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치스타일, 대통령 콤플렉스에서 결정된다
통치스타일, 대통령 콤플렉스에서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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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6-11-10 15:12
  • 승인 2006.11.10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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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통치스타일


지난 1일 청와대는 외교·안보라인의 4개 부처 개각을 단행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통일부장관에 이재정 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을, 외교통상부 장관에 송민순 청와대 안보실장을, 국방부장관에 김장수 육군참모총장을, 국가정보원장에 김만복 국정원 제 1차장을 각각 내정했다.
박남춘 인사수석은 발탁배경과 관련, “이재정 내정자는 정부의 평화번영정책과 화해협력의 남북관계에 대한 분명한 신념과 민족통일 문제에 남다른 경륜과 열정을 바탕으로 통일부장관 직무를 잘 수행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참여정부는 이날 외교·안보라인 개편과 관련해 또다시 ‘코드인사’ 논쟁에 휩싸이고 있다.
야당인 한나라당뿐만 아니라 여당인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이번 인사와 관련해 ‘노 대통령의 전횡을 드러낸 인사’라는 목소리가 높다.


한나라당 나경원 대변인은 “정말 해도 너무하는 인사다. 안보를 강화하기는커녕 안보를 포기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며 “앞으로 있을 인사청문회 과정을 통해 철저히 부적격성을 검증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치권 반대 불구 ‘마이웨이’
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도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당은 위기라고 생각하는데 청와대는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아 접점이 없다. 정책에 실패한 사람들을 계속 쓰려고 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야당뿐 아니라 여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인사를 단행하는 것은 노 대통령만의 ‘독특한 통치스타일’ 때문이란 지적이다.
노 대통령은 대통령 자리에 오른 후 자신에게 오는 ‘비난’이나 ‘비판’을 피해가지 않았다. 대통령 탄핵이나 행정수도 이전 문제 등 국체를 흔드는 대 혼란 속에서도 이를 비켜가지 않고 당당히 맞서왔다.
여론이 불리하게 돌아가면 언론 등을 이용해 화제의 중심을 다른 곳으로 바꾸어 왔던 전임 대통령들과는 달리 노 대통령은 이를 비켜가지 않고 그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때문에 이를 두고 좋게 얘기하면 ‘내가 뿌린 씨, 내가 거둔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의도된 고도의 ‘정치기술’이란 평가도 따른다.
특히 노 대통령 본인 스스로 정치권의 ‘핵심 이슈’들을 만들어 내 이를 돌파하는 성향을 보여 왔다.
이러한 예는 지난 2004년 대통령 탄핵을 앞두고도 잘 나타났다. 대통령 탄핵의 발의가 기정사실로 떠오르면서 정국은 대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노무현, ‘정면돌파형’ 통치술
‘대통령 탄핵’이란 파국을 막고자 당시 박관용 국회의장은 청와대 김우식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태가 심상치 않다. 어떻게든 수습해야 한다. 만나서 얘기하면 안 될 것이 무엇이겠냐. 내가 야3당 대표를 끌고 나가겠다. 비서실장은 노 대통령을 데리고 나오시오. 장소는 청와대도 좋고 의장 공관도 좋다”고 전했다.
하지만 김우식 비서실장에게서 돌아 온 답변은 ‘노(No)’였다.
“의장님의 뜻을 대통령께 전달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의장님의 뜻은 고마우나 지금 당신께서 너무 지쳐 있어서 만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결국 ‘노무현식 통치스타일’이 ‘맞짱’이라는 것을 잘 알려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현정부들어 청와대를 중심으로 한 공무원들의 ‘댓글달기’ 열풍이 일어난 것도 우연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정권에서는 슬그머니 피해가던 핵심이슈들을 당당히 꺼내놓고, 이를 헤쳐 나가는 한 방법으로 ‘댓글달기’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어느 야당 의원이 국정감사장에서 피감 기관장을 향해 “참여정부의 슬로건이 ‘자나 깨나 댓글달기’ 아니냐”고 비아냥거리는 것을 보면, 노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은 핵심이슈들을 시간 속에 내버려둠으로써 비켜가지 않고, 스스로 이를 만들어 해결해 나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DJ, ‘자기중심적’ 논리 강해
김대중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은 ‘자기중심적 정면돌파’라고 할 수 있다.
지난 97년 대선 직전 불거진 ‘DJ 정치자금 수수설’로 인해 궁지에 몰리자 DJ는 “여권에서 흘리는 정치공작이다. 흔들리지 말라”며 측근들에게 앞으로 나갈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청와대와 여권의 사무총장 등이 직접 이를 거론하자 DJ는 “노태우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고 실토했다.
이로 인해 궁지에 몰리자, DJ 측은 ‘그 정도의 자금을 안 받고 정치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논리로 이를 돌파했다. 자기중심적이라 할 수 있다.
대통령이 되고 난 후 물밑에서 비밀리에 북한에 자금을 지원한 게, 노무현 정권에 의해 드러나자 DJ 측은 ‘자기중심적’ 논리로 또다시 빠져나갔다.
“남과 북이 평화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지금부터 통일비용을 미리미리 줄이기 위해 그때를 대비해 많은 돈과 물자 등을 대줘야 한다.”

‘결단’ ‘깜짝쇼’에 능한 YS
김영삼 대통령은 3당합당에서 대통령이 되고 난 후 이뤄진 각종 정책들을 종합해 볼 때, 그의 통치스타일은 ‘결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좋지 않게 표현하자면 ‘깜짝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스타일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잘 드러나 있었다. YS는 3당 합당 이후 차기 대통령후보 자리를 놓고 당 내 갈등이 일자, 당무를 거부하고 고향으로 낙향하는 결단을 내린다. 이 같은 결단을 통해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낸 YS는 차기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이러한 예는 대통령이 되고 난 후에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금융실명제다. YS가 지난 93년 8월 금융실명제를 전격 발표하고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밝힌 말들을 종합해 보면, 그의 통치 스타일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신문들이 사설이나 칼럼에서 실명제를 안하면 개혁이 아니다. 실명제는 개혁의 전부라고 써대더니 정작 하니까 잘했다고 말하기는커녕 부작용만 부각시키는데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대통령이 깜짝쇼를 한다고 하는데 대통령이 어떻게 깜짝쇼를 합니까. 대통령 중심제는 합의제가 아닙니다. 대통령이 결단하고 때로는 이로 인해 고뇌와 외로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이는 대통령으로서 책임과 임무수행을 다하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공통점은 ‘안보’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과 긴급조치 등을 통해 정권의 저항세력들을 탄압했다. 박 정권은 국민들을 ‘빨갱이’ 등으로 몰아, 토끼몰이 하듯 한 곳으로 옥죌 수 있었다.
박정희의 통치스타일은 군 출신답게 늘 북한과의 대치상황을 이용했다. ‘북한의 위협 가능성’을 증폭시켜 반대여론을 무마시켰다.
이는 전두환과 노태우 대통령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통치스타일은 군사정권의 특징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국민들을 전쟁위협 속에 몰아넣음으로써 반대여론을 찬성여론으로 쉽게 돌릴 수 있었다.
이러한 강압통치 속에서 세 사람은 언제나 군을 경계하는 이중성을 보이기도 했다. ‘총과 칼’로 잡은 정권이었기에 언제든지 또 다른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내줄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들은 ‘정권의 정통성이 없다’는 취약점으로 인해 늘 군의 쿠데타에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따라서 이들의 통치스타일의 근간은 언제나 군을 염두에 둔 행위였다. 때문에 저항세력과 군을 견제해야 하는 이들 대통령은 ‘측근 중의 측근’만을 신뢰하고 곁에 두는 측근정치로 유명했다. DJ나 YS도 가신 정치를 하기도 했지만, ‘문민’과 ‘국민’이라는 이름을 걸고 언제까지나 가신들에게 정부요직을 맡길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기에 집권 후 참신한 인사들을 곳곳에 배치했었다.

한국전쟁 영향 이승만은 ‘독재’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이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은 후임 정부의 운영에 영향을 끼쳤다.
이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은 한마디로 ‘독재’로 표현할 수 있다. 이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이 이처럼 바뀌게 된 연유를 한국전쟁으로 보는 게 대세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북한의 침략을 막을 사람이 ‘나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정권은 한국전쟁이란 국란을 기회로 삼아 더욱 강력한 군주가 되겠다는 승부수를 던졌다.
대표적인 예가 사사오입 개헌을 통한 종신집권이었다. 국가 위기를 오히려 승부의 기회로 삼은 이승만은 이를 통해 장기집권을 노렸다.
하지만 이는 부메랑이 돼 자신에게 돌아왔다. ‘무엇이든 밀어붙이면 된다’고 판단한 자유당과 이승만 정권은 3·15부정선거 등을 통해 또다시 정권연장을 꾀했다. 결국 이는 정권의 몰락을 초래하게 됐다.
이때 사건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박정희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은 훗날의 쿠데타를 결심했고, 대통령에 오른 후 이승만 정권을 따라 장기집권을 꿈꿨다.
<김문신·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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