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사상 초유의 사태 대통령 탄핵안 가결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 대통령 탄핵안 가결
  • 엄광석 
  • 입력 2004-10-29 09:00
  • 승인 2004.10.29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회, 드디어 탄핵안 가결하다
오전 11시 22분, 국회는 드디어 개의했다. 마이크 시설이 파손돼, 박 의장은 무선 마이크로 사회를 봤다. 1분 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상정됐다. “오늘 우리는 헌정사에서 한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16대 국회는 초헌법적 반(反)법치주의적 자세로 일관하면서 국법질서와 의회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최소한의 도덕적 기반마저 붕괴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을 탄핵하여 민주헌정을 수호하기 위한 헌법적 책무를 다해야 하는 역사적 기로에 서 있습니다.”이렇게 시작되는 제안 설명은 역시 유인물로 대체됐다. 이어서 곧바로 무기명 투표가 실시된다. 11시 24분이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나고 있었다.명패와 투표용지는 민주당 뒤편의 직원대기실에서 배부됐고, 의장 입장 후 야당 의원들에 의해 민주당 쪽 기표소 바로 앞으로 명패함과 투표함 각 1개씩 이동됐다.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들은 투표하지 않고 의석으로 올라가 구호를 외쳤다.11시 51분, 투표 종료가 선언됐고, 4분 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은 가결이 선포됐다. 총 투표수 195표 중 부 2표라는 압도적 다수로 통과된 것이다.요즘 잘나가는 철학자라는 어떤 분은 얼마 전 TV에서 대통령이 탄핵 소추된 게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궤변을 떨었는데, 세상에,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 소추당한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부끄럽다는 말인가. 오죽하면 해외에서 민주주의가 미숙한 나라라고 했겠는가. 국회는 오전 11시 56분 산회했는데, 여당 의원들은 국회의장을 향해 유인물과 명패, 구두를 던졌다. 의장이 퇴장한 뒤에도 송석찬 의원은 명패와 투표함을 내팽개쳐 부숴 버렸다. 여당은 탄핵 소추안 가결에 대해 본회의장에서 규탄 집회를 가졌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예결위 회의장에서 의총을 가졌다.

이 시간 청와대는?
그러면 이 날, 청와대의 상황을 알아보자. 대통령은 오전 10시 30분, 경남 지역 혁신 보고회에 참석하기 위해 경남 창원으로 내려갔다. 자신에 대한 탄핵안이 가결될 것이라는 예상을 충분히 했음직한데도 말이다. 그래서 국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오불관언(吾不關焉)이라는 의지를 읽게 하는 것이다. 혁신보고회 후 로템공장 현장 방문 일정을 수행하던 윤태영 공보 비서관과 천호선 의전 비서관에게 탄핵 가결 사실이 전해진 것은 오전 11시 55분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대통령은 자신이 탄핵 소추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대통령이 소식을 전해들은 것은 공장 방문을 마치고 오찬장으로 가던 차 안에서였다. 너무 충격이 커서였을까. 로템사 근로자들에게 ‘제가 직무 정지가 되는데 오늘까지는 괜찮다’는 여유를 보인 게 말이다.오히려 급박하게 움직인 것은 총리실과 관련 부처다.고건 총리는 오전 11시 30분, 김우식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탄핵안 가결 시의 준비사항을 논의했다. 11시 50분에는 NSC사무처에도 전화를 걸어 최악의 사태에 대비한 법률적 검토와 준비를 지시하고 가결 시 외교안보 분야와 관련해 국무 조정실과의 업무 조율을 지시한다.

탄핵안이 가결된 뒤인 12시에는 윤영철 헌법재판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국민 불안을 감안, 신속한 처리를 당부했다.대통령은 로템사 방문 후 58기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뒤 오후 5시쯤 청와대로 돌아와 국무위원들과 간담회를 갖는다.도대체가 청와대는, 지금도 그렇지만, 국회나 당하고의 창구가, 채널이 마비되어 있었다. 탄핵이라는 엄청난 일을 당하고 있는데도 딴 나라 사람들처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그것이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위급 상황에서 마땅히 있어야할 채널이 가동되지 않은 게 문제라는 것은 내가 하는 얘기가 아니다. 대단히 죄송한 말일지 모르지만, 이 말은 청와대 사람들이 하는 얘기다.그러면 이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몇 가지 부분을 확인해보자. 하나는 조순형 대망론이고 다른 하나는 한나라당에서 누가 더 탄핵안을 주도했느냐 하는 부분이다. 이는 최병렬 대권 욕심설과도 연관이 있다. 세 번째는 한나라당의 탄핵 강행에 다른 이유는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청와대가 탄핵의 주도자로 박관용 의장을 꼽고 있다는 사실 부분이다. 하나하나 짚어보자.

조순형 대망론은?
조순형 대망론은 탄핵 뒤 대권을 염두에 두고 조 대표가 탄핵을 주도했다는 것으로, 발단은 월간조선 조갑제 편집장이 인터넷의 홈페이지에 올렸다는 글이다. 탄핵이 되면 조 대표를 과도기 대통령으로 옹립한다는 것인데, 언론에서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바람에, 한때 인구에 회자됐었다.2003년 12월 31일, 민주당의 강운태 사무총장이 2004년 조 대표의 사주를 ‘적장의 목을 베는 점괘’라고 말한 것도 일조를 했다. 조 대표 자신이 3월 3일, ‘이런 오만 불손한 대통령은 제자리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한 경고도 그럴듯하게 부풀려졌다. 이 날은 선관위가 대통령의 언동이 공무원의 선거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고 결정한 날이다. 또 하나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내의 탄핵 강행에 대한 이견에 대해서 ‘복안이 있다’고 응수한 것도 무욕(無慾)을 강조한 조 대표의 정치 행보에 복선이 깔린 것 아니냐면서 대망론에 무게를 실었다.그러나 결론부터 얘기하면 터무니없다는 게 중론이다.

이낙연 의원의 말부터 들어보자.“조갑제가 했다는 말 아닙니까? 탄핵 뒤 대통령을 생각했다는 주장인데,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조 대표는 순수한 분입니다. 그런 장난칠 분이 아닙니다.”천정배 의원도 그럴 리 없다고 증언한다. 그는 조 대표를 남달리 높게 평가하는 사람이다.“15대 때 나는 국민회의 영입케이스로 공천을 받게 돼 있었는데, 조직책으로 1차에서도 선정이 안 되고, 2차에서도 역시 선정이 안 됐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물어보니, 심사위원에게 가서 인사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심사위원이 9명인데, 심사위의 간사가 당시 사무총장이었던 조순형 씨였습니다. 그래서 국민회의 당사로 찾아가 명함을 내놓았더니 비서가 나오며 하는 말이 ‘조직책과 관련해서 찾아왔다면 안 만나겠다. 돌아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때 조순형 씨를 매우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 대표는 강직하고 원칙을 지키는 분입니다. 그렇게 개혁적인 분은 아니지만, 자존심과 자존의식도 강한 분입니다. 탄핵으로 대권을 넘볼 분이 아닙니다. 사실 솔직히 말해서 신당을 할 때 탐났던 분이 조순형 씨였습니다.”유용태 총무도 펄쩍 뛴다.

“조순형 씨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탄핵안을 추진했다는 것은 엄청난 음해입니다. 그런 말은 조순형이라는 분을 알면 나올 수가 없는 말입니다. 조순형 대표는 욕심이 없는 분입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는 조 대표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원내총무가 된 뒤 업무적으로 조 대표를 만나면서부터 많은 부분에서 조 대표에 대해 잘못된 편견을 가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조 대표는 정직하고 순수한 분입니다. 위계질서도 존중하는 분입니다. 조직은 위계질서가 없으면 개판이 됩니다.”그러면 정작 조순형 대표는 어떻게 얘기할까? 직접 들어보자.“조갑제 씨가 작년에 홈페이지에 올렸다는데, 나는 조갑제 씨를 85년도에 인터뷰한 이래 18년 동안 한 번도 만난 일이 없습니다. 전화한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 총선이 끝나고 열린우리당의 부대변인인가 하는 사람이 나와 조갑제의 ‘악마적 거래의 산물’이라나 뭐라나, 나 참 기가 막혀서… 근거 없는 얘깁니다.”‘고독한 원칙주의자’, ‘영원한 야당’, ‘가장 신사다운 국회의원’ 등으로 불리는 조순형 대표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하는 바른 소리 때문에 ‘미스터 쓴 소리’라는 별명을 가졌지만, 그를 만나면 적어도 ‘장난칠 분은 아니다’라는 이낙연 의원의 말에 수긍하게 된다. 조 대표의 원칙 부분은 뒤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자.

엄광석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