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평일인 지난달 22일 예정에 없이 하루를 쉬었다. 집무실이 있는 청와대 본관에 출근하지 않고 관저에 하루 종일 머문 것이다. 더구나 이날은 강원도 정선으로 출장 일정도 잡혀 있었지만 전격 취소했다. 청와대측은 노 대통령이 누적된 피로에 몸살이 겹쳐서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당일 오전 10시에 강원도 정선군청에서 열리는 ‘신활력사업 성과보고회’에 참석한 뒤 정선의 생약초시장과 농가를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노 대통령이 아침에 피로감을 밝혔고 주치의의 진단을 받은 뒤 오전 7시30분쯤 불참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이 건강상의 이유로 외부 일정을 전격 취소한 것은 2003년 2월 취임 후 처음이다. 대통령이 지방 일정을 예정하면 관계 공무원들은 총비상이 걸려 길게는 한달 이상 철야하다시피 준비작업을 벌인다. 그들을 허탈하게 만든 노 대통령의 피로 원인은 해외순방 후유증이었다.
청와대 관계자들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보통 새벽 5시면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후 한 시간 가량 스트레칭과 요가를 섞어서 스스로 개발한 ‘체조’로 몸을 푼 뒤 아침 식사를 하고 본관으로 출근 준비를 한다.
그러나 이날은 아침 일찍 참모들에게 “몸이 너무 피곤하다”고 알렸다고 한다. 즉각 주치의가 달려가 진단을 했고, 주치의의 의견을 들은 참모들은 “지방 일정을 강행하기 보다는 하루쯤 푹 쉬시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여 강원도 일정이 전격 취소됐다. 노 대통령은 다음날인 토요일과 일요일 동안 푹 쉬면서 기력을 회복한 것으로 전해졌다.
노 대통령의 피로가 누적된 것은 앞서 9월3일부터 15일까지 무려 13박14일 동안 유럽과 미국을 순방하며 빡빡한 일정을 소화한 후유증 때문이다.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강행군을 마치고 귀국한 뒤에도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국내 일정을 예정대로 소화하다가 탈이 났다는 것이다.
가끔씩 시차적응에 애먹어
노 대통령은 지난 3일 오전에 출국해서 그리스 아테네를 시작으로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와 핀란드 헬싱키를 거쳐 미국 워싱턴, 샌프란시스코까지 4개국 5개 도시를 순방했다. 비행기 탑승 시간만 45시간이 넘는데다, 한국과의 시차도 6시간에서 16시간이나 있어 모든 일행이 컨디션 조절에 애를 먹었다.
노 대통령은 이전에도 해외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뒤 시차적응에 곤란을 겪은 적이 한, 두 차례 있었다고 한다. 특히 이번 순방은 너무 긴 일정에다가 시차가 들쭉날쭉한 탓에 수행했던 일부 참모와 기자들도 귀국 후 불면증이나 몸살을 앓는 경우가 많았다.
잘 알려진대로 노 대통령은 타고난 건강체질이다.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면서도 밤늦게까지 인터넷과 책읽기를 즐긴다. 저녁 식사 후에는 골프 스윙 연습을 하고 스텝머신을 밟는가 하면,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면서 땀을 흘린다. 이런 운동을 매일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 꾸준히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량은 외부인과 공식 식사모임을 가질 때 와인을 반주로 즐기는 정도고, 담배는 끊었다 피웠다를 반복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대통령 당선자 시절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은 뒤 한참 동안 복대를 차고 다녔고, 재임 중 눈꺼풀이 처지는 현상인 상안검이완증 수술을 받은 적이 있지만 건강에 큰 문제는 없었다. 이번 피로감도 주말을 푹 쉬면서 바로 풀렸다고 한다.
일정 취소에 측근들 초긴장
반면, 전임자인 김대중 대통령은 워낙 고령인데다,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입은 상처 등 지병이 있어 주치의를 비롯한 측근들이 항상 초긴장 상태였다. 실제로 재임 기간 동안 몸이 좋지 않아 예정된 일정을 몇 시간 전에 취소한 사례도 간혹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 자신은 가급적 많은 일정을 잡으려고 했지만 측근들이 무리하다고 생각되는 일정은 다른 핑계를 대서라도 빼버리곤 했다고 한다.
특히 2002년 1월 대통령 연두기자회견 때 TV 화면에 비친 대통령의 모습이 이상했다든가, 서민생활을 살피기 위해 시장에 나갔다가 동문서답을 했다는 등 여러 가지 건강 관련 소문들이 당시 시중에 나돌았다.
그러다 같은 해 3월에 대통령이 ‘대퇴부염좌’를 앓고 있음을 청와대가 인정했다. 이후 DJ는 공식 행사장으로 이동하면서도 휠체어를 사용했는데 4월8일에 청와대는 “대통령의 건강이 좋아져서 휠체어를 사용하지 않게 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청와대 발표 다음날인 4월9일 밤 우리나라를 방문 중이던 핀란드의 타르야 할로넨 대통령과의 국빈만찬이 끝난 뒤 갑자기 국군 서울지구병원에 입원, 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당시 발표는 누적된 과로에 위장장애 증세였지만 갖가지 억측이 나돌아 정권 전체가 긴장했다.
DJ의 건강 문제는 앞서 대통령선거 때 쟁점이 되기도 했었다. 1997년 대선 당시 ‘DJ 건강 이상설’이 나돌자, DJ측은 나중에 대통령 주치의가 된 연세대 의대 허갑범 교수에게서 종합진단을 받아 허 교수가 ‘DJ 건강 이상무’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 이전의 대통령들이 재임 기간 중에 병원에 입원한 사례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입원 사실이 공식 발표된 것은 DJ가 처음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소식과 규칙적인 운동
건강 관리에 가장 열성적이었던 대통령은 단연 김영삼 전대통령이었다. ‘민주산악회’로 상징되는 YS의 등산과 아침 조깅은 유명하다. 심지어 해외 순방에 나가서도 아침 조깅만은 빼놓지 않고 했다. 외국정상들과 환담할 때도 꼭 조깅 이야기가 들어갔다.
청와대 경내에서 아침마다 조깅을 했는데, 당시 같이 뛰던 ‘조깅멤버’들이 문민정부의 핵심 실세로 간주되기도 했다.
YS는 퇴임 후 의사와 측근들이 고령을 이유로 조깅 같은 무리한 운동을 만류하자 수영으로 운동종목을 바꿔 꾸준히 건강관리를 하고 있다.
앞서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대통령 등 군 출신 대통령들의 건강도 재임 기간 중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전두환 전대통령은 육사 시절 축구부 주장(골키퍼)을 지내는 등 만능 스포츠맨으로 알려져 있다. 노태우 대통령은 청와대에서도 테니스를 즐겼다. 당시 처고종사촌인 박철언 전의원, 처남인 김복동 전의원, 동서인 금진호 전상공부 장관 등이 부부동반으로 함께 테니스를 치곤 했는데 이 자리에서 중요한 국정이 논의되곤 했다. 그렇지만 노태우 대통령은 최근들어 건강이 악화됐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은 소식(小食)과 규칙적인 운동으로 건강을 유지했다고 한다.
건강관리 중 국정논의도
대통령의 종합적인 건강관리는 청와대 주치의가 맡는다. 역대 대통령들의 주치의는 모두 ‘양방’ 의사였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양방 외에 한방 주치의도 따로 두고 있다.
대통령 주치의는 청와대에 상근하지 않고 보통 대학병원 등에 소속돼 있다. 그렇지만 재임 중 수석비서관(차관)급 대우를 받는다. 2주에 한 번씩 청와대에 들러 대통령과 가족들의 건강을 체크한다고 한다.
상근을 하면서 대통령의 건강을 세심하게 돌보는 사람은 청와대 의무실장이다. 의무실장은 대통령 경호실 소속으로 정식 국가공무원이다. 의무실장은 대통령의 거의 모든 일정에 함께 참석해 ‘돌발 사태’에 대비한다.
<유제성·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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