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자의든 타의든 내년쯤 여당을 탈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시기가 아니다. 내가 계속 버티면 노 대통령이 탈당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탈당하면 청와대와 여당 모두 어려워진다.”‘논문 파동’으로 야당은 물론 여당으로부터도 퇴진압력을 받던 김병준 교육부총리가 버티기를 포기하고 취임 13일 만에 사퇴의사를 표명한 진짜 이유에 대해 스스로 밝힌 내용이다. 사의 표명 직후 지인들과 가진 사석에서였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김병준 부총리를 낙마시킨 이후에도 ‘문재인 법무장관 카드’에 반기를 드는 등 사사건건 청와대를 압박하고 있다. 그러자 청와대도 여당을 직접 겨냥해 “대통령 인사권은 존중돼야 한다”고 반격을 가하면서 당·청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청와대와 여당의 갈등은 역대 모든 정권에서 임기말에 나타났다. 정권재창출에 나서야 하는 여당 입장에서는 항상 임기말에 인기가 떨어졌던 청와대와 차별화를 시도해야 했다. 반면, 청와대는 당·청 힘겨루기에서 밀릴 경우 바로 레임덕(임기말 권력누수현상)에 걸리기 때문에 배수진을 칠 수밖에 없었다. 과거 정권에서는 임기말 당·청 알력에서 항상 여당이 승리했다. 청와대가 워낙 흠집이 많았던데다, 여론을 반전시키는 힘이 청와대 보다는 여당에 있었기 때문이다.
1987년 개헌으로 5년 단임 대통령제가 도입된 이후 노태우·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이 재임 기간에 여당을 탈당한 것은 모두 자의 보다는 타의, 즉 여당의 요구에 의해서였다. 임기 말 불거진 권력 주변 비리 의혹과 이에 따른 지지도 하락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여당에서 대통령을 밀어내버렸던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1992년 9월18일 “관권선거 개입의 폐습을 청산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민주자유당을 떠났다. 실제로는 사돈이 오너로 있는 SK그룹에 대한 이동통신사업 허가 문제 등을 놓고 여론이 좋지않자 당시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후보측으로부터 탈당 압력이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 탈당 이틀 전에는 지금 참여정부에서 일어나는 ‘대통령 인사권 침해’ 시비도 벌어졌다. 김영삼 후보는 기자회견을 열어 한준수 연기군수가 폭로한 ‘관권선거 의혹사건’과 관련해 중립 선거관리내각 구성을 위한 개각을 요구했다. 그러자 청와대는 노태우 대통령의 인사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며 발끈했다. 그런 YS도 대통령 임기말인 1997년에 당시 신한국당(민자당 후신) 대선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이회창 후보로부터 탈당 압박을 받다가 11월7일 여당을 떠났다. 당시 이회창 후보는 김대중 국민회의 대통령후보의 비자금 의혹에 대해 검찰이 수사 유보 결정을 내린 데 반발하고 있었다. 특히 이회창 후보는 ‘부패한 3김 정치와의 성전(聖戰)’까지 선언하면서 현직 대통령인 YS와 철저히 차별화했다.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했던 김대중 대통령도 임기말인 2002년 5월6일 세 아들이 각종 비리에 연루된 데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고 민주당(국민회의 후신)을 떠났다. 이 때도 국민여론이 들끓자 민주당측에서 청와대와의 물밑접촉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 밀어내기를 시도한 것으로 알려진다.
역대대통령 임기말 여당에 압박
과거 세 명의 대통령이 여당 당적을 버렸던 시점을 살펴보자. 노태우 대통령은 임기 만료 5개월 여 전, 김영삼 대통령은 3개월 여 전, 김대중 대통령은 10개월 여 전이었다. 이때는 여당의 대선 후보도 대강 정해져 권력을 넘겨줄 준비를 해야 할 시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병준 부총리가 자신의 퇴진이 노무현 대통령 탈당 방지를 위한 것임을 밝히면서 “내년 쯤이면 모르지만 지금은 탈당 시점이 아니다”라고 언급한 배경을 살펴 볼 수 있다. 적어도 과거 정권이 했던 기간 만큼은 대통령이 당적을 유지하고 버텨야 레임덕 기간을 단축시켜 임기를 무난하게 마무리할 수 있다는 판단인 셈이다. 그 만큼 노무현 대통령의 여당 탈당은 정국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뇌관이다. 먼저 청와대 입장에서는 집권 후반기에 가뜩이나 정책 추진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여당의 정치적 지원마저 받지 못하고 적대관계가 된다면 국정운영에 큰 부담을 안게 된다. 따라서 김 부총리가 ‘위기’에 몰린 참여정부 청와대를 위해서 몸을 던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물론 이 과정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어느정도 교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 부총리는 지난 2일 아침 일찍 청와대로 들어갔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관저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김 부총리는 노 대통령과 면담을 가진 뒤 바로 교육부 기획홍보관리관을 통해 사퇴를 공식화했다. 두 사람의 독대에서 노 대통령의 탈당을 위한 적절한 시점을 포함해 깊이 있는 논의가 오갔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청와대는 ‘김병준 파동’에 연이어 ‘문재인 파동’이 일어나 열린우리당과의 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던 지난 주말에도 “노 대통령은 탈당할 생각이 없고, 탈당은 전혀 고려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레임덕을 무서워하지 않는 대통령
노 대통령의 탈당을 열린우리당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결론적으로 이는 모험이다. 무엇보다 현직 대통령이 임기를 1년반이나 남겨놓은 시점에서 여당을 떠난 전례가 없다. 차기 대선후보 구도도 아직 혼미한 상황이다. 따라서 현시점에서의 대통령 탈당으로 여당 기득권을 놓치는 부담과 인기가 떨어진 청와대와의 차별화로 정국주도권을 다시 쥐는 기회를 확보할 수 있는 이점 사이에서 고민해야 한다. 이와 함께 조순형 전 민주당 대표가 열린우리당을 향해 “노 대통령과의 관계를 정리하면 (재합당을 포함해) 협력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고 밝히는 등 노 대통령의 탈당은 정계개편의 기폭제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복잡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노 대통령이 조기에 여당을 탈당하는 모험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을까. 청와대 기류에 정통한 정치권 인사는 “정치상황과 함께 노 대통령 특유의 성격도 고려해야 비교적 정확한 예상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관계자는 “노 대통령은 지금까지도 정치권이 아닌 국민을 보고 국정은 운영해 왔다. 레임덕이 무서워서 여당에 끌려가면서까지 당적에 집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전대통령은 임기 막바지까지 여당 당적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권력을 통째로 내놓을 수도 있다’고 했던 노무현 대통령이라면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즉, 김병준 부총리 퇴진을 양보한 것까지가 노무현 대통령이 여당의 도전에 인내하는 한계가 아니겠느냐는 분석이다. 열린우리당이 김병준 부총리를 끌어내린 데 이어 문재인 법무 장관 발탁에도 시비를 걸고 나서자 청와대 핵심 인사들은 일제히 ‘대통령의 국무위원 임면권 침해’를 비판했다. 이병완 비서실장, 박남춘 인사수석, 이백만 홍보수석, 정태호 대변인 등이 앞다퉈 여당을 겨냥해 ‘인사권’ 문제를 거론하는 자체가 심상찮다는 시각이 많다. 청와대 주변에서는 인내의 한계에 부딪친 노 대통령이 조기탈당이란 중대결심을 하기 위한 수순밟기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5·31 지방선거 패인을 놓고 당·청이 얼굴을 붉혔을 때도 여당 지도부를 청와대로 불러 다독거리면서 ‘전략적 동거’에 들어갔는데, 이번 일로 양측이 완전히 틀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승부사 노무현’
과소평가는 곤란
이전에도 참여정부 청와대와 여당 간에는 이미 몇차례 결별 위기가 있었다. 특히 지난 1월11일 청와대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만찬 간담회에서는 노 대통령 스스로 탈당 문제를 언급한 것으로 알려진다. 연초 불거진 ‘개각 파동’에 따른 청와대와 여당의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열린 간담회에서 노 대통령은 “지난해 대연정 제안 당시 탈당까지 생각했었다”고 밝히면서 탈당이 언제든 선택 가능한 카드라는 뉘앙스를 풍겼다고 당시 참석자들은 전한다. 노 대통령이 실지로 자신의 스타일대로 여당 당적을 덜컥 내던지기는 쉽지 않다. 정치상황이 너무 복잡하게 꼬여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당의 압박이 계속될 경우 현시점에서 노 대통령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탈당 후 대규모 개각밖에 없다. 현재 내각에 포진해 있는 열린우리당 소속 현역 국회의원은 한명숙 국무총리를 비롯해 박홍수 농림·정세균 산업자원·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등 4명이다. 노 대통령이 여당을 탈당하면 이들도 당으로 복귀해야 한다. 특히 국무총리와 함께 온갖 비판을 받으며 임명했던 유시민 장관까지 바꿔야 되는 만큼 노 대통령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노 대통령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런 모험을 감히 감행하는 인물이 노 대통령이라고 입을 모은다. 위기에 몰릴 때마다 정면돌파를 선택해 온 ‘승부사 노무현’을 과소평가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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