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청와대는 당시의 통역 메뉴얼을 다시 꺼내들고 VIP를 맞을 채비에 분주하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통역은 어떤 사람들이 맡을까. 또 그들에게는 어떤 애환이 있을까. 대통령 통역들의 세계로 들어가 본다.역대 대통령 가운데 영어를 가장 능통하게 구사한 인물은 초대 이승만 대통령, 그 다음은 최규하 대통령이었다는 것은 이 난에서 설명한 바 있다. 또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어를 자유롭게 사용했다는 내용도 소개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통령이 특정국가 원수들과 대화를 나눌 때 아무리 그 나라 말에 능통해도 통역은 반드시 배석한다. 대한민국의 통치권자가 외국어를 할 줄 안다고 해서 한국어를 버리고 그 나라 말을 사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영어를 잘 하는 프랑스 대통령도 미국 대통령과 대화할 때는 통역을 두고 프랑스 말을 한다.
노무현과 다케시마 위기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0월21일 인터넷 매체인 ‘데일리 서프라이즈’ 창간 1주년 기념 서면인터뷰에서 각종 정상회담의 뒷얘기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줬다. “처음에는 언어 문제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하고 정말 초긴장 상태에서 외교무대에 나섰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내가 걱정한 게 아니었다.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 간에는 결국 대화의 핵심적인 주제에 대한 입장이 중요했지 영어를 잘하는 것과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 통역이 하도 똑똑해서 내 한국말보다 더 잘 다듬어지고 품위 있는 영어를 구사했다. 내가 한국사람들과 말할 때보다 오히려 위험부담이 적다.”현재 노 대통령의 통역은 이태식 주미대사의 아들이자 서울대 외교학과 후배가 되는 청와대 이성환 제1부속실 행정관이 맡고 있다. 이 행정관의 원래 소속부서는 외교통상부이며, 직책은 외무관이다.
청와대에 파견근무를 하고 있는 것이다.노 대통령의 다른 언어 통역들도 모두 외교통상부 직원이다. 영어 외에 일본어·중국어·프랑스어·스페인어·러시아어·아랍어 등 이른바 ‘7대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통역자가 외교통상부 소속으로 확보돼 있다. 다만 7대 언어 이외 국가와의 정상회담 일정이 잡히면 A급 민간 통역전문가 가운데서 한 사람을 고른다. 물론 외교부 직원과 달리 민간 통역자에게는 상당한 보수를 지급해야 한다.기자 입장에서 볼 때 대통령의 통역은 상당히 중요한 취재원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민감한 사안을 놓고 특정국의 정상과 단독회담을 할 때 어느 누구도 접근을 못하지만 통역만은 예외다.하지만 아직까지 대통령의 통역을 취재원으로 한 특종은 단 한 건도 없었다. 그들은 직업의식으로 똘똘 뭉쳐 입이 무거운 데다, 대통령의 통역자로 결정되면 “정상 간 대화를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는 ‘보안각서’를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두환과 북한 국가 사건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대통령의 통역이 느끼는 긴장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단어 하나를 잘 못 전달해 정상들의 심기를 상하게 하거나, 심할 경우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런 점 때문에 통역자가 대통령의 사소한 실언을 바로잡는 역할까지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지난 2004년 7월 제주도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한·일 정상회담에서 발생한 일이 대표적이다. 노 대통령은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명)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일본 기자의 질문에 순간적으로 “다케시마 문제는…”하고 말을 시작했다. 한국 대통령이 ‘독도’가 아닌 ‘다케시마’라고 지칭한 자체가 비난을 받을 일이었다.
순간 현장에 있던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노 대통령이 또다시 말과 관련한 구설수에 오르겠구나”하고 생각했다.그런데 다행히 한국측 통역이 이를 “독도 몬다이와(독도 문제는)…”로 바로잡는 기지를 발휘해 큰 문제로는 비화되지 않았다. 오래 전 전두환 대통령이 아프리카 가봉을 방문했을 때도 통역자의 재치로 분위기를 풀었던 일이 있었다.당시 전 대통령이 도착한 공항 영접행사에서 가봉측 군악대가 애국가가 아닌 북한 국가를 연주하는 바람에 전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측 수행원들이 격노했다. 당장 방문을 중단하고 떠나자는 의견이 주류을 이뤘지만, 일단 가봉의 봉고 대통령의 사과 수준을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그러나 그날 만찬장에서 봉고 대통령은 프랑스어로 “매우 심심한 사과를 드리며…”라는 의례적인 사과말만 했다. 그러자 프랑스어 통역을 맡았던 외무부 직원이 이를 “백배 사죄 드리며…”로 통역했다. 프랑스어에 ‘백배 사죄’라는 표현이 있을 리 없지만 어쨌든 전 대통령의 노기가 가라앉았다고 한다. 대통령의 통역을 하다 국회의원까지 된 인물도 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통역관(공식 직책은 해외공보비서관)을 맡았던 한나라당 박진 의원이다. 청와대에 오래 근무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박진 통역관을 ‘역대 최고의 대통령 통역’으로 꼽기도 한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한국에 온 메이저 영국 수상이 김 대통령과 회담 도중 동석했던 자신의 각료와 메모지를 주고받으면서 킥킥 거리는 결례를 범한 적이 있다. 문제가 되자 나중에 만찬 석상에서 영국대사가 사과를 하며 설명한 내용은 이랬다.메이저 수상은 “That guy’s(박진 통역관을 의미) English out-Britishes the British. I wish you would learn his English”라고 썼다. 즉, “통역하는 저 친구의 영어는 영국인의 영어를 능가한다. 당신들 각료들도 저 친구에게 영어를 좀 배워야 되겠다”는 것이다. 그 메모를 본 각료는 웃으며 다시 거기에 “because he learned English in the UK”라고 적었다. 즉 “그거야 그가 영국에서 영어를 배웠기 때문이죠”라는 것이다. 박진 의원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따고 뉴캐슬 대학 정치학과 조교수를 지냈다.박진 통역관의 이런 영어 실력에다 타고난 순발력은 YS의 좌충우돌식 언행을 적당히 커버함으로써 빛을 발했다. 따라서 YS와 박진 통역관이 등장하는 수많은 일화가 청와대 주변에 남아 있다.
가장 압권은 YS의 ‘대도무문’
가장 압권은 YS가 휘호로 즐겨 쓴 ‘大道無門(대도무문·정도를 걸으면 거리낄 것이 없다)’을 통역한 일이다.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이 휘호를 선물 받고 무슨 뜻이냐고 묻자 처음엔 “A freeway has no tollgate(고속도로에는 요금정산소가 없다)”라고 말했다. 위트였다. 클린턴이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갸우뚱하자 정색을 하고 “Righteousness overcomes all obstacles(정의로움은 모든 장애물을 극복한다)”라고 했다.또 다른 자리에서 YS가 외국 정상에게 “먼 길에 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라고 하자 이를 “ Thank you for coming all the way to Korea”로 재치 있게 바꿨다.물론 대통령의 통역들은 남들이 상상하기도 어려운 경험을 많이 할 수 있다. 대통령과 함께 영국 왕실의 황금마차를 탄다든지, 한미 정상 간에 오가는 긴밀한 대화를 직접 듣는다든지 하는 일 등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의 통역자들이 ‘잘 해야 본전’이란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그만큼 고달픈 직업 같다.통역은 또 결코 대통령보다 튀어선 안되는 그림자로만 머물러야 하기 때문에 너무 잘 생겨도 안되고, 키가 커서도 안된다고 한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