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중반 노대통령 참모들 모두 청와대 떠났다
임기중반 노대통령 참모들 모두 청와대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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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6-03-02 09:00
  • 승인 2006.03.0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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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일요일인 26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북악산을 등반했다.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은 내년 4월을 시작으로 2007년 10월까지 193만 평이 단계적으로 전면 개방되는 곳이다. 노 대통령과 출입기자들의 동반 산행은 참여정부 출범 이후 네번째. 그러나 과거 3차례의 등산과 이번에는 의미가 조금 달랐다. 봄맞이 산행이란 공통점은 있지만 26일 산행은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 3주년(25일) 자축의 뜻이 담겨 있었다. 이에 따라 이날 등산에는 홍보수석 정도만 함께 하던 과거와 달리 청와대의 모든 수석비서관·보좌관급 이상 고위 참모가 동행했다.산행에서 눈에 띄었던 것은 참여정부 3년 동안 이뤄진 청와대 비서실의 인적 변화였다.

출범 초기 청와대 비서실의 근간을 이뤘던 참여정부 ‘창업공신’들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만큼 물갈이가 심했던 것인데, 이런 현상은 청와대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고 권력 전반의 공통점이다. 또 어느 정부를 막론하고 임기 중반을 고비로 창업공신들의 부침이 심했다.참여정부 3주년을 맞은 25일 현재 청와대 비서실의 골격은 3실장·8수석·2보좌관으로 짜여 있다. 장관급인 실장에는 이병완 비서실장을 위시해 김병준 정책실장, 송민순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이 있다. 차관급인 수석비서관직에는 김영주 경제정책수석·김용익 사회정책수석·이용섭 혁신관리수석·황인성 시민사회수석·문재인 민정수석·이백만 홍보수석·김완기 인사수석이 포진해 있다. 보좌관으로는 정문수 경제보좌관이 노 대통령을 보좌하고 있다. 박기영 전정보과학기술보좌관의 후임은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3년전 차관급이상 참모 모두 교체
이번에는 3년 전 참여정부 출범 당시 비서실 고위 라인을 살펴보자.문희상 비서실장을 필두로 이정우 정책실장과 나종일 국가안보보좌관이 장관급이었다. 수석비서관으로는 권오규 정책수석·유인태 정무수석·이해성 홍보수석·박주현 국민참여수석이 있었다. 당시엔 수석비서관 정원이 적은 대신 차관급 보좌관(국가안보보좌관만 장관급) 직제가 활성화돼 있었는데 외교보좌관 반기문, 국방보좌관 김희상, 경제보좌관 조윤제, 인사보좌관 정찬용, 정보과학보좌관 김태유 등이었다.3년 전 차관급 이상 참모진 가운데 지금 청와대에 남아 있는 인물은 단 한 사람도 없는 셈이다. 물론, 초기 고위 참모 가운데 지금도 장관이나 국회의원 등으로 활발히 일하는 사람도 있지만 청와대 비서실 입장에서 보면 3년만에 100% 물갈이 됐다.

영욕의 세월 겪은 창업공신들
특히 초기의 참모진 중에는 문희상 비서실장·유인태 정무수석을 비롯해 정치적 창업공신이 상당수 포함됐지만 지금 이들은 모두 여당을 나가 버렸다.대통령 비서실 차원을 벗어나 범여권에서 봐도 창업공신들의 부침은 심하다. 여전히 잘 나가는 그룹이 있는가 하면, 3년 동안 영욕의 세월을 함께 겪은 인물도 상당수다. 창업공신들이 권력의 속성에 따라 양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무엇보다 참여정부 출범 초기 ‘좌(左) 희정, 우(右) 광재’로 불리며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꼽혔던 열린우리당 이광재 의원과 안희정씨의 3년간 행로를 보면 극단적인 양극화를 느낄 수 있다.

원로급 인사도 부침 심해
이광재 의원은 17대 총선을 통해 일찌감치 금배지를 단 데 이어 5·31 지방선거에서 여당의 강원지사 후보로 나서기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초선 의원이지만 여당의 핵심 당직인 기획위원장 자리에 올랐다. 그동안 몇차례 비리 사건 연루 의혹을 받았지만 무사히 빠져 나갔다.반면, 안희정씨는 그동안 맡은 직책이라곤 초기의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이 유일하다시피 하다. 특히 그는 노 대통령의 대선자금 문제로 사법처리를 받은 이후로는 칩거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다.원로급 창업공신 가운데서도 양극화 현상을 보인 인물들이 있다. 김원기 국회의장과 정대철 전 열린우리당 고문이다. 노 대통령의 ‘정치적 스승’인 김 의장은 지금 입법부의 수장으로서 참여정부의 어른 대접을 받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으로서 ‘1등 창업공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정 전고문은 불법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감옥생활을 했다. 지난해 가까스로 사면·복권됐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일’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정동영 승승장구, 추미애 추락
2002년 대통령선거 당시 노무현 후보가 ‘후계자감’으로 거론했던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과 추미애 전 민주당 의원도 지금 처지는 극과 극이다. 두 사람은 대선 당시 국민참여본부 공동본부장을 맡아 히트를 쳤던 ‘희망돼지’ 운동을 벌이는 등 누구못지 않은 창업공신들이다.하지만 정 의장은 지금 확실한 차기 대선주자의 반열에 올라 선 반면,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서 노 대통령과 결별했던 추 전의원은 17대 총선 때 금배지마저 잃고 미국에 머물고 있다.‘영남 창업공신’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과 ‘호남 창업공신’ 염동연 열린우리당 사무총장의 3년 행로도 많이 다르다. 17대 총선에 나란히 출마했으나 지역주의에 따라 당선(염동연)과 낙선(이강철)으로 갈렸을 때부터 한 사람은 탄탄대로가, 다른 한 사람은 험로가 예고됐었다.

결국 염동연 사무총장은 승승장구하다가 지금은 여당의 5·31 지방선거를 진두지휘하는 위치에 올랐다. 반면 이강철 전수석은 노 대통령의 배려로 청와대 생활을 몇개월 하다가 다시 지난해 10월26일 실시된 대구 동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섰지만 한나라당 유승민 후보에게 고배를 마셨다. 지난 2·18 열린우리당 지도부 경선에서는 동향인 김부겸 후보를 밀기도 했지만 이 역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이 전수석은 오는 3월초 자신의 초등학교 동창으로, 노 대통령의 단골 삼계탕집 토속촌 사장이기도 한 정모씨와 동업으로 서울 효자동에 횟집을 개업한다. 재산이 거의 없다시피 한 이 전 수석의 생계 차원이기도 하고, 이곳을 사랑방 삼아 정치적 재기를 노리는 디딤돌이기도 하다.

박정희 정권시절도 권력 무상
역대 정권에서도 창업공신들이 집권 기간 동안 양극단의 길을 걸은 사례가 수없이 많다.박정희 전대통령을 도와 5·16을 일으켰던 이후락·차지철·박종규·김재규씨 등의 권력 부침은 너무나 유명하다.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과 거사를 벌였던 권정달·허화평·허삼수·이학봉씨 등의 경우도 이후의 행로는 새삼스럽게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노태우 전대통령도 처음부터 전두환 전대통령에 의해 후계자로 지목됐지만 전 대통령의 임기 중반을 전후해 허화평·허삼수씨 등 신군부 ‘대령 세력’의 극심한 견제를 받아 자칫 낙마할 위기를 겪기도 했다.군 출신 대통령들의 창업공신들이 당연히 군인이었던 것에 비해 김영삼 전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부터 창업공신도 민간인으로 바뀌었다. 문민정부의 창업공신은 당연히 상도동계 사람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핵심이 ‘좌 동영 우 형우’로 불리던 김동영·최형우씨였는데, 두 사람 모두 그다지 영화는 누리지 못했다. 김동영씨는 지병이 악화돼 문민정부 탄생을 보지도 못하고 1991년 8월 사망했다. 최형우씨는 문민정부 출범 이후 내무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으나 자녀의 부정입시 문제로 곤욕을 치른 뒤 1997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지금까지 투병생활을 해오고 있다.

권력 몰아주지 않은 DJ
김대중 전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를 일으킨 핵심 세력은 당연히 동교동계다. 그러나 DJ는 YS와 달리 동교동계 창업공신들에게 권력을 몰아주지는 않았다. 구여권 세력인 김중권씨와 뒤늦게 동교동 캠프에 가담한 박지원씨를 청와대 비서실장 등으로 중용하면서 동교동계를 견제했다.이 때문에 동교동계의 좌장인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과 ‘리틀 DJ’로까지 불렸던 한화갑 현 민주당 대표는 국민의 정부 시절 중반 이후 외곽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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