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의 2인자는 “모두 불운했다”
정권의 2인자는 “모두 불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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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6-11-28 16:57
  • 승인 2006.11.28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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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불운의 2인자


‘전효숙 임명동의’, ‘북핵 사태와 김승규 국정원정의 공개반발’, ‘법원과 검찰의 날 세운 대립’ 등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정치 상황들이 연출되고 있다.
특히 추병직 건교부 장관을 끌어내리기도 했던 부동산 광풍은 정치에 무관심했던 민심에도 충격을 가져다 줬다. 청와대 내부에서조차 이번 부동산 광풍과 관련해 ‘민심이 등을 돌린 정도가 아니라 아예 떠나 버렸다’는 말들이 흘러나온다. ‘두 자리 지지율이 그리울 정도’라는 말이 당 안팎에서 돌고 있다.
이렇듯 노 대통령이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데도 열린우리당은 “이라크 파병 군인들을 철수시켜야 한다”며 압박하고 있다.
한마디로 위기다. 이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악역’을 맡아 책임져 줄 측근이 필요하다. 열린우리당 정대철 상임고문이 “원래 밥짓는 사람(측근) 따로 있고, 밥먹는 사람(대통령) 따로 있는 법이다”라고 말했듯이 ‘밥짓는 사람’이 절실한 때다.


이는 대통령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을 사람’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역대 정권을 통해 볼 때 이들은 대통령을 위해 ‘영어‘의 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때문에 정권이 끝나면 법이라는 ’잣대‘에 의해 수감되는 비운을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는 인물로는 ‘안희정’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안씨는 참여정부를 만들어 놓은 1등 공신임에도 아직까지 제도권으로 입성하지 못하고 야인으로 남아있다. 금품 수수사건으로 법의 단죄를 받은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안씨가 받은 돈이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 만큼, 군주인 노 대통령을 대신해서 법의 단죄를 받았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참여정부를 만들기 위해 노 대통령에게 ‘올인’했던 안씨에게 참여정부 4년은 아깝게 흘러만 가는 시간일 것이다. 뭔가 헤게모니를 쥐고 펼칠 수 있었던 시간이 이제는 참여정부의 낮은 지지도와 함께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안씨를 가리켜 ‘평생을 함께할 동지’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어, 차기 정권창출을 위한 안씨의 ‘역할’은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권노갑, 동교동계 맏형
DJ 정권의 대표적 2인자는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과 권노갑 고문이다. 물론 정권 말기에 접어들면서 권 고문 보다는 박 실장에게 힘이 쏠렸던 게 사실이나, DJ 정권의 2인자는 ‘동교동계의 맏형’으로 불리는 권 고문으로 보는 게 통설이다.
권 고문 또한 DJ 정부시절 터진 진승현게이트에 연루돼 영어의 몸이 됐다. 이 후 연이은 각 종 비리 의혹과 관련해 ‘감방’을 들락거리는 신세가 됐다.
재미있는 것은 권 고문이 자신의 위치가 추락하게 되자 ‘동교동 라인’과 접촉을 일체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DJ에게 부담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2002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필자는 권 고문과 사석에서 만난 적이 있다. 이때 권 고문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제 (DJ)퇴임이 얼마 안 남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DJ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지내는 것이다.”
필자는 “무슨 말입니까, 정권 재창출하시고 고문님도 좋은 날이 다시 와야지요”라고 물었다. 이때 권 고문은 “누가 정권을 잡든지 칼날은 우리를 향하게 돼 있어, 그걸 누가 막겠어, 다 피할테지”라고 답했다.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권 고문 스스로 DJ와 거리를 둠으로써 군주(대통령)를 지키려 했다는 평이 나온다. 이로 인해 DJ로부터 버림받은 측근이라는 평과 스스로 군주를 떠났다는 평이 공존하고 있다.
권력의 2인자였던 권 고문은 현재까지도 법의 굴레 안에서 투옥과 가석방을 이어가며 노구(老軀)를 지탱하고 있다.

홍인길, 가신으로 청와대 입성
김영삼 정부의 2인자를 딱히 정해 누구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YS의 특별한 신임이 있었던 인물은 홍인길 청와대 총무수석이다. 때문에 홍 수석을 문민정부 2인자로 지칭하는 사람들이 많다.
홍 수석이 YS의 특별한 신임을 얻게 된 연유는 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두환 정권시절 YS가 단식투쟁에 돌입했을 때다. 전 정권이 처음에는 ‘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YS의 생명이 위급할 수도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전 정권은 YS를 서울대병원에 강제 이송시켰다. 이때 벌어진 일화다.
‘홍인길’은 갑자기 YS가 상도동에서 사라지자 이성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홍인길은 YS가 없어지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인근 연쇄점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웬걸, 연쇄점에서 경찰간부가 전화를 걸며 ‘상황끝’이라고 보고하고 있었다. 눈이 뒤집힌 홍인길은 정육점에 있던 칼을 잡고 그 간부의 목에 들이대며 “밖으로 나와, 죽여 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경찰간부가 “YS를 병원으로 모셨다”고 하자, 그때서야 인질(경찰간부)을 풀어줬다. 이 같은 일이 있은 후 YS는 홍 수석 얘기만 나오면, “무덤에 갈 때까지 같이 갈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홍 수석도 문민정부가 출범한 후 청와대 총무수석으로 입성한 게 ‘화’였다.
당시 한보회장이었던 정태수씨와 인연의 끈을 놓지 못하고, 산업은행에 한보에 대출해 주라는 압력을 행사해 결국, 정태수 회장으로부터 2억원을 받아 챙긴 혐의로 구속되고 말았다.
문민정부 말기에 터진 이 사건으로 홍 수석은 사법 당국의 처벌을 받고 말았다. 더욱이 한보사태는 IMF로 이어져, YS 정부에 큰 타격을 줬다. 이 때문인지 최근 사면 복권된 홍 수석이 간혹 상도동과 연락을 취하며 지내고 있지만 예전 같지는 않다는 전언이다.

장세동, 충성심 정치권 최고
전두환 정권의 2인자는 장세동 안기부장이다. 장 부장을 ‘영원한 전두환맨’이라고 부를 정도로 역대 대통령의 측근들 중 충성심이 가장 강했다. 장 부장은 잔악한 고문과 정치공작을 한 혐의로 3번의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도 전 대통령에 대한 ‘역할’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했다. 이로 인해 전 대통령과 가장 궁합이 잘 맞는 부하라는 평을 받는다.
이러한 충성심으로 인해 정치권에서 장 부장에 대해 극찬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의 위정자들이 위기의 순간에는 군주(대통령)를 배신해 왔기 때문이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의 2인자는 자신의 처고종사촌이었던 박철언 장관이었다. 박 장관은 LP(Little President)로 불렸을 정도로 막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박 장관도 YS 정부 출범 후 ‘철창’ 신세를 지는 몸이 됐다.

차지철, 궁정동 만찬 기획
박정희시대의 대명사는 단연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일 것이다. 차 실장은 대통령의 경호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이른바 ‘멧돼지’ 같은 저돌적인 면을 보였다고 한다.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는 동안에 대통령이 찾을 것을 염려해 화장실에도 전화기를 설치했으며, 박 대통령 전용 전화기에서 벨이 울리자 다이빙을 해서 수화기를 잡다가 허리를 다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그는 대통령과 함께 10·26의 총탄 속에 운명을 같이했다. 차 실장이 대통령을 보필하는 것은 거의 ‘집착’에 가까웠다고 한다. 육영수 여사를 잃고 혼자서 외롭게 저녁식사를 하는 박 대통령을 바라보다가 눈물을 흘리며 ‘궁정동 만찬’을 기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궁정동 만찬이라는 연례행사가 10·26의 운명을 낳았으니 어쩌면 차 실장과 박 대통령은 찰떡궁합이라기보다는 악연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곽영주, 교수형 당해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두 명의 최측근이 있었다. 한명은 이기붕 부통령이고, 또 한명은 경무대경찰서장(대통령경호실장역)인 곽영주다.
두 사람 모두 3·15 부정선거와 4·19의거에 의해 몰락했다. 이 부통령은 경무대 한켠의 작은 방에서 아들 이강석의 총탄에 죽음을 맞이했다. 이기붕의 죽음이 스스로의 운명을 받아들인 선택이었다면, 곽영주는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있었다.
곽영주는 5·16 쿠데타로 박정희가 정권을 잡자 ‘깡패일소정책’에 따라 이정재와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지만 곽영주는 살기 위해 끝까지 몸부림을 쳤다고 한다. 곽영주는 이 대통령이 하야 후 하와이 행 비행기를 탈 때 어떻케든 따라가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 직면해서도 이 대통령은 그를 살리기 위한 일언반구도 없었다. ‘토사구팽’이라고 보면 될까. 아무튼 곽영주는 교수형을 받는 그 순간 ‘이승만’에 대한 원망과 회한이 가득했을 것이다.
<언론인 김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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