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선명한 ‘국가관’과 이외에 이 시장과 손 지사의 경쟁력이라 할 수 있는 ‘행정능력’은 검증도 받지 못한 상태이다. 그렇다고 박 대표에게 시간이 주어진 것도 아니다. 당권·대권의 분리 원칙에 의해 오는 6월18일 이전 대표최고위원직을 내놓아야 한다. 또한 지방선거 직후 정치권은 빠른 속도로 대선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박근혜에 뭔가 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이다.
지난 10일 박 대표의 깜짝 발언이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내달 16일 당대표직에서 물러나겠다는 것. 사실상의 대권 도전 선언이라는 게 정치권의 공통된 견해이다. 또 야당의 유력 대권주자 중 제일 먼저 대권 출마를 시사한 셈이다.
야당의 대표, ‘차기 대통령감’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상위를 기록하고 있는 박 대표이기에 대권 도전 선언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탄핵 후폭풍’으로 난파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을 구했고, 선거마다 압승을 이끌어온 박 대표이다. 벌써부터 ‘한나라당 대세’로 기운 지방선거 승리 여세를 몰아 대선 국면으로 이어가겠다는 구상도 엿보인다. 하지만 박 대표의 최근 행보를 더듬어 보면 계산된 발언이라는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
아울러 ‘자신감’까지 묻어난다는 관측도 높다. 6월30일 임기를 마치고 중앙당에 복귀할 이 시장을 내칠 ‘비책’이 있는 게 아니냐는 것.
오세훈 효과에 대권구도 변화
한나라당 안팎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박 대표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의혹’은 더욱 짙어지고 있다. 한나라당 대세로 굳은 지방선거 국면, 당력은 선거가 아닌 대표최고위원과 최고위원 선출에 모아지고 있으며, 마음은 벌써 7월 전당대회에 닿아 있다. 한 마디로 너나할 것 없이 차기 지도부를 노린다는 것. 박 대표를 위협하는 외부변수는 뜻하지 않게 ‘오세훈’이다. 바로 ‘변화’의 가능성. 오풍(吳風)은 차기 서울시장 구도를 단번에 뒤엎은 직후, 당내 세력구도까지 재편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소장개혁파를 중심으로 한 중도개혁세력이 도약하고 있으며, 각 계파는 7월 전대 독자후보 추대를 구상하고 있다. 초선의원들 역시 출마 여부를 담금질하고 있다. 게다가 친박근혜냐 친이명박이냐의 갈림길에서 중립을 지키고 있는 제세력 중 전대가 박근혜 vs 이명박 대리전으로 치러지는 것에 반대하는 세력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오세훈 후보가 던진 변화의 상징과 충격을 7월 전대까지 이어간다는 시나리오는 대세로 굳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더 나아가 ‘개혁’과 ‘변화’를 표방한 중도세력이 전대에서 승기를 잡는다면 대선구도까지 파장이 미칠 것이라는 관측도 높다. ‘빅2’로 전개돼 온 박근혜 vs 이명박의 구도가 깨진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개혁과 변화의 상징성을 갖는 제3의 주자에 당력이 쏠릴 것이라는 예측이다.
이명박 지지층 손학규 쪽 이동중
박 대표의 비책은 이 대목에서 감지된다. 손학규 경기도지사의 상승세와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손 지사의 지지도는 아직 이 시장과 박 대표 등 앞선 주자에 미치지 못하고 있지만, 뚜렷한 상승 포인트를 찍었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5월 초 한 언론사가 실시한 ‘한나라당 주자군 평가’ 여론조사에서 손 지사는 지난달에 비해 2.9%P 오른 12.5%로 나타났다.
물론 이 시장의 37.3%, 박 대표의 29.3%와는 격차가 크다. 그러나 여당을 포함한 주자군 중에서 손 지사는 3.5%를 얻어 ‘마의 3% 벽’을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손 지사측 역시 변화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손 지사의 한 측근은 “‘테니스 파문’으로 주춤거리고 있는 이명박 시장, 사학법 투쟁의 여진이 남아 있는 박근혜 대표로 인한 반사이익과 성공적인 결과물인 ‘영어마을’ 효과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여론조사의 경우 변수 등장과 반영 사이에 시간이 필요하므로, 최근 여론조사 결과는 ‘오세훈 효과’와 무관하다”고 덧붙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 지사의 상승세가 지속될 것이라는 얘기다. 정치권의 해석은 손 지사측의 진단보다 기대치가 높다. 상승세를 타고 있는 손 지사가 ‘뜰’ 경우, 선명한 ‘국가관’으로 무장한 박 대표의 지지층이 이동할 경우의 수는 극히 적다는 게 중론이다.
국정운영의 자질면에서 이 시장과 손 지사가 검증받은 ‘추진력’과 ‘행정능력’이 겹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시장에 비해 손 지사가 압도적으로 앞서고 있는 ‘도덕성’은 박 대표도 이미 검증받은 부분이다.손 지사가 ‘빅3’에 진입할 수 있도록 무관심으로 대응하며 장벽을 낮춰준 모양새다. 이같은 박 대표의 계산된 행보는 지방선거 국면에 접어드는 단계에서부터 이미 시작됐다는 게 정설이다.
한나라당 관계자들은 잦은 ‘돈공천’ 파문이 번지는 가운데 차기 대표최고위원직을 두고 박 대표와 물밑조율 중에 있었던 김덕룡 의원이 같은 혐의로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을 때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소속 단체장 경선이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당내 주자들의 네거티브 선거전이나 박 대표가 물밑지원한 후보가 정리되는 상황에서도 초연함을 보여주었으며, 대선 경선의 승부처라 할 수 있는 서울-경기로 이어지는 수도권 광역단체장 후보와 관련 수요정치모임, 국가발전전략연구회 등 반박근혜 세력에서 주도한 교통정리도 뒷짐 지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김문수-오세훈 비밀리 접촉
사전에 준비된 비책이 가동되고 있지 않다면, 결코 초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내 일각에선 박 대표가 김문수-오세훈 구도를 원했던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내놓는다. 역설적으로 향후 대선 경선에서 ‘박근혜 필패론’을 주장할 소장개혁파에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지만, 이들은 분명 사태 추이를 관망하다 ‘선택’의 시점, 이명박 또는 손학규로 양분될 세력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황은 광역단체장 경선을 전후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수 개월 전 차기 경기도지사를 염두에 두고 비공식적 잠행 세몰이에 나선 김문수 후보와 박 대표의 비밀 접촉은 이미 알려진 바다. 또한 오 후보의 경선 참여를 두고 긴박했던 시점, 박 대표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서울시장 후보 ‘제3의 카드’가 ‘오세훈’이라는 얘기는 한나라당 사무총장실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대선 경선,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대권 유력주자들이 광역단체장에 자기 사람을 심기 위한 물밑 신경전에서 박 대표 역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는 결론이다. 박 대표와의 물밑 협상에 나선 이들이 적어도 대선 경선 국면에서 대척점에 서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높다.
개헌론 선점해 반박세력 견제
그렇다고 박 대표가 소장개혁파 및 제세력의 난립을 언제까지 방관하고 있을 것인지도 미지수이다. 박 대표는 대권 출사표를 던지기 직전 “각 정당이 개헌안을 잘 만들어서 대선 공약으로 심판을 받은 뒤 다음 총선이 끝난 다음에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애초 정·부통령제라는 권력구조 개편안에 관심을 보이던 박 대표이기에 해석도 다양하지만, 지방선거 직후 올 하반기부터 가시화할지 모를 정개개편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개헌론에 쐐기를 박은 것이라는 평가가 압도적이다.
개헌론으로 정개개편 및 대선국면을 주도할 여당의 이슈선점 기회를 뺏은 것임과 동시에, 반박세력을 중심으로 한 한나라당 개헌론자들에 대한 박 대표의 마지막 경고라는 얘기다. 대선 국면, 여야를 막론하고 세가 약한 진영은 언제나 ‘개헌 카드’를 들고 나왔던 게 한국 정치사의 관행이다. 한편, 이 시장측의 개헌에 대한 입장은 이렇다. 친이명박계 인사인 이재오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지난 4월 개헌논의의 공론화 시점과 관련, “선거법이든, 헌법이든 고치려면 내년 대선에서 정당이나 후보가 대선공약으로 내걸고 국민심판을 받은 다음에 논의하는 게 옳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이 대표의 발언은 개헌에 있어 이 시장과 입장을 같이해 논란을 빚은 바 있다. 그럼에도 박 대표는 한나라당 유력 대권주자로서 공식적으로 개헌에 대한 입장을 천명함과 동시에 이 시장의 의견을 반복한 셈이다. 6월16일까지 박 대표가 대표 프리미엄을 최대한 활용해 ‘이명박 옥죄기’를 시도할 것이라는 움직임이 감지되는 대목이다. 당내 일각에선 김덕룡 의원의 불명예로 인해 차기 대표최고위원 유력 후보로 떠오른 이재오 대표를 견제하기 위해 박 대표가 선택할 새로운 카드에 대한 설들이 무성하다.
이금미 nicky@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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