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은행 매각 ‘서별관회의’서 결정…DJ에 보고 됐을 것”
“외환은행 매각 ‘서별관회의’서 결정…DJ에 보고 됐을 것”
  •  
  • 입력 2006-04-19 09:00
  • 승인 2006.04.19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근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한 가운데 김대중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실도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팔기로 한 최종 의사결정권자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DJ정부 때의 이른바 ‘청와대 서별관 회의’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외환은행 매각은 참여정부 출범 이후 완결됐지만 매각 협상의 시작은 국민의 정부에서 했다. 매각에 대한 최종 의사결정이 이루어진 시점이 DJ정부 때인지 참여정부 때인지 규명하는 문제가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을 푸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시점에 불거진 ‘청와대 서별관회의’의 실체는 무엇일까.지난 12일 국회 경제분야 대정부질문에서는 외환은행 헐값 매각에 ‘윗선’, 즉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 고위당국자들의 개입 의혹이 제기됐다.

한나라당 이종구 의원은 “국장급 공무원과 청와대 행정관이 론스타에 대한 외환은행 매각을 자의로 결정했다고 보이지 않는다”며 “대통령의 재가 없이 이 같은 일이 진행됐을 리 만무하다”고 청와대를 직접 겨냥했다.이와 관련해 청와대와 경제부처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DJ 정부 당시 기업·금융·공공·노사 등 4대부문 구조조정에 대한 현안을 조율하기 위해 처음 만들어졌던 청와대 서별관 회의를 바로 연상한다.당시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실이 비서동의 서쪽 별관에 있었기 때문에 서별관 회의로 이름붙여진 이 모임의 고정 참석자는 청와대 경제수석과 경제부총리, 금융감독위원장 등이었다. 물론, 사안에 따라 다른 경제부처 장관이나 국세청장, 한국은행 총재 등이 참석하기도 했다.

‘대통령에 직접 보고’ 정설
서별관 회의에서는 굵직굵직한 경제현안들이 정치적 판단에 따라 처리 방향이 정해지곤 한 것으로 알려진다. 국민의 정부 청와대는 서별관 회의를 통해 대우자동차 부도 처리, 현대 가(家) ‘왕자의 난’ 대처 방안, 하이닉스 반도체 처리 방향, 제일은행 매각 방침 등에 대한 의견을 조율했다고 한다.서별관 회의의 내용은 국가경제 뿐 아니라 정권 자체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들이기 때문에 사실상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따라서 당시 외환은행 처리 방향도 이 회의를 거쳐 결정됐으며, 김대중 대통령에게도 보고됐을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DJ정부에서 외환은행 매각 결정을 하고, 참여정부는 뒤처리를 한 게 아니냐는 관측이다.

옛 ‘관계기관대책회의’와 달라
참여정부에서도 매주 화요일 국무회의에 앞서 주요 경제장관들이 청와대 정책실장실이나 경제정책수석실에서 따로 모이는 ‘서별관 회의’가 열린다. 하지만 과거처럼 경제현안을 정치적으로 푸는 자리는 아니다. 금리 문제 같은 순수한 경제정책을 놓고 의견을 조율하는 정도다.이와 함께 참여정부 경제정책 담당자들은 지난해 3월 한덕수 경제부총리체제가 출범한 이후 한 부총리와 청와대 경제보좌관, 한국은행 총재, 금융감독위원장 등이 참석하는 주례(週例) ‘명동 4인 조찬회의’를 통해 금리·환율·부동산 등 주요 정책현안을 막후 조율하는 것으로 전해진다.이 조찬회의는 주로 명동의 은행회관 내 한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며 자유롭게 현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이견을 조정하는 자리로, 청와대에선 경제보좌관 대신 경제정책수석이 참석할 때도 있다고 한다.이처럼 역대 어느 정부를 막론하고 주요 현안이나 민감한 국정과제에 대한 해결책을 논의하는 ‘비밀회의’는 존재했다. 특히 대통령 비서실이 항상 그런 회의를 주도했고, 비서실만의 별도 비공식회의를 통해 국정운영의 방향을 잡기도 했다.

수석보다 막강한 비서관 파워
참여정부 청와대만 해도 비서실장 주재로 매일 열리는 일일현안점검회의나 수석·보좌관회의 같은 통상적인 회의 외에 핵심참모들이 모이는 별도의 모임이 여러 개 있다. 올초 화제가 됐던 노무현 대통령과 386 핵심 측근들 간의 ‘아침 회의’가 대표적이다. 노 대통령은 매일 아침 8시30분경 관저에서 이호철 국정상황실장·윤태영 연설기획비서관·천호선 의전비서관·문용욱 제1부속실장 등과 함께 회의를 하면서 하루 일정 점검 및 여론 동향 파악 등을 한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유시민 의원 입각 강행 같은 ‘초강수’가 이 모임을 통해 결정된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이 모임에 대해 한나라당을 비롯한 야당은 “‘비선 정치’, ‘측근 정치’의 전형”이라고 맹렬히 비난했으나 청와대는 “지근거리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업무를 맡은 비서관들이 맡은 일을 하는 것일 뿐”이라며 의미를 축소했다.

하지만 당시 청와대 안에서도 기자실을 중심으로 “수석보다 막강한 비서관들이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다”는 말들이 나왔다.실제로 청와대에서 ‘수석급 비서관’들의 파워는 막강하다. 매일 아침 이병완 비서실장 주재로 열리는 일일 상황점검회의에는 김병준 정책실장과 각 수석 외에 이호철 국정상황실장· 정태호 기획조정비서관·윤후덕 정책조정비서관·김만수 대변인·최인호 부대변인 등 5명의 비서관이 참석한다.정부 요직 인사에서 추천과 검증에 있어 적지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병완 비서실장 주재의 ‘인사추천회의’에도 박남춘 인사관리비서관·정상문 총무비서관·김조원 공직기강비서관 등 3명이 관련 수석과 자리를 함께 한다.

이 전총리 퇴진 ‘6인회의’에서 결정
최근 이해찬 국무총리가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대통령 비서실이 행정부나 열린우리당 등과의 공식적인 당정회의 외에 비공식적으로 의견을 조율한 대표적인 모임은 ‘당·정·청 6인 회의’다.6인 회의는 당시 이해찬 총리와 청와대의 이병완 비서실장·김병준 정책실장·문재인 민정수석, 여당의 정동영 의장·김한길 원내대표가 참석멤버였다. 지난 1월 정동영 의장과 김근태 최고위원이 장관직에서 물러나 여당으로 복귀한 뒤 흐지부지된 과거 ‘당·정·청 12인 회의’가 압축된 형태다.6인회의는 이 총리의 3·1절 골프 문제가 불거진 직후인 3월4일 저녁과 10일 두 차례 모임을 열어 대책을 숙의하는 등 모임 멤버이기도 한 이 총리의 퇴진 방침을 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목받은 ‘12인회의’의 실체
앞서 참여정부 출범 직후부터 존재했던 ‘12인 회의’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7월 한 달 사이에 두 번이나 청와대 옆 총리공관에서 열린 모임에 직접 참석하면서 정치권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12인 회의에는 청와대에서 김우식 비서실장·김병준 정책실장·이강철 시민사회수석· 문재인 민정수석이, 열린우리당에서 문희상 의장·정세균 원내대표·원혜영 정책위의장이, 정부에서 이해찬 국무총리·정동영 통일부·김근태 보건복지부·정동채 문화관광부·천정배 법무부장관 등이 참석했다. 노 대통령은 12인 회의를 통해 정치권에 파문을 몰고 온 ‘연정(聯政)’ 필요성을 처음 제기하는가 하면, ‘도청 X 파일’ 파문 등 현안에 대한 입장을 피력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핵심참모 정부부처 장악
과거 청와대에서도 이런저런 비밀회의가 많았다. 가장 귀에 익은 것은 ‘관계기관 대책회의’다. 전두환 대통령의 5공화국과 노태우 대통령의 6공화국 시절 청와대와 안기부 주도로 당정의 주요 현안들에 대해 처리 방안을 결정하던 준(準)상설기구였다. 주로 학원·노동 등 공안사건과 관련해 안기부가 검찰·경찰·교육부·노동부 등을 동원, 정권안보 차원에서 공권력을 사용하는 문제를 논의했는데, 대통령 비서실이 깊숙이 간여했음은 물론이다.1986년 건국대 사태와 1987년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관계기관대책회의에서 큰 줄기의 대처 방향이 결정됐다.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관계기관대책회의는 사라지고 대신 정치권에서 들어온 청와대 핵심 참모들이 여당과 정부 부처를 사실상 장악하고 내부 비밀회의를 거쳐 국정을 주도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