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국회의 탄핵을 받아 직무가 정지됐을 당시 열린우리당 지도부들을 잇달아 청와대로 불러 점심 또는 저녁을 함께하면서 총선 결과를 평가하는 등 정치적 의사를 표명하는 바람에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물론, 역대 다른 대통령들도 청와대 오찬과 만찬을 각계 인사들을 격려하거나, 외국에서 온 귀빈들과 교유하는 데 적절히 활용해 왔다. 또 그런 공식 일정이 아닐 경우 대통령의 식사 자리에는 항상 고위 참모나 측근들이 함께 하며 정국현안과 관련해 깊숙한 이야기들이 오가곤 했다. 우리 대통령들은 식사 자리를 어떻게 통치에 활용했는지, 또 대통령의 식사 습관이나 좋아했던 음식은 무엇인지를 짚어본다.통상 서양에선 정치가 집무실에서 이뤄진다. 특히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격식을 갖춘 파티를 싫어할 뿐 아니라 식탁에서 국정을 논하는 자체를 꺼리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동양권에선 다르다. 중국이나 일본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모든 정치는 밥상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식사정치, 특히 저녁시간의 ‘요정정치’가 아직도 판을 치고 있다. 참여정부들어 요정정치가 상당부분 사라진 것으로 인식되지만 밀실에서 정치적 흥정이 오가는 관행은 여전하다.대부분 정치인들의 하루 일정 가운데는 다른 사람들과의 조찬·오찬·만찬이 줄줄이 잡혀 있다. 심지어 오찬과 만찬을 여기 저기 옮겨 다니며 2차, 3차씩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는 어떤 일을 긴밀하게 논의할 때 “사무실에서 만나자”는 말 보다는 “식사나 한 번 하자”는 말이 더 친근감 있게 다가오는 독특한 문화 때문이다.
청와대 공식행사는 영빈관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식탁이 마련되는 곳은 영빈관·상춘재·녹지원·관저 등이다. 물론 간혹 공개적으로 외부 행사에 참석해 식사를 하게 되거나 혹은 청와대에 들어오기 전 자주 가던 단골 음식점에서 비밀리에 ‘외식’을 하면서 입맛을 되찾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식사는 청와대에서 하게 된다.영빈관은 대규모회의와 외국 국빈들을 위한 공식행사를 개최하는 곳으로 특히 외국의 국가원수나 총리급이 방문했을 때 민속공연과 만찬 등이 이곳에서 베풀어진다. 또 100명 이상 대규모 회의 및 연회를 위한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는데 2층에도 1층과 똑같은 홀이 있다. 주로 1층은 접견장으로, 2층은 만찬장으로 이용한다.
상춘재는 전통미를 간직한 한식 가옥으로 외빈접견, 또는 비공식회의 등에 사용된다. 지난 6월20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방한했을 때 만찬회담을 가진 곳이다. 통상적으로 국가원수들의 만찬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덕담이 오가기 마련이지만 고이즈미 총리와의 당시 만찬은 과거사 문제 등을 둘러싼 한·일 양국의 외교마찰 때문에 그 흔한 건배 제의조차 없이 냉랭하게 진행됐다는 후일담이다.이와 함께 상춘재에선 대통령과 핵심 측근들의 비밀회의를 겸한 모임이 열리곤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최후의 만찬을 한 10·26 이후 안가를 모두 없애버려 대통령이 마음놓고 술 한잔 기울일 장소가 없던 차에 1983년에 상춘재가 준공돼 안가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녹지원은 청와대 경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외 잔디밭이다. 어린이날 행사 등이 열리는 곳이다. 국내외 귀빈 및 외교사절단을 위한 다과회나 오찬·만찬 등 야외 행사장으로도 사용된다. 대통령이나 비서실장이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초청해 식사를 함께 하는 곳도 영빈관(실내)과 녹지원(실외)이다.대통령이 업무 외 시간에 머무는 관저에서의 식사는 주로 가족들과 하게 된다. 출가해 청와대 밖에서 사는 아들·딸이나 손자·손녀들을 불러 식사를 할 때는 일반가정 처럼 ‘집’에서 하는 셈이다.
대통령 음식 경호실 검식
대통령이 먹는 음식은 청와대 전속 요리사가 만든다. 테이블 서비스는 인원이 적을 경우 청와대에 전속된 웨이터와 웨이트리스가 하게 되지만 수십명 이상의 단체 식사일 때는 국내 특급 호텔에서 잘 훈련된 직원들이 출장을 나온다.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공식행사의 경우 대게 양식 또는 중식 세트메뉴가 제공되는데 대통령이 착석한 헤드테이블만 전담하는 웨이터와 웨이트리스가 따로 있다. 특히 대통령의 접시에 음식을 직접 놓아주는 ‘웨이터’는 경호실 소속 직원으로 알려져 있다.옛날에 임금이 먹을 음식에 독이 있는지를 점검하는 소임을 맡은 ‘기미상궁(氣味尙宮)’이 있었듯이 대통령이 먹을 음식은 경호실에서 먼저 검식을 한다. 청와대 안에서 뿐 아니라 국내에서 외식을 하거나 해외 방문 때도 대통령의 음식은 경호 대상이다. 대규모 행사 때 경호실 직원들이 행사장 밖에 쭉 늘어서서 웨이터들이 들고 있는 음식을 맛보는(?) 광경이 연출된다.
만일 실제로 독이 들어 있다면 그 경호원은 대통령을 대신해서 죽게 되는 셈이다.또 청와대 직원들이 외부에서 자장면이나 피자 같은 음식을 배달시켜 먹을 수도 있는데, 이 경우 모든 음식은 면회실에 설치된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지난 2002년에 청와대 식당에 근무했던 직원이 ‘청와대 사람들은 무얼 먹을까’란 책을 펴내자 당시 청와대측은 ‘기강해이’와 ‘비밀누설’ 책임을 물어 사표를 받은 바 있다.노무현 대통령 앞의 역대 대통령과 부인들이 즐겼던 음식에 대해선 이 책에 소상히 소개돼 있다. 다음은 이 책에 소개된 내용과 필자가 곁에서 직접 확인한 내용, 또는 청와대에 근무했던 사람들에게서 전해들은 노무현 대통령 및 역대 대통령들의 식성이다.
DJ 고령에도 식욕 왕성
노무현 대통령은 특별히 가리는 음식이 없고 무엇이든 잘 먹지만 과식은 스스로 삼가는 스타일이다. 보양식으로는 삼계탕을 즐긴다. 정치인 시절 서울 효자동의 대규모 삼계탕집 ‘토속촌’을 단골로 다녔고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청와대와 가까운 그 집에서 삼계탕을 배달시켜 먹기도 한다. 또 잡곡밥에 된장·미역·북어·사골곰국·채소로 만든 담백한 나물류와 국물김치를 좋아한다. 식성이 서민적이다 보니 청와대의 공식 오찬이나 만찬에 나오는 ‘호텔식 음식’은 별로 입에 맞지 않다고 주변 참모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식사 때 반주는 그다지 즐기지 않으며, 꼭 필요할 경우 포도주를 준비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고령이었음에도 불구,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식욕이 왕성했다. 대식가이자 미식가인 그는 3끼 식사를 마치면 꼭 후식을 먹는데 계란말이·생선·나물류 등으로 아침식사를 한 뒤 먹는 후식이 찐 호박과 삶은 밤·떡·고구마·감자 등이었다.
한 때는 야식으로 라면도 즐겼지만 이희호 여사의 권유로 다이어트를 하면서 자제했다. 또 옥수수를 매우 좋아해 1년 내내 냉동실에 보관해 놓고 ‘상복’하다시피 했다. 여의도에서 생활하던 야당 정치인 시절 DJ는 바닷가 마을 출신답게 해물 요리, 그 중에서도 해물탕을 즐겨 단골집을 정해놓고 먹었다. 청와대 생활 중에도 몇차례 경호원만 대동하고 그 집을 몰래 들렀다고 한다.이휘호 여사는 ‘뻥튀기 마니아’다. 청와대 시절에도 제2부속실 여직원을 시켜 손수레에서 파는 노란 곱창 뻥튀기 과자를 사와 먹기도 했다.김영삼 전 대통령의 ‘청와대 칼국수’는 유명하다. 재임 기간 중 단 한 푼의 정치자금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청와대의 공식 식탁에 칼국수 한 그릇과 떡 한 조각을 덜렁 올렸다. 이 때문에 당시 청와대 오찬이나 만찬에 초대받아 갔던 사람들은 엄숙한 표정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칼국수를 먹어야 했다. 문민정부 시절 자주 청와대에 들어갔던 한 정치인의 회상이다. “보통 오찬은 1시간, 만찬은 2시간 가량 잡히는데 칼국수 한 그릇 먹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는가. 불과 10분 이내에 뚝딱 해치우고 나면 앞에 아무 것도 없이 물컵만 만지작거리며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한 인사는 또 이런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그 때 청와대에서 나오는 칼국수는 양도 무척 적었다.
그래서 대통령과 같이 오찬이나 만찬을 한 사람들이 청와대에서 나오자 마자 인근 식당으로 달려 가 식사를 또 하는 모습을 숱하게 목격했다.”보릿고개를 없앤 박정희 대통령은 저녁을 먹으면서 항상 막걸리를 반주로 삼았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가 생존해 있을 시절엔 술을 마시더라도 안가를 잘 이용하지 않고 청와대 식당에서 참모들과 어울려 회식을 하곤 했는데. 그 때마다 술은 주로 원당에서 가져온 막걸리였다. 유신시절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씨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썼다. “박 대통령에게 막걸리는 술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농촌에서 자란 박 대통령은 막걸리가 단순한 술이 아니라 허기를 달래주는 음식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농촌을 잊지 못하는 박 대통령은 운명적으로 막걸리를 놓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박 대통령이 시해당한 궁정동 만찬장에는 시바스리갈이라는 양주가 있었다. 그렇게 양주를 마시는 술자리는 청와대내에서는 별로 없었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박 대통령의 마지막 나날인 1979년에 들어서였던 것 같다.” 그런 박정희 대통령은 야식으로 라면을 먹곤 했는데, 당시 정부는 분식장려 정책을 펴고 있던 터여서 청와대는 은근히 ‘라면 먹는 대통령’을 홍보했었다.
청와대 직원들 식사 평범
그렇다면 대통령 외에 청와대 사람들은 식사를 어떻게 해결할까. 얼핏 매우 화려한 식사를 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대게는 비서동과 경호동, 기자들이 머무는 춘추관 등에 있는 2천원짜리 구내식당을 이용한다. 청와대의 업무라는 것이 워낙 빡빡하기 때문에 특별한 약속이 아니면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오후들어 출출할 때도 앞서 소개한 것처럼 외부에서 간식을 배달시켜 먹곤 한다.또 외식 약속이 있어 나가더라도 수제비집이나 보리밥집 같은 서민적인 식당을 애용한다. 어차피 청와대 인근인 삼청동이나 효자동엔 맛으로 알려진 식당은 많아도 고급 음식점은 드물기도 하다.한편, 대통령은 지방을 방문하면 대개의 경우 그 지방 유지들을 모아 점심을 하면서 간담회를 갖는다. 해당 지역에서는 대통령 방문 일정이 잡히면 보통 100명~200명 정도의 오찬 참석 ‘유지’를 고르느라 분주해지는데, 이 때 그 자리에 끼이기 위해 치열한 로비가 벌어지기도 한다. 간혹 대통령이 지방에서 하룻밤 머물 경우 만찬까지 이어지는데 통상적으로 만찬 참석자는 많아야 수십명이기 때문에 지방 유지들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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