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노 대통령의 여당 탈당 카드는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휴화산’이란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그렇다면 역대 대통령들은 여당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을까. 대통령과 여당의 관계를 살펴보면 그 당시의 정치상황이 한 눈에 들어 온다. 지난 11일 만찬에서는 정세균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유시민 의원의 입각에 대한 당측의 불만이 제기되는 과정에서 노 대통령의 ‘탈당론’이 나온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일부 참석자가 “정 전의장에 대한 내각 ‘징발’을 놓고 당의 불만이 많다. 또 당이 그렇게 반대했는데도 유 의원 입각을 밀어붙인 것은 청와대가 당을 무시한 것 아니냐”는 등의 말을 했다.
노 대통령 탈당론 꺼내
그러자 노 대통령이 굳은 표정으로 ‘내각 문제는 대통령의 고유권한으로, 당에서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뒤 탈당론을 꺼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고부간 아무리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가까이 있으면 감정만 악화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땐 차라리 떨어져 사는 게 낮지 않느냐”는 말이 나왔다.이후 정치권에서는 노 대통령이 탈당 후 이해찬 국무총리, 유시민 장관 내정자와 손을 잡고 정계개편을 시도할 것이란 시나리오들이 나돌고 있다.사실 노 대통령은 이미 현직 대통령으로서 한 차례 여당을 탈당한 경험을 갖고 있다. 열린우리당이 민주당에서 분리해 나오는 과정에서 취임 7개월만인 2003년 9월 당시 여당이던 민주당을 탈당한 것이다.노 대통령은 2004년 5월 여당으로 출범한 열린우리당에 입당함으로써 다시 여당 당적을 갖게 됐다.
당직은 갖지 않은 평당원이지만 농담삼아 ‘수석당원’으로 불린다. 노 대통령은 철저한 당정분리론자이며 “나도 당의 일에 간섭하지 않을테니 당도 나에게 간섭하지 말라”는 지론을 갖고 있다.1987년 개헌으로 5년 단임 대통령제가 도입된 뒤 노무현 대통령 전 까지 세 명의 대통령(노태우·김영삼·김대중)도 모두 재임 기간에 탈당해 당적을 버린 바 있다.그러나 이들과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는 다르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국 구도 변화를 이유로 자신의 필요에 의해 임기 초반에 여당을 떠났었고, 지금 거론되는 탈당론도 정계개편을 전제로 나돌고 있다. 반면, 세 명의 전직 대통령은 모두 임기 말 당적을 버렸는데 대개는 좋지 못한 일 때문에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즉 대통령 주변의 비리 의혹, 지지도 급락, 여권 대선후보와의 갈등, 야당의 요구 등에 따른 경우였다.
DJ 아들 문제로 탈당
전임인 김대중 대통령은 2002년 5월6일 세 아들이 각종 비리 의혹 사건에 연루돼 물의를 빚자 국민 앞에 사과하고 자신이 만들었던 민주당을 떠났다.당시 청와대 내부에서는 DJ가 아들의 비리 문제로 여당인 민주당의 노무현 대선후보에게 피해가 돌아갈 것을 우려해 탈당을 감행했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DJ 시절까지만 해도 청와대는 여당 보다 확실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3~4선의 중진국회의원들도 청와대 비서관급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사례가 비일비재했다.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이회창 후보와의 갈등 때문에 탈당했다. 이회창 후보가 그해 10월22일 기자회견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여당 탈당을 공식 요구한 것이다.이회창 후보는 당시 김대중 국민회의 대통령 후보의 비자금 의혹에 대해 검찰이 수사 유보 결정을 내리자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또 김영삼 대통령이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를 막후에서 지원한다는 소문도 나돌던 시기였다. 이회창 후보의 탈당 요구가 있자 YS는 11월7일 “정치권의 근거없는 주장에 강력히 대응하겠다”며 신한국당을 탈당해 버렸다.
노태우, YS와 갈등이 이유
노태우 대통령은 임기말인 1992년 9월18일 여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을 탈당했다. 명분은 ‘관권선거 개입이란 폐습을 청산하겠다’는 것이었지만 속으로는 사돈 집안인 SK그룹에 대한 이동통신사업 허가 문제 등을 둘러싸고 당시 김영삼 민자당 대선후보측과 겪은 갈등이 이유였다.나중에 YS는 “노 대통령이 나를 대통령에 당선시키지 않기 위해 탈당했다”며 크게 악감을 드러내기도 했다.노 대통령은 취임 초 전임인 전두환 대통령이 창당한 민주정의당(민정당) 총재를 맡고 있다가 1990년에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 김종필 총재의 신민주공화당과 합당해 민자당을 만들었다.그 이전의 전두환 대통령은 12·12와 5·18 등을 거치며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하나회’를 주축으로 하는 신군부 인사가 중심이 된 민정당을 창당해 총재를 겸했다.그는 1987년 퇴임 한 뒤에도 그 이듬해까지 민정당 명예총재를 맡기도 했지만 5공 청산 과정에서 명예총재직에서도 물러났다. 5·16 이후 1년 동안 군정을 실시한 후 민정 이양을 하고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 대통령은 민주공화당(공화당)을 만들어 총재를 맡았다.박정희 대통령은 또 유신 개헌을 하면서 유신정우회(유정회)라는 또 하나의 여당을 만들어 정국을 요리하기도 했다.초대 이승만 대통령도 자신이 창당한 자유당의 총재를 겸임하고 있었다.
청와대-여당 협조 불가피
앞서 소개했듯이 노무현 대통령은 당정분리론으로 청와대와 여당의 거리를 벌려놓았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치현실상 청와대와 여당이 서로 따로 가기는 어렵다. 현안이 발생하면 당정회의 등을 통해 의견을 조율하고 대책도 수립해야 한다.따라서 지금도 청와대와 여당 사이에는 긴밀한 협조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참여정부들어 청와대와 정부의 가교 역할을 하는 정무수석실이 없어지고 홍보수석실이 일부 정무기능을 담당한다.과거에는 청와대와 여당은 완전히 한 식구였다. 특히 현직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하던 시절엔 청와대에 ‘대통령 비서실장’ 외에 ‘총재 비서실장’이 따로 있었다. 대개 현역 국회의원이 맡던 총재 비서실장은 청와대와 당의 각종 회의에 두루 참석하면서 당·청 간 조정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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