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국무회의가 끝난 뒤 청와대가 브리핑한 노 대통령의 연정 관련 발언은 “이번 정기국회는 중요하므로 장관들이 정기국회에 집중해달라”고 주문하면서 “(나도) 정기국회 때는 그런 (연정) 얘기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게 전부다.청와대가 대통령의 발언을 소개하면서 논란이 될 수 있는 민감한 말을 생략했다가 나중에 후일담으로 밝져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과거 정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역대 정권별로 차이가 있었다면 대통령이 회의를 주재하는 스타일이다. 매우 신중하게 할 말만 하는 대통령이 있었고, 참석자들이 지루할 정도로 말을 많이 하는 대통령도 있었다. 또 회의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이끄는 대통령이 있었는가 하면, 공포 분위기로 몰고 가는 대통령도 없지 않았다.
대통령 각종 회의주재
대통령의 국정운영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각종 회의 주재다. 공식회의도 있고, 참모들과의 비공개 구수회의나 비밀 전략회의도 있다. 공식회의만 해도 각료들이 참석하는 국무회의, 청와대 참모들이 모이는 수석·보좌관회의에서부터 국정과제회의, 국가에너지자문회의 등등 수없이 많다.청와대 출입기자들이 ‘풀’(몇 사람이 대표로 취재해 기사를 공유하는 것)제를 운영하면서 공식회의를 취재하지만 실제로 회의에서 오간 말 중에는 보도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기자가 회의에 들어가도 대통령의 모두 인사말 등 이른바 ‘행사 오프닝’만 취재하고 퇴장하기 때문이다. 이후 오간 말은 대변인이나 부대변인이 기록하므로 실제 기자실에서 브리핑할 때는 취사선택된 내용만 나온다. 그런 가운데서도 뒷얘기 형식으로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 분위기는 곧잘 전해진다.
노 대통령 회의 분위기 리드
현직인 노무현 대통령은 각종 회의 분위기를 자유롭게 이끄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야당 정치인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으로, 대통령 취임 후에도 초반에는 회의 도중 참모들과 맞담배를 피우기까지 했다고 한다. ‘엽기 수석’으로 통했던 유인태 전 정무수석은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에 참석해서도 꾸벅꾸벅 조는 일이 다반사였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최근 청와대를 떠난 한 전직 고위 인사는 최근 한 사석에서 자신의 재임 중 대통령과 격의 없이 만났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정례보고 형식으로, 시간을 정해 보고 하는 식으로 하지 않았다. 대통령께서 그런 점에서 편하게 해 주셨다. 현안이 생기거나 보고할 일이 생기거나 하면 전화를 돌려 ‘30분 정도 시간 좀 내주세요’해서 집무실로 올라가서 보고하고, 수시로 일이 있으면 뵙는 식이었다.
수석보좌관회의나 국무회의 때도 별 제약없이 미리 만나 얘기하다가 함께 회의장으로 가곤했다.”그렇지만 노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가 느슨하게 풀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TV로 전국에 생중계되는 ‘국민과의 대화’나 정식 기자간담회에서조차 얼굴을 붉히기도 하는 평소 스타일대로 국무회의나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참석자들을 몰아세우기 일쑤다.특히 매월 마지막 주 노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국무회의는 각료들 사이에서 ‘공포의 회의’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살얼음판 같은 긴장감이 감도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가령 장관이 보고를 하면서 직원들이 써 준 것을 그대로 읽으면 “장관은 도대체 뭐하러 있느냐. 장관이라면 직원들보다 더 전문성을 갖추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책이 쏟아진다고 한다.컴퓨터로 인터넷을 즐기는 노 대통령은 각종 회의 주재에 앞서 참모들로부터 구체적인 사안을 미리 보고 받는 것은 물론, 인터넷을 통해 관련 사안을 검색하고 네티즌들의 여론까지 파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참여정부들어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 등 주요 참모회의 좌석배치가 바뀌었는데, 이는 노 대통령이 허리가 불편한 것을 고려한 조치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국민의 정부 시절까지 청와대 참모회의장은 대통령이 긴 직사각형 테이블의 넓은 쪽 중앙에 앉고, 비서실장과 수석 및 보좌관들이 서열에 따라 대통령 옆쪽으로 앉았다. 그러나 노 대통령 취임 후 얼마되지 않아 대통령이 테이블의 좁은 쪽 중앙에 않고, 다른 참석자들이 두 줄로 배석하게 했다.
DJ, 유머로 분위기 주도
이는 종전의 좌석배치로는 대통령이 회의 도중 좌우로 참모진을 둘러봐야 하기 때문에 허리게 무리가 간다는 주치의의 권유에 따른 것으로, 노 대통령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한 눈에 참모들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취임 직전 레이저를 이용한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은 바 있다.국민의 정부 시절 김대중 대통령은 항상 근엄한 표정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실제로 DJ는 상황에 걸맞는 유머를 곧잘 한다. 각종 회의 석상에서도 이런 성격은 그대로 이어져 일단 토론이 붙을 때는 상대방이 꼼짝 못할 정도로 몰아붙이지만, 분위기가 너무 굳어졌다 싶으면 한 두마디 농담으로 긴장을 풀게 하곤 했다.
국민의 정부 때 고위 참모를 지낸 한 인사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나는 청와대에 입성하면서 술과 담배를 끊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아침 구수회의 때 대통령 면전에서 보고하는 경우가 많은데, 술 냄새나 담배 냄새가 날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는 박지원 공보수석(대변인)이 술 냄새를 잔뜩 풍기며 아침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장에 술 냄새가 진동할 정도여서 모두가 눈살을 찌푸리며 대통령의 눈치를 살폈다. 그 때 대통령이 한마디 했다. ‘대변인이 어젯 밤 열심히 일한 모양이군. 대변인은 기자들과 밤 늦도록 함께 술도 먹어주고 해야 돼요.’ 일순간에 긴장이 풀렸다.”그렇지만 “DJ의 박식함이 언로를 가로 막았다”는 평가를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다. 정치뿐 아니라 경제·외교·사회·문화 분야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DJ는 회의 도중 참석자들의 보고 가운데 오류가 발견되면 그 자리에서 크게 질책을 했다. 또 특정 현안을 놓고 의견을 개진해 보라고 시켰다가 그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면박을 주곤 했다.
그러자 주눅이 든 회의 참석자들이 가급적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거나 자기의 소신을 개진하길 꺼리는 바람에 각종 회의가 ‘대통령 독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문민정부 청와대 회의에 참석했던 공식 라인 석상의 참모들은 역할이 별로 없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직관과 결단’에 의해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물론 사소한 정책들은 참모회의와 국무회의 등을 통해 처리했다. YS는 이런 회의를 주재하면서 많은 간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대신 금융실명제를 전격적으로 도입하고, 공직자 재산등록을 추진하는 등의 과정에선 청와대의 공식회의를 거의 활용하지 않았다. 아들 현철씨와 이원종 정무수석 등 극소수 측근들과만 상의했기 때문에 심지어 해당 수석비서관까지 발표 직전까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전두환, 특유의 카리스마 장악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같은 군 출신이지만 회의 주재 방식은 전혀 달랐다. 먼저 전두환 전 대통령은 특유의 카리스마와 달변으로 회의 분위기를 장악했다. 특히 참모회의나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기분이 좋아지면 걸쭉한 입심으로 과거의 무용담을 길게 풀어놓기도 했다. 반면 노태우 전 대통령은 말하기 보다 듣기를 즐기는 스타일이었다.앞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각종 회의 때 참석자들을 독려해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고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사람들은 전한다. 즉 어떤 현안을 놓고 참석자들이 쭉 돌아가면서 의견을 개진하게 한 뒤, 마지막에 결론을 내리는 데 항상 누구나 수긍할 만한 결론이었다고 한다. 물론, 박 대통령의 권위에 눌려 다른 참석자들이 감히 소신을 피력하지 못했기 때문이란 반론도 있다.한편, 그 시절에는 매월 열리는 ‘수출진흥확대회의’ 같은 개발전략회의가 대통령이 주재하는 가장 중요한 회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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