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장대응” VS “국익없는 보도” 청와대·언론 난타전
“늑장대응” VS “국익없는 보도” 청와대·언론 난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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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6-07-13 09:00
  • 승인 2006.07.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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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노태우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서 핵심 참모로 근무했던 사람들이 최근 한 상가(喪家)에 모여 앉았다. 북한 미사일 발사로 시국이 한창 어수선할 때라 화제는 단연 미사일 문제였고, 이구동성으로 참여정부의 안일한 대북 정책을 원색적으로 비판했다.특히 일부 참석자들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국군 최고통수권자가 맞긴 맞느냐”는 등 통치력을 문제삼는 것부터 시작해 이념적 편향성에까지 칼질을 해댔다. 정부가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은 안보시스템이 고장났기 때문인데, 이는 대통령의 그릇된 대북관이 근본원인이란 인식이었다. 일부 언론의 논조 역시 이와 비슷했다.




“정부가 다 알아서 대처하고 있고, 국민들도 그런 정부를 믿고 차분한데, 신문들만 마치 무슨 난리가 난 것인양 떠들어 댄다.”지난 5일 새벽 북한의 동시다발적인 미사일 발사 이후 미국과 일본이 국제적 제재 조치 마련에 나서는 등 긴장이 고조되고 있을 때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한 말이다. 이 관계자는 사석에서 푸념삼아 그런 말을 했지만 다른 청와대 참모나 정부 관료들이 공식석상에서 보여준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청와대 서주석 안보정책수석은 정부의 ‘늑장대응’을 비판한 언론을 겨냥해 “국적없는 보도, 국익없는 보도”라고 맹비난했다. 서 수석은 “상황이 발생했다고 대통령이 꼭두새벽에 회의를 소집해 이목을 집중시키는 게 과연 바람직한가, 속도경쟁하듯 강경책을 내놓아 긴장을 증폭시키는 게 타당한가”고 반문했다.또 윤광웅 국방부 장관은 국회 국방위에서 “(북한 미사일 사태에) 좀 여유 있게 대응했다”고 말했다가 의원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늑장 대응했다’는 의원들의 지적에 대해 윤 장관이 “저희가 다 준비해 놨고 알고 있어서 여유를 갖고 한 것”이라고 그 긴박한 상황에서 느긋함을 보여준 것이다.이밖에도 ‘안일한 상황인식’이란 비판을 받기에 충분한 정부 당국자들의 발언이 많았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 사실을 대통령에게 뒤늦게 보고했다는 지적에 대해 “우리 정부의 매뉴얼상 스커드나 노동 미사일의 발사는 대통령에게 즉각적으로 보고하거나 NSC(국가안전보장회의)를 바로 열어야 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또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미사일 첫 발사 후 3시간이 지난 오전 6시39분에야 출근한 이유에 대해 “보고는 이전에 받았고, (출근 전에)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고 궁색하게 해명했다.국회 정보위 비공개 회의에서는 최준택 국정원 3차장이 일본의 발빠른 대응과 우리의 늑장대응이 비교돼 추궁을 당하자 “일본이 이번 사태를 무력증강이라는 국익에 사용하기 위해 호들갑을 떠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후문이다.

신문들만 난리가 났다?

정부 안보 책임자들의 이런 자세는 일면 ‘침착한 대응’이란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이 보다는 참여정부의 ‘색깔’까지 거론될 정도로 대북관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도 많다. 즉, 노무현 대통령의 유연한 대북관이 참여정부의 대북 정책 기조가 돼 있어 북한의 도발에도 적절한 응징을 가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북한이 지난 5일 대포동 2호 미사일을 비롯, 미사일 7기를 쏘아올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지만 며칠 동안 이와 관련한 노무현 대통령의 언급은 아무 것도 전해지지 않아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앞서 북한 미사일 발사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5월 중순 이후부터 봐도 노 대통령이 미사일과 관련해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에 대해 청와대 참모들은 “대통령이 말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말을 했는지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상황 관리에 대한 전략적 판단, 즉 북한이 노리는 정치적 의도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판단에 따라 대응하고 있는 것이지, 야당과 일부 언론의 비판처럼 상황 인식이 안이해 ‘침묵’하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파문 일으킨 ‘울란바트르’ 발언

그러나 노 대통령은 지난해 2월10일 북한이 핵 무기 보유 및 6자회담 무기한 불참을 전격 선언했을 때도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엿새가 지나서야 ‘육성’을 통해 첫 공식 반응을 보인 바 있다. 당시 내용도 ‘강경 대응’과는 거리가 멀었다. 2월16일 안보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서 “상황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냉정하고 차분하게 대응해 신중하게 대처해 달라”고 지시하며 북측에 6자회담의 조속한 복귀를 촉구하는 정도였다. 따라서 노 대통령의 대북관이 일반적인 국민정서와는 달리 너무 유화적인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한나라당이 “북한의 미사일 문제와 관련해 이제 한국 정부가 북한에 화를 낼 차례”라며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북한에 경고해야 한다”고 촉구할 정도다.노 대통령이 취임 후 유연한 대북관을 보여 준 사례는 많다.

지난 5월 몽골을 국빈방문해 울란바트르에서 동포 간담회를 가진 자리서 노 대통령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대중 전대통령과 만나면 북한도 융통성 있는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싶어 상당히 기대를 갖고 있다. 많은 양보를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또 조건없는 남북정상회담을 언급하기도 했다.당시 노 대통령의 느닷없는 ‘울란바토르 발언’이 나오자마자 몽골 현지와 한국 양쪽에서 청와대와 정부관계자들이 서둘러 ‘불끄기’에 나서느라 바삐 움직여야 했다. 가뜩이나 북한 핵 문제 해결에 이견을 보이고 있던 한·미 관계가 경색될 수 있었던 까닭이다.노 대통령은 이밖에도 “(북한) 붕괴를 원치 않는 중국·한국과, ‘레짐 체인지’(정권교체)를 해야 된다고 하는 나라들 사이에서는 손발이 안 맞게 돼 있다”, “미국과 일부 서구 국가들에서 북한의 체제가 결국 무너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더 불안해하고 위기감을 느끼는 것”이라는 등의 말을 자주 해 왔다.

DJ정권 때가 북한과 가장 소통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역대 대통령 가운데 북한과의 관계를 가장 좋게 이끌고 간 인물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햇볕정책’으로 대변되는 국민의 정부 대북 정책은 참여정부에까지 큰 줄기가 이어져 오고 있다.평양으로 날아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껴안고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한 인물은 DJ였다. DJ는 한반도 평화정착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도 받았다. 최근에는 대통령 퇴임 후 3년 여만에 다시 평양을 방문하려 했지만 ‘정치적 이유’에 의해 좌절됐다.전임자인 김영삼 대통령은 재임 기간 중 ‘북풍’(北風)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대체로 북한과는 적대적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YS도 정치적 목적에 따라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대해선 적극성을 보였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가까스로 94년 7월25일부터 남북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했지만 7월8일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회담이 열리지 못했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앞서 군사정권 시절의 대통령들은 북한과 팽팽한 대치관계를 유지하면서 안보를 정권유지에 적절히 활용했다. 그러면서도 간간이 밀사를 평양에 보내 북한 지도자와 간접적인 끈을 잇기 위한 시도를 하곤 했다. 정권 유지를 위해 ‘분단 고착화’를 도모한 것으로 알려진 박정희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5월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열린 제4차 남북장성급회담에 참가한 북측 김영철 단장은 남측 한민수 수석대표와 환담을 나누던 중 이후락 전중앙정보부장의 ‘평양 밀행’에 얽힌 후임담을 소개한 바 있다.“30년 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고 대동강변을 따라 평양에 왔는데 상당히 긴장되고 착잡한 표정이었다. 20년만에 의미심장하게 평양에 왔고. 본인 마음도 불신과 오해로 꽉 차 있었고, 불미스런 과거도 있고 해서 본인 마음이 착잡하고 긴장된 것이다. 그런데 만나자마자 긴장감이 풀렸고 수령님이 포옹을 하면서 인자하게 대해주고 차와 담배도 권했다. 이후 화기애애하게 통일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재임 기간 중 북한과 전쟁을 치른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론’을 주창할 정도로 정권 내내 북한정권과 대치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 동포가 스스로 북한을 수복할 수 없을 때에는 무력으로 주권을 되찾을 권한이 있다”면서 ‘북진통일론’을 내세웠다. 이는 당시 사회주의 벨트를 봉쇄하려던 미국의 세계전략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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