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함 때문이었을까. 당선자의 이런 뜻이 전해지자 민주당은 지리한 내분 사태가 이어지면서 두 세력 간의 감정의 골은 깊어만 간다.그러면 이때 대통령의 진짜 생각은 무엇이었을까?때마침 <한겨레 21>이 3월 11일자 발행호에서 노 대통령과 이 부분에 대한 인터뷰를 게재했기에 인용해 본다.“민주당 재창당이 내 희망이었다. 즉, 민주당의 구 주류 세력이 주도하지 않고 새로운 세력이 주도하는 정당을 원했다. 정당의 지도자상이 새로운 시대 상황에 맞아야 하고, 그래서 탈지역당을 하고 정치 개혁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게 내가 후보 때부터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던 말이다. 대통령이 된 뒤로 시비에 휘말릴까봐 말을 조심했을 뿐이지 천하가 다 아는 일 아니냐.그 결단에 내가 직접 관여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개인적 판단조차 하지 않기는 어렵다. 그대로 있으면 주저앉아 밥그릇 싸움이나 하다가 망하는 길밖에 없는데, 망하더라도 결단을 하고 망해야지, 주저앉아서 망할 수 있나. 그게(결단하는 게) 정치를 바꾸겠다거나 역사를 진보시켜 나가겠다는 사람의 태도이다.”그런 사이 민주당의 개혁은 지지부진해지고 신당파와 잔류파 간의 내분은 극에 달한다.
그 사이에 있었던 4월 보선에서도 민주당은 참패한다.그러자 신당파들은 이런 민주당을 갖고는 도저히 17대 총선에서 어렵겠구나, 판단하고 환골탈태(換骨奪胎) 하는 수밖에 없다면서 드디어 신당 창당을 선언하게 된다. 2003년 4월 28일이다. 5월 11일에는 여의도 63빌딩 ‘백리향’이라는 중국 음식점에 30명이 모였고, 5월 16일에는 양재동에 있는 교육문화회관 워크숍에 68명이 모여 신당 추진을 결의하고 기세를 올렸지만, 또 다시 동력이 떨어지면서 8월까지 내분 사태를 겪다가 상대방(잔류파)의 세력화로 신당파는 더 정치적으로 곤경을 맞게 된다.
천정배 의원의 증언
“결국은 숫자였습니다. 신당은 선명한 인물이나 정책, 그리고 정치 행태가 달라야 한다고 얘기했지만 얼마나 신선한 인물이 모일 거냐, 이 과정에서 살생부(이강철)니, 선혈이 낭자한 권력 투쟁이니 하는 말들이 나오긴 했지만 그것은 산발적인 생각이고, 민주당 내의 대부분과 개혁 세력이 합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민주당(당시 102석)의 법통을 갖고 가면서, 즉 그의 3분지 2인 60∼70명 정도는 끌고 가면서 하자, 즉 선명성과 다수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한 것입니다.”그러면서 수의 확보를 위해 치열한 포섭 작업이 진행된다.“8월에 가서 10명만이라도 선도 탈당을 하자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이때 독수리 5형제(한나라당에서 탈당한 이부영, 이우재, 김영춘, 안영근, 김부겸)와 개혁당의 유시민, 김원웅을 모아 15∼20명 정도만 하자는 비장한 생각까지도 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덜 개혁적인 사람들’은 안 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숫자의 확보가 중요해서 누구를 배제시킨다는 생각은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그런데 신당파들의 이런 세력 확대 작전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신당 추진 모임에서 결정한 상향식 경선이 많은 민주당 의원들로 하여금 공천에서 배제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했기 때문이다.
복날에 끌려가는 개가 될 수는 없다
유용태 총무는 상향식 공천 속에 든 독소 조항 때문이라고 말한다.“민주당에 남겠다는 사람들이 상향식 공천 자체가 두려워서 신당 참여를 거부했다는 것은 오햅니다. 상향식 공천 자체에 반대한 게 아닙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현역 의원들인데 왜 공천에서 지겠습니까. 그게 아니고 독소 조항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상향식으로 공천을 했다고 하더라도 심사해서 바꿀 수 있다느니, 말은 상향식이지만 중간 중간에 걸러낼 수 있도록 한다느니, 당의 지도체계를 바꾼다느니, 하는 것들이 모두 자기들 입맛에 맞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날에 끌려가는 개가 될 수는 없다, 보신탕이 될 게 뻔한데, 어떻게 가느냐 해서 안 간 겁니다.”결국 신당은 48명으로 낙착된다.
천정배 의원의 증언.“솔직히 말해서 탐나는 사람은 조순형과 추미애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추미애 의원은 신당 창당 때 우리 세력에 크게 호감을 갖고 있으면서도 매우 비판적 논점을 가진 논객(강준만, 고종석)과 비슷했습니다. 그들은 신당에 매우 비판적인 논조를 폈습니다. 즉 배신과 미움의 정치를 하면 개혁을 후퇴시킨다는 논리였습니다. 전라도를 내주고 영남을 빼오면 그것이 개혁이냐, 호남주의를 극복한다면서 신영남주의로 가는 것 아니냐고 질책했습니다. 고종석(한국일보)은 ‘추미애가 옳다’고 주장하기까지 했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신당을 하자는 천정배의 생각이 옳지만(?) 추미애의 이런 비판도 경청해야 한다, 또 하나 결코 지역주의로 가서는 안 된다, 영남 진출을 위해 호남을 의도적으로 소외시키고 자르면 안 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또 그 지겨운 지역주의
지금도 열린우리당 인사들은 민주당을 포기한 노무현 대통령의 선택이 탁월했다고 믿고 있다. 이해찬 의원의 증언.“노 대통령이 신당을 선택한 것은 기존의 민주당으로는 희망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민주당으로는 도저히 지역 구도를 깰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또 한나라당과의 대결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험을 해보자, 민주당으로는 안 된다, 80석을 얻으나 100석을 얻으나 한나라당에 지기는 마찬가지다, 전국 정당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 구도를 깨는 새로운 정당이어야 한다, 그래야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그러나 후단협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당 내 반노무현 세력들은 아직도 음모라는 시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 한화갑 대표는 이런 비화를 털어놓는다.“2002년 민주당 후보 경선 때 노무현 후보가 만나자고 해서 만났더니 자기를 도와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도 경선에 나가야 할 입장인데 어쩌겠느냐’ 했더니 ‘내가 전라도 DJ 밑에서 머슴살이를 했는데 또 더하란 말이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인간적인 실망이 들었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이해의 폭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머슴살이란 말입니까! 겉으로는 지역 감정을 타파한다면서 속으로는 지역 감정에 휩싸인 사람입니다. 도대체가 전라도 머슴살이였다는 게 뭡니까. 자신도 ‘광주 사람들이 내가 좋아서 찍었겠느냐, 이회창이 싫으니까 찍은 거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그런데 분당 이후 자신에게 열린우리당에 합류하라는 요청이 들어왔다고 말한다.
“김원기 고문이 모 국회의원을 통해 ‘한 대표가 교섭단체를 만들었다가 통합하면 어떠냐’는 말을 한다고 전해왔기에 ‘그 말은 왜 나한테 하느냐’고 따졌습니다. 그 후 신계륜 의원이 ‘김원기 고문이나 노 대통령도 통합을 원한다’고 하기에 ‘지금은 명분이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가령 내가 열린우리당으로 안 가면 남북문제에 급박한 일이 생겨서 전쟁 일보직전으로 가든지, 대한민국이 망가지든지 한다면 합류하겠지만 그렇지 않고는 안 간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부산을 중심으로 김혁규 지사를 끌어들여서 자신감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산에서 별로 신통치 않으니까 호남 쪽으로 옮겨 호남에 침투하는 수밖에 없다고 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호남의 대표격이라고 하니까 나를 움직여야 호남 공략에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또 그 지겨운 지역주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가 응하지 않으니까 재작년 10월, SK로부터 경선 자금 받은 것, 12월 초 대표 경선에서 하이텍 하우징으로부터 받은 것 가지고 보복했다고 말한다.누구는 이번 선거에서 지역주의가 극복되었다고 말하는데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한나라당이 영남에서 싹쓸이한 게 지역주의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역시 한나라당이 호남에서 전패한 것은 또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충청권에서 열린우리당이 승리한 게 신행정수도를 약속한 데 따른 지역주의가 아니란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몇 가지 예외는 인정하지만, 그래서 다소 완화되었다는 것까지는 양보하지만, 지역주의가 극복됐다는 것은 지나친 말이다.그러면 이번 총선에서 호남이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고 열린우리당을 선택한 것은 무슨 뜻일까?호남의 첫 공채 출신 언론인 김승규(전남매일 부회장 역임) 씨의 얘기를 들어보자.“호남이 민주당을 찍지 않은 이유에 대해 피상적으로 얘기하는데 이것은 호남의 진정한 뜻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호남인이 원하는 것은 개혁입니다. 부패의 청산입니다. 그러자면 부패 세력인 한나라당을 바꿔야 하는데 민주당이 그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한·민 탄핵 공조 말입니다. 그래서 호남인들이 분노한 것입니다. 사실 노 대통령이 호남을 홀대하고, 잦은 말실수로 인해 자질문제까지 거론된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만든 대통령인데… 라는 생각에서 달리 선택할 정당도 없다고 보아 열린우리당에 표를 모아준 것입니다.”탄핵 전까지만 해도 호남에서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는 5대 5정도였는데 탄핵 가결 후 열린우리당에 쏠린 게 사실이다.
이에 대해 호남의 수준 높은 정치의식의 결과라면서 호남이 지역구도의 원죄가 있다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는 것과 분당 과정에서 DJ가 철저히 중립을 지킨 것이 부담 없이 그런 판단을 하게 한 배경이었다고 말하는 언론인들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지역주의이긴 마찬가지다. 한나라당과 손을 잡았기 때문에 민주당을 배척했다는 말이다. 우리 서로 솔직히 얘기하자. 그래야 지역주의가 극복된다.잠시 옆길로 샜지만, 민주당의 분당과정을 살펴보면, 그렇게 해서 생긴 갈등의 골을 생각하면, 박관용 의장이 김원기 의원에게 ‘새천년 민주당 사람들이 탄핵을 안 할 줄 알았나’라고 일갈했다는 것이 이해가 간다.결국 탄핵은 민주당의 분당이 뿌리였던 것이다.
엄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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