 신문은 ‘26세 최연소 의윈의 탄생’을 크게 보도하였다. 그러나 그 해 11월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해 여당을 떠나 야당인 민주당으로 옮겼다.58년 5월 총선거에서 선거구를 거제도에서 부산 서구로 옮겼는데 심한 관권 선거 탓으로 낙선하였다. 2년을 기다려 60년 7월에 이승만 하야 후의 총선거로 국회에 복귀하였다. 민주당은 정권을 잡은 순간 구파(윤보선 대통령계),신파(장면총리계)로 분열하였다. 김영삼은 구파, 김대중은 신파다.60년 9월, 공산 게릴라가 생가에 침입, 어머니가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영삼은 뼛속 깊이 반공산주의자가 되었다.61년 5월, 군사 혁명으로 국회가 해산되고, 63년 정치 활동 규제가 해제될 때까지 김영삼은 암중모색의 나날을 보냈다.군사 혁명에 대해 김영삼은 ‘성서를 읽기 위해 초를 훔치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단정한다.63년 총선거로 국회에 돌아온 그는 야당 대변인, 원내 총무 등 정치적 경력을 착착 쌓아 올렸다.박 대통령은 69년에 삼선 금지 헌법을 개정하고 71년의 차기 대통령 선거 출마를 결정하였다.김영삼은 이에 대항해 ‘차기 대통령 선거의 야당 후보는 젊고 강력한 40대 기수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40대 기수론을 주장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70년 9월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 대회결선 투표에서 야당 후보로 선출된 것은 김대중이었다.김대중이 야당 후보로 선출된 배경에는 중앙정보부가 한 몫 했다는 얘기도 있다.
박정희는 ‘같은 경상도를 지지 기반으로 하는 김영삼이 야당 후보가 되면, 경상도의 표가 갈린다. 전라도 출신인 김대중이라면 경상도 표를 전부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중앙정보부를 공작에 동원했다는 설이다.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박정희를 바짝 추격했지만 95만 표 차이로 패배하였다. 이 대통령 선거에서 지역 대립 감정이 조장되어 악용됐다. 그 후 선거 때마다, 지역 대립이 반복되었다.70년을 기점으로 김영삼과 김대중은 숙명의 라이벌이 되었고, 그 후 30년간 한국 정치에서 두 사람은 격돌하게 된다.
유신 독재투쟁
12년 10월, 박정희 정권은 전격적으로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 유신 독재 체제로 이행하였다.이 때 김영삼은 워싱턴, 김대중은 동경에 있었다. 두 사람이 취한 행동은 대조적이다.김영삼은 즉각 귀국했고 계엄 당국에 의해 자택에 연금되었다.김대중은 귀국하지 않았다. 대신 해외에서 반독재 투쟁을 전개하였다.김대중은 다음해 8월, 중앙정보부원이 동경의 호텔 그랜드 팔레스에서 납치해 서울로 데리고 왔다.야당인 신민당(당수 유진산)은 온건 노선으로 전환하여 박정희와 타협하였다.김영삼은 신민당 부총재지만 주류에서 벗어났다. 유신 독제 체제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높아지기만 했다.신민당은 74년 당수 유진산 사후에 김영삼을 당총재로 선출하였다. 46세의 야당 당수다. 김영삼은 박 정권과의 대결에 들어갔다. 박 정권은 긴급 조치를 잇달아 발동하며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였다.75년 5월, 김영삼은 박 대통령과 단독으로 2시간에 걸친 회담을 하였다.회담 내용은 공표되지 않았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부인까지 흉탄으로 잃은 권력자의 고독을 말하고 눈물까지 흘리면서 협력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후, 김영삼의 강경 노선은 잠시 누그러졌다. 두 사람 사이에 밀약이 있었다는 의혹도 나돌았을 정도다.76년의 신민당 총재 선거에서 김영삼은 총재 자리를 이철승에게 빼앗겼다.78년 총선거에서 여당 인 공화당은 68명, 야당 신민당은 61명의 의원이 당선되었다. 당선자 수로는 여당이 우세했지만, 득표율은 신민당 32.2%, 공화당 31.7%로 야당 득표율이 여당을 넘어섰다. 박 정권은 위기감을 느꼈다. 79년 5월 전당 대회에서 김영삼은 총재에 다시 한번 입후보하였다. 이 때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던 김대중이 김영삼을 측면 지원하였다. 김영삼은 당선하였다.박정권은 김영삼을 정계에서 배제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서울 지방 법원은 반 김영삼파가 소송을 제기한 ‘당 대표 최고위원 직무 권한 집행정기 가처분 신청’을 인정하였다.
국회는 <뉴욕 타임즈>에 게재된 김영삼의 인터뷰 기사를 문제로 들어 10월 4일 의원 자격을 박탈하였다.김영삼은 인터뷰에서 ‘비국은 독재 정치를 선택할지, 민주주의를 원하는 대다수 민중을 선택할지 명확한 결단을 내려야 할 때 가 왔다. 카터 대통령의 방한은 박 정권의 위신을 높이고, 비판세력을 탄압, 억압하는 계기가 되기 쉽다. 카터 대통령의 방한 중지를 요구한다’ 고 말했다.여당은 ‘사대주의자의 헛소리’라며 비난, 제명하였다.김영삼의 의원 제명은 근거지 부산에서 대학생 시위를 유발시켰다. 정부는 10월 18일, 부산 일대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출동시켰다. 마산에서도 폭동이 일어났다. 부산, 마산 폭동의 수습책을 둘러싸고 김재규 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주장이 대립한 끝에 박 대통령은 비명의 최후를 마쳤다. 참고로 김재규와 김영삼은 같은 ‘김녕’김씨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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