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 공조의 경위
조 대표는 한 달 뒤인 2월 3일,「불법 관권선거 및 민주당 죽이기 공작 규탄대회」에서 ‘대통령이 계속 선거에 개입한다면 민주당은 탄핵 발의도 불사하겠다’고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그러자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한나라당의 최병렬 대표는 다음 날인 2월 4일, 국회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불법관권선거와 공작정치를 중단하지 않을 경우 대통령 탄핵을 포함한 모든 조치에 대한 검토를 하겠다’고 밝힌다.다음 날엔 조순형 민주당 대표가 교섭단체대표연설을 하게 되어 있었다. 조 대표가 최 대표의 연설에 맞장구를 친 것은 당연하다. ‘대통령이 국민 분열을 부추기고, 민주당 죽이기와 불법 관권 선거를 계속한다면,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한다.자, 이 정도면 눈치를 채야 한다. 이미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대통령에 대해 꼬투리만 잡히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각오를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2월 24일,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방송기자클럽 초청 특별회견에서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발언했다. 그러자 조순형 대표가 발끈했다. 조 대표는 같은 날 있은 관훈클럽초청토론회에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의 법률적 검토는 끝났고, 국민의 이해를 얻으면 탄핵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힌다.여기서 ‘국민의 이해를 얻으면’이라는 것이 한나라당의 공조를 의미한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다. 따라서 2월 25일, 한나라당이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 관련 탄핵 사유 해당 여부를 검토 중’이라고 밝힌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미 두 야당은 탄핵 사유에 해당되는지를 놓고 세게(?) 스터디를 하는 중이었다.그런데도 대통령은 또 야당을 자극하는 발언을 했다.
3월 3일, 제주 지역 언론 합동 회견에서 ‘그냥 묻는 말에 답한 것을 놓고 탄핵이 거론되고 있다’면서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 그런데 이 날은 중앙선관위가 대통령의 선거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고 유권해석을 내린 날이다. 그러자 청와대는 다음 날 ‘선관위의 해석을 존중하나 납득하지는 못 하겠다’는 묘한 논평을 내 놓는다.이 날을 계기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노 대통령에 대한 공개 사과 촉구 및 탄핵 발의를 위한 본격 검토에 착수한다.다음 날인 3월 5일, 민주당의 조 대표는 ‘7일까지 선거 중립 의무 위반과 본인, 측근 비리 등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지 않을 경우, 8일 탄핵 소추안을 발의하겠다’고 특별기자회견에서 밝힌다.
이로써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탄핵공조를 공식적으로 착수했음을 천명했다.그런데도 청와대의 엇박자는 계속된다. 청와대는 3월 6일, ‘부당한 정치적, 정략적 압력과 횡포에 굴복할 수 없다’는 성명을 내기에 이른다. 그러자 한나라당은 7일 ‘선 재발 방지 약속’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러니까 노무현 대통령은 8일, 청와대 수석 보좌관 회의에서 ‘탄핵 사유에 대해서는 굴복할 수 없고 원칙적으로 대응해 나가겠다’고 밝힌다.이상이 발의 전까지 탄핵에 관련된 야당과 청와대의 공식 발언과 대응이다. 마치 마주선 두 사람이 서로 뺨을 때리다가 점점 강도가 높아지듯, 상황이 악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상황이다. 국민들은 조마조마했다.
탄핵 추진의 명분은 ‘총선 음모’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탄핵 추진 명분은 노 대통령의 총선 올인으로 요약되는 거대한 음모 때문이라는 면에서 일치한다. 결국 노 대통령이 자초했다는 얘기다.먼저 한나라당의 주장이다. 최병렬 대표.“한나라당이 탄핵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노 대통령이 총선 올인의 일환으로 대선 자금 수사를 통해 한나라당을 붕괴시키려 한 것 때문입니다.첫째, 자신의 대선 자금은 까지 않으면서 한나라당에만 800억을 깐 것이 그것입니다. 역대 대통령선거에서도 대선 자금은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서로들 많이 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10분의 1이라는 게 뭡니까. 노 대통령이 적게 썼다고는 하지만 엄청나게 쓰고도 자신의 선거자금에 대해서는 손도 못쓰게 틀어막아 놓고 한나라당만 도덕적으로 붕괴시켜 버렸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한나라당을 뚜드려 잡겠다는 음모이고, 그래서 다수 의석을 잡아야겠다는 집념입니다.
둘째, 민주당을 쪼갠 것도 그 하납니다. 민주당으로는 안 된다고 보고 자기 코드와 맞는 개혁적인 사람들로 승부를 내려했습니다.셋째, 열린우리당을 도와주기 위해 공직사회를 총동원했습니다. 국정은 어떻게 되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사람들을 스크린 해서 선거 현장으로 내몰았습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자체 단체장을 끌어들이기 위해 회유와 압력을 계속했습니다. 경남의 김혁규 지사가 넘어갔고, 부산의 안상영 시장은 자살했습니다. 다른 광역단체장들도 상당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열린우리당에 안 간 사람들은 처신을 잘 했거나 심지가 굳은 사람들입니다. 안 그런 사람들은 다 무너졌습니다. 이게 총선의 올인이 아니고 뭐겠습니까.”그러나 근원적으로는 이런 시각도 있다.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이 취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부터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는 얘기다. 이것은 한나라당 내부에서 나오는 얘기다.
윤여준 의원의 말.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졌다는 것을 감정적으로 인정하기가 싫었습니다. 최병렬 대표가 흥사단에 가서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라고 발언한 것이나 김무성 의원이 ‘대통령으로 부르고 싶지 않다’고 발언한 것들이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김문수 의원의 의견도 같다.“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이 당선된 과정도 영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전자 개표 오류라는 지적도 나온 것입니다. 한마디로 선거에서 진 것을 승복할 수 없다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당선된 뒤 얼마 안 있다가 못해먹겠다는 발언을 했고, 그러면 진짜 그만 두는가 했는데 이번에는 재신임을 묻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재신임을 물으면 야당이 지는 것으로 여론조사가 나오니까 재신임 발언도 흐지부지 들어가 버렸습니다.탄핵의 뿌리는 재신임 발언입니다.근본적으로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에 대한 불신이 바탕에 깔려 있었는데 민주당의 조순형 대표가 명료하게 결단력을 갖고 단호하게 탄핵을 추진한 것입니다.” 그러니 대통령이 연설을 하러 국회에 갔을 때도 외국처럼 야당 의원들이 일어서서 박수로 맞지 않았다.
그런 국회에 노 대통령의 감정이 좋았을 리가 없다.이번엔 민주당의 대의명분을 들어보자. 조순형 대표.“노 대통령은 50년 전통 야당인 민주당의 분당을 통해 민주당을 궤멸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총선 올인 전략으로 선거에 개입해 공무원으로서의 선거 중립 의무를 위반했습니다. 측근들의 비리도 탄핵 사유가 됩니다. 또한 재신임 국민투표라는 위헌으로 국민들을 협박했습니다. 결국 노 대통령이 탄핵을 자초한 것입니다.”두 당을 죽이려 했다는 점에서 칼을 빼들었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그러나 두 야당 대표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쉽게 말해 한나라당은 총선 올인에 초점을 맞췄고, 민주당은 탄핵 사유에 중점을 두었다는 말이다.
민주당은 탄핵밖에 길이 없었다
한나라당과는 달리 민주당이 탄핵밖에 길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끄덕인다. 유용태 총무의 말을 들으면 알 수 있다.“탄핵안을 내기까지 누적된 사안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을 죽이려고 한 것에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노 대통령은 민주당을 반으로 잘라간 것에 족하지 않고, 나머지마저 근본을 없애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노 대통령에 대한 거부감이 절정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정타는 ‘민주당을 찍으면 한나라당을 돕는 것’이라는 대통령의 발언이었습니다. 민주당을 찍으면 한나라당을 돕는 것이라니 그게 뭡니까. 민주당을 말살하려는 것 아닙니까? 그런 판에 민주당이 어떻게 선거를 치를 수 있겠습니까? 선관위에서 경고장이 나갔는데도 그 자체를 부정하고 무시한 청와대의 언동을 보고, 공명선거는 물 건너 갔다고 본 것입니다. 민주당을 완전히 없애려는 기도를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민주당원들로 하여금 거부감 없이 칼을 빼들게 한 동기였습니다.”유용태 총무는 대통령 측근 비리 청문회에서 보인 열린우리당의 행태도 한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대통령 측근 비리 청문회에서 열린우리당이 보인 행태는 완전히 무법에, 탈법에, 비리 그 자체였습니다. 한화갑을 잡아넣으려는 것도 정동영 의장과 노무현 대통령과의 형평성이 어긋난 처사였습니다. 열린우리당의 청문회 행패는 과거 유례가 없는 폭력 사태입니다. 이런 것이 열린우리당으로 기우는 노 대통령의 모습을 염려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무법천지이고, 안하무인이고, 도대체가 무작정 몰아붙이는 것이 위기라고 생각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15 때보다도 더 심했습니다. 그래서 의총에서도 제2의 4·19를 유발할 수 있는 상황 아니냐고 경고했었던 것입니다.” 이런 민주당의 위기의식을 대변해서 탄핵을 추진하고 주도한 사람은 위기에 빠진 민주당의 재건에 나섰던 조순형 대표다. 탄핵에 관한한 조순형 대표의 의지는 누구보다 강했다.민주당이 탄핵으로 간 과정을 가장 조리 있게 설명하는 사람은 이낙연 의원이다.“조순형 대표도 처음에는 탄핵을 경고 카드로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진짜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주변에서 탄핵을 가결시킬 수 있다고 얘기했을 것입니다. 탄핵 사유도 충분히 된다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낙연 의원이 밝힌 민주당 탄핵의 단계별 과정은 아래와 같다.
1. 맨 처음 누군가 ‘이대로는 총선을 치를 수 없다.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마찬가지다. 노 대통령을 묶어두지 않으면 선거를 할 수 없다. 민주당이 살기 위해서는 탄핵을 무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강운태, 유용태, 김경재, 황태연 등)
2. 두 번째 단계는 발의만 해도 노 대통령을 ‘한방 먹이는 것’으로 생각했다.
3. 막판에는 정말 탄핵해서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다수가 됐다. 이는 한나라당과의 공조가 확인된 이후의 일이다.이낙연 의원의 증언을 더 들어보자.“그 무렵의 조순형 대표의 어록을 보면 역사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역사적으로 옳은 일을 한다든지, 헌정을 지키기 위해서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지, 또는 우리는 역사적 행동이라는 등의 얘기들입니다.”유용태 총무도 비슷한 증언을 한다.“시간이 가면서 조 대표의 의지는 더욱 굳어졌습니다. 의총에서도 여러 번 거론해 탄핵으로 안 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그래서 여러 번 사인을 주며 대처하라, 사과하라, 수정할 수 있다, 대화하든지 발언을 수정하든지, 수습을 하든지 하라고 여러 차례 경고를 주었는데도 청와대는 전혀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언론에 대고는 반박만 하는 장난을 했습니다. 이런 오만 방자한 태도를 그냥 둘 수가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엄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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