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최재욱 비서관은 경향신문 사장으로 전격 선임됐다. 그의 나이 46세 때다. 이후 그는 한국언론인금고 이사장, 청와대 대변인, 13·14대 국회의원, 환경부 장관 등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언론사에서 정치부 차장까지만 지낸 청와대 비서관의 중앙언론사 사장 발탁은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파격적인 인사다. 격도 격이지만, 사기업인 언론사 사장 선임이 대통령의 뜻에 따라 이뤄져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그런 시기였다.그로부터 20여년 세월이 흐른 지금은 대통령의 정당한 인사권이라도 여론의 극심한 견제를 받는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기준 교육부총리’ 인사 파동 이후 여러 가지 새로운 인사 실험을 하는 것도 여론의 견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노무현
대통령의 인사 실험은 두 갈래로 진행된다. 하나는 최근 검찰총장과 국세청장 인사 과정을 통해 잘 알려진대로 고위 정무직 공무원에 대한 후보자 사전 공개 방식이다. 정식 임명 절차를 거치기 1주일 전쯤 후보자를 복수로 공개한 뒤 여론의 검증을 거치는 이 방식을 둘러싼 장단점 논란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청와대 일각에서는 공개된 후보자 가운데 배제된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명예훼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고육지책’으로 불리기도 한다. 다른 하나의 방식은 ‘물타기’다. 취임 이후 줄곧 ‘코드인사’, ‘정실인사’ 시비에 휘말렸던 참여정부가 고심끝에 생각해 낸 것으로, 일찌감치 내정자를 언론에 흘려 비판 분위기의 김을 빼 버린다. 지난 2월17일 청와대 홍보수석에 정식 임명된 조기숙 전 이화여대 교수가 대표적인 사례다.조기숙 수석 발탁 사실은 공식 발표가 있기 무려 20일 전쯤에 청와대측이 출입기자들에게 ‘엠바고(일정시점까지 보도제한)’를 걸어 귀띔해줬다.
이병완 전홍보수석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의를 표명한 직후다.정부 인사 내용의 엠바고 기간이 통상적으로 2~3일 정도에 불과한데 비해 조기숙 수석의 경우 그 기간이 길었던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는 청와대 관계자는 없다. 그렇지만 청와대 기자실에서는 “일부 언론을 중심으로 비판여론이 들끓을 것에 대비해 물타기를 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교수 시절 조선·동아 등 보수언론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던 그에게 청와대 언론정책의 책임을 맡길 경우 시비가 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적대적’ 언론사들도 인사 내용을 미리 알게 해 김을 뺐다는 것이다.그렇게 본다면 노무현 대통령 주변의 386세대 가운데 맏형 격인 이호철씨(47)가 2월25일 제도개선비서관 직함을 달고 청와대로 복귀한 것도 마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참여정부 출범 때 청와대 민정비서관을 맡았던 그는 ‘좌(左)희정, 우(右)광재, 중(中)호철’로 불릴 정도로 노무현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다. 그런 그가 청와대에 재입성할 경우 ‘노사모 386’이 다시 청와대를 장악한다는 지적이 일 우려가 있었다. 이 때문에 이호철 비서관이 돌아올 것이란 얘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한 달이 훨씬 넘었고, 그 사이에 기자들의 비판의식은 무뎌졌다.전임자인 김대중 전대통령은 매사에 꼼꼼한 성격 그대로 인사를 하면서도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방식을 선호했다. 발탁하고 싶은 인물을 측근들을 통해 슬쩍 언론에 흘려 여론의 반응을 타진해 보는 식이다. 이때 주로 활용된 매체는 당시 최고의 판매부수를 자랑하던 조선일보였다. 이 때문에 국민의 정부 청와대 기자실에서는 인사 때마다 조선일보에 ‘물 먹은’ 기자들의 불만에 찬 목소리가 나오곤 했다.
DJ
인사의 또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는 ‘온정 인사’를 자주 했다는 점이다. 그 자신이 오랜 야당 생활을 하면서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어려운 시절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준 사람들을 요직에 앉히고 싶어 했다. 당시 개각과 공공기관 임원 인사가 잦았던 점도 그런 이유로 설명될 수 있다.가령, DJ는 2000년 1월 청와대 비서실을 개편하면서 검사 출신인 신광옥씨를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임명했는데, 신씨가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소개한 발탁 배경이 재미 있다.“내가 일선 공안검사 시절 민주화운동을 하던 ‘동교동 사람’들을 많이 취조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해 결코 강압적으로 하지 않았다. 취조실에서 불러내 밥도 사주고… 지금 그 사람들이 청와대에 대거 들어와 있는데 당시 호의를 잊지 못해 나를 대통령에게 추천했다고 하더라.”
YS
그런 DJ와 달리 김영삼 전대통령은 ‘깜짝 인사’를 즐겼다. 문민정부 시절에는 정부 요직 인사가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공식 발표되기 직전까지 대통령을 제외하곤 아무도 내용을 몰랐다고 한다. 다만 몇몇 인사의 경우 당시 위세를 떨쳤던 아들 현철씨가 알았을 것이란 얘기는 있다.그 당시 YS는 참모 등으로부터 이런 저런 사람을 추천받고도 확실한 언질을 하지 않은 채 발표 당일 대변인을 불러 명단을 넘겨줬다. 만일 그 이전에 검토 단계에서 명단이 새 나가면 그 사람을 후보군에서 제외시켜 버릴 정도였다. 실제로 문민정부 시절 정치권의 중진이었던 모씨는 내무장관을 맡아보라는 YS의 말을 듣고 이를 자랑삼아 친한 기자에게 말했다가 신문에 ‘신임 내무장관에 모씨 유력’이란 기사가 나가는 바람에 ‘없던 일’로 돼버린 일화가 있다.YS가 이처럼 인사 비밀을 중요시 한 것은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국가든, 정치집단이든 모든 조직을 운영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란 생각이 분명했다. 이는 “건강은 남에게 빌릴 수 없어도 머리는 빌릴 수 있다”며 매일 아침 조깅을 하는 등 유난히 몸 관리를 했던 그의 생활방식과도 일맥상통한다.
노태우
전대통령은 결코 모나지 않는 인사를 했던 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이런 식의 인사는 노태우 전대통령의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집권초 단행한 3당통합으로 실질적인 여권의 2인자 역할을 했던 YS의 견제 탓도 컸다. YS는 물론 김종필 최고위원의 눈치를 보느라 소신 인사를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TK(대구·경북)’ 출신을 챙기는데는 열성이었다. 당시 국무회의 등 주요 국정회의를 할 때면 그의 동문인 경북고 출신이 보통 4~5명씩이 참석해 동창회를 방불케 했다고 한다.노태우 전대통령과 전두환 전대통령이 TK 출신을 한창 챙길 때는 ‘광어 TK’ ‘도다리 TK’라는 말이 나돌았다. 광어 TK는 그야말로 순수 혈통, 즉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고를 나온 사람이고, 도다리 TK는 경북 출신이거나 대구에서 태어났더라도 경북고를 졸업하지 않은 인물을 지칭했다. TK를 요직에 계속 앉히다 나중에 인재가 모자라자 ‘유사 TK’까지 동원했다는 비아냥인 셈이었다.
박정희
전전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은 ‘분할통치(divide and rule)’로 설명되곤 한다. 절대 권력을 갖고 있었던 까닭에 그에게 잘 보여 ‘2인자’ 자리를 차지하려는 측근들의 암투가 끊이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런 현상을 적절히 활용해 서로간에 경쟁과 견제 관계를 유지하게 했다는 것이다. 집권 초기의 이후락 비서실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말년의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간에 벌어졌던 파워게임이 좋은 예가 된다.그렇지만 박정희 전대통령의 이런 분할통치는 결과적으로 정권은 물론 본인의 목숨마저 파멸시키는 하나의 단초가 됐다. 1979년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가 박정희 전대통령에게 총을 겨누기 직전에 옆에 앉은 김계원 비서실장의 허벅지를 툭 치면서 “각하를 똑바로 모십시오. 각하! 이 따위 버러지 같은 자식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똑바로 되겠습니까?” 하고는 차지철을 쏘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당시 차지철 경호실장은 집무실에 ‘각하를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라고 써 붙여놓을 정도로 충성을 보였고, 이것이 분할통치의 다른 한 축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분석도 나왔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경우 마치 왕이 임명권을 행사하듯 했다는 것이 당시 정부에 몸담았던 인사들의 증언이다.따라서 지금까지 소개한 역대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을 정리해 보면 ‘노무현= 실험형, 김대중= 실사구시형, 김영삼= 독선형, 노태우= 신중형, 전두환= 기분파형, 박정희= 분할통치형, 이승만=궁정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그러나 역대 대통령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인사 스타일의 특징도 있는데, 그것은 출신 고교 동문들을 중용했다는 점이다.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때는 경북고, 김영삼 대통령 때는 경남고, 김대중 대통령 때는 광주일고·목포상고·전주고, 현 노무현 대통령 정부에서는 부산상고 출신들이 권력의 중심에 서 있다.물론 출신 고교뿐만 아니라 지역도 마찬가지다.
역대 어느 정권이나 ‘인사탕평책’, ‘지역별 안배’를 강조했지만 지켜진 것은 거의 없다. 오죽하면 인사 때마다 ‘돌려막기’니 ‘동네 개각’이니 하는 말들이 나올까. 이런 현상이 얼마나 심한지, YS 정부 초기 청와대에 근무하는 비서관과 행정관들 사이에서는 서로 공식 직책 대신 ‘선배’, ‘후배’나 ‘형’, ‘동생’으로 부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 또 DJ의 국민의 정부 시절 한때 청와대 공보수석실에선 수석비서관(오홍근) 외에도 6명의 비서관 가운데 4명이 전주고 선·후배들로 채워진 적도 있었다.또 하나의 공통된 특징은 인사가 너무 자주 있다는 점이다. 문민정부 이후 지금까지 장관의 평균 재임기간이 1년도 채 안된다는 점은 충격적이다. 업무의 연속성은 아예 기대할 수 없고, 고위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이나 눈치보기도 여기서 출발한다.장관의 경우 재임 기간이 5개월을 넘지 못한 사례는 김대중 정부에서 12명, 김영삼 정부에서 19명, 노태우 정부에서 5명, 전두환 정부에서 9명이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단명 장관’이 양산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사전 검증이 철저하지 못했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불과 며칠만에 물러났던 김영삼 대통령 시절의 안동수 법무장관과 박희태 법무장관, 김대중 대통령 시절의 김태정 법무장관과 박양실 보건사회부 장관, 현정부의 이기준 교육부총리 등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대통령의 인사권은 마땅히 존중돼야 한다. 그러나 신성불가침의 영역은 아니다. 잘못된 인사 하나가 국민생활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치는지는 1997년 IMF 사태 등을 거치면서 실감한 바 있다.따라서 대통령이 인사권을 행사할 때는 항상 ‘국민의 뜻’을 염두에 둬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그 부담은 대통령 본인에게로 돌아가곤 했던 게 역사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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