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발언의 진의는 무엇일까. 단순히 원칙론적인 입장을 밝힌 것일까. 아니면 야당과 보수단체의 주장대로 모종의 내막이 있는 것일까.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끝내 밝혀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이는 남북관계의 특수성 때문인데, 이전에도 역대 대통령과 북한 사이에 얽힌 비사는 무수히 많다. 잘 알려진 이야기도 있고, 사실 확인이 되지않은 채 야사처럼 전해져 오는 내용도 있다. 그 중에서도 대통령의 밀사 자격으로 은밀히 휴전선을 넘거나 제3국으로 날아가 북측 당국자와 담판을 짓곤했던 일들이 전설처럼 전해진다.역대 대통령들이 통일정책을 입안하거나, 북한과 막후 협상을 벌일 때 청와대 비서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특히 대통령의 대북 밀사는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알아보자.
송민순 안보실장 전화 시도
노무현 대통령이 핵 문제를 비롯한 대북 현안을 제대로 풀지 못하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가 ‘대북 밀사’를 적절히 활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란 분석이 일각에서 나온다.노 대통령은 그렇다고 청와대나 정부와 긴밀한 협의를 거쳐 대북 정책을 입안하지도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이번 ‘몽골 발언’처럼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청와대와 정부의 공식 참모 라인이 우왕좌왕하는 일이 이전에도 여러 차례 벌어졌기 때문이다.현재 청와대 직제에서 대북 문제를 총괄하는 부서는 ‘통일외교안보정책실(약칭 안보실)’이다. 연초에 기존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 조직을 흡수, 신설했다. 장관급인 초대 안보실장은 송민순 전 외교부 차관보가 맡고 있다. 그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 한국측 수석대표로 있을 당시 촌철살인의 비유 화법으로 화제를 모았던 인물이다.
송 실장 산하에는 차관급인 서주석 통일외교안보정책수석비서관이 있다. 또 서 수석 밑으로 1~2급 비서관인 안보전략·안보정책·안보정보·위기관리 비서관이 포진해 있다.이와 함께 현정부에서는 지난 4월 ‘안보정책조정회의’가 신설됐다. 이 회의는 외교안보 부처 장관과 안보실장 등 청와대의 관련 참모들이 참석한 가운데 매주 한 차례 열려 주요 외교안보 정책 및 현안을 점검한다. 노 대통령은 4월14일 열린 첫회의를 주재했으며, 앞으로도 예외적이거나 중요한 사안이 있을 경우 주례회의에 참석할 예정이다.안보정책조정회의는 월권 시비를 낳았던 NSC 사무처의 많은 기능이 안보실로 이전된 데 따라 신설됨으로써 그동안 외교안보 정책 전반을 조율하는 최고 기구였던 NSC 상임위원회의 위상 약화를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참여정부 후반기 청와대에서 대북정책을 총괄하는 핵심 인물은 단연 송민순 안보실장이다.
이전에 청와대 직제에 있었던 국가안보보좌관·외교보좌관 역할은 물론 NSC 사무처장 기능까지 한꺼번에 담당하고 있는데다, 안보정책조정회의의 간사까지 맡고 있다.그러나 그런 송 실장도 노 대통령 특유의 ‘파격’에는 제대로 장단을 맞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노 대통령의 9일 몽골 발언에 기자들이 큰 관심을 보이자 노 대통령을 수행하던 그는 “예전부터 해 왔던 말씀 아니냐”고 짐짓 의미를 축소하며 진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논란이 증폭되자 다음날에는 “서울에서 말들이 있는 것 같다. 시간을 내 다시 설명하겠다”며 재차 해명에 나서는 등 갈피를 못잡는 모습을 보였다.
DJ정권 대북팀 파워 막강
앞서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외교안보수석실에서 대통령의 대북 정책을 보좌했다. 외교안보수석실 산하에는 통일·외교통상·국방·국제안보 비서관과 20여명의 참모들이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의 문민정부 청와대 역시 대북 라인의 직제는 이와 비슷했다.특히 DJ시절,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은 차관급, 비서관들은 1~2급(국방비서관의 경우 현역 준장)이었지만 해당 부처 장관들 못지 않게 막강한 파워를 가졌다. 당시 DJ의 모든 정책의 최정점에 대북 햇볕정책이 있었고, 이로 인해 노벨 평화상을 탄 만큼 청와대 비서실 대북 관련부서의 위상도 그만큼 상승돼 있었기 때문이다.특히 과거 정권에서도 그랬지만 DJ 역시 가장 믿음직한 핵심 참모에게 ‘대북 밀사’라는 중책을 맡겨 꽉 막힌 남북관계의 물꼬를 트곤 했다. DJ는 현안이 생길 때마다 수시로 대북 밀사를 파견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박지원·임동원씨다. 2000년 당시 박지원씨는 문화관광부 장관, 임동원씨는 국가정보원장으로 있으면서 국민의 정부 최대 치적으로 꼽히는 6·15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비밀협상을 주도했다.그러나 두 사람은 결국 그 일이 빌미가 돼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뒷거래 의혹을 받다가 국민의 정부 임기 만료 뒤 영어(囹圄)의 몸이 됐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박철언 42차례나 북측 밀사와 접촉
박지원·임동원씨 이전에도 역대 대통령들은 대북 밀사를 교착된 남북관계를 풀거나, 혹은 정권안보 차원에서 적절히 활용했다.남북이 휴전선에서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던 냉전 시절인 1972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의 대북 밀사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휴전선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갔다. 그의 품에는 청산가리가 들어 있었다. 일이 잘못됐을 때 기꺼이 목숨을 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유신 이후 남북간 밀사 교류가 단절됐다가 1985년 10월 전두환 대통령의 최측근인 장세동 안기부장이 휴전선을 넘는 것으로 남북간 밀사 교류가 재개됐다.대통령의 대북 밀사 가운데 가장 여러차례 휴전선을 넘나든 인물은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시절의 박철언 청와대 정책보좌관(후에 국회의원, 체육청소년부 장관 등)이었다. 그는 두 대통령을 거치는 기간인 85년 부터 91년 사이에 42차례나 북한측 밀사와 접촉했고 휴전선을 넘어 비밀출장을 간 것만도 21차례에 이른다. 그는 얼마전 발매된 자서전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을 통해 당시의 남북 밀사접촉 과정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노태우 대통령은 박철언 보좌관 외에 90년 9월에 서동원 안기부장도 대북 밀사로 파견했다.남북 대치상황에서 휴전선 총격사건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국제사회에서 서로를 비방하는 데 열중하던 군사정권 시절에도 필요에 따라 밀사들이 휴전선을 넘어 오가곤 했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YS시절에도 ‘대북밀사’ 미미
그러나 재임 기간 중 ‘북풍’(北風)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에는 ‘대북 밀사’가 활용된 뚜렷한 사례가 없다.YS도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대해선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협상 과정은 공식적인 것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93년 2월25일 취임사와 94년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김일성 주석과 만날 용의가 있음을 밝히자 북한은 1994년 6월 지미 카터 전미국대통령을 통해 이를 수락했다.이후 남북간에는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부총리급 예비접촉을 판문점에서 열어 94년 7월 25일부터 남북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7월8일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회담은 무산됐다. 군사정권 시절 이전의 대통령에게도 남북간에는 ‘대치’만 있을 뿐 서로 밀사를 교환할 정도의 타협의 대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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