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장편소설 제 49 회
김영수 장편소설 제 49 회
  •  기자
  • 입력 2011-08-16 14:20
  • 승인 2011.08.16 14:20
  • 호수 902
  • 4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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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구명시식(救命施食)

전생의 살인자를 찾아서-2

딱딱한 밤톨 위에 큰 기둥을 세우는 밤나무처럼 우리의 원형인 조상을 한 시도 잊지 말라는 뜻으로 밤을 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차례와 제사상에도 대추와 감과 더불어 반드시 밤을 올렸고, 장례식에 시신이 없으면 밤나무를 사람 모양으로 깎아 관에 모셨던 것이다.
그랬다. 목신은 다름 아닌 조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형상화한 것이었다. 왜 두 분의 시신이 없었던 것일까.
2년 전 면담자리에서 처음 본 조씨를 본 차법의 첫마디는 이랬다.

“할아버지를 위한 구명시식을 올려봅시다.”

조씨는 너무도 깜짝 놀랐다. 조씨가 50평생 마음속에 품고 있던 바로 그분을 위한 구명시식을 올릴 수 있다니.
중국 연해주에서 비적에 의해 살해된 할아버지는 시신조차 찾지 못했기에 위패만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다른 형제들도 있었지만 조씨처럼 할아버지를 끔찍이 생각하진 않았다. 조씨의 할아버지는 형제들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돌아가신 탓에 다른 가족들에겐 그저 족보상의 조상이었다. 하지만 조씨는 가족들은 의아해할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얼굴도 잘 모르는 할아버지를 유독 그리워했다.
조씨는 단단하게 응어리진 무언가를 평생 동안 늘 가슴 속에 담고 있었다. 서러움, 억울함, 답답함, 그리고 분노. 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특히 할아버지 생각을 하면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졌다. 조씨에겐 또 다른 이상한 비밀이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반복되는 꿈이었다.
길게 뻗은 철길위로 기차가 달리고, 부근에 강이 흐르고, 몇 개의 터널을 지나는데 터널을 향해 안간힘을 쓰지만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다시는 저길을 올라갈 수 없구나하는 안타까운 회한에 몸부림치는 꿈. 그 꿈을 꾼 날은 며칠간 입맛도 없고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조씨는 집히는 것이 있었다. 분명 할아버지께선 말 못한 사연이 있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살해된 할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고 싶었던 차에 구명시식을 하게 된 것이었다.
2년 전 구명시식자리에서 차법사 앞으로 호명된 조씨가 비감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꼭 알고 싶습니다.”

조씨는 구명시식을 통해 누가 범인인지 꼭 알고 한을 풀고 싶었던 것이었다.
영가가 나타났다. 차법사는 흠칫했다. 구명시식에 나타난 조씨의 할아버지 영가는 조씨와 판박이가 아닌가. 생김새는 물론이고 말투까지 똑같았다.
할아버지 영가는 억울하다며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했다. 그는 혼자 연해주를 간 것이 아니었다. 워낙 큰 거래라 친척과 동행했다. 중국의 비적들 때문이었다. 수시로 나타나 돈을 훔쳐 사람을 살해하는 비적에 대비하려면 친척 중 장정과 같이 가는 게 안전했다.
무사히 거래가 끝나자 생각대로 큰 돈이 들어왔다. 그는 돈을 받자마자 이튿날 고향으로 떠나기 위해 친척과 연해주를 떠났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할아버지는 모처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 것이다. 친척은 온 몸에 피를 묻힌 채 비적에게 당했다며 울부짖었다.
당시 가족들은 친척이라도 살아 돌아온 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후 친척의 행동이 이상했다. 돈 씀씀이가 커지더니 할아버지 쪽 식구들과는 일체 왕래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영가는 분노에 치를 떨며 말했다.

‘그 친척 놈이 나를 죽였습니다! 모처에 끌고 가서 살해한 뒤 돈을 뺏어 갔단 말입니다!’

차법사는 조씨의 눈동자에 이글거리는 분노 속에서 이글거리는 할아버지 영가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조씨에게 차마 이 사건을 다 말할 수 없었다. 구명시식의 목적은 미제사건의 해결이 아니라 영가 천도였다. 섣불리 전생을 알려주고 살인범을 알려주는 목적으로 구명시식을 하면 천기누설을 한 차법사 뿐 아니라 영가와 당사자에게 큰 신벌이 내리기 때문이었다.
차법사는 할아버지가 죽은 장소만 말해줬다.

“연해주의 목단강(모란강) 근처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장소와 일치하네요. 법사님, 그런데 혹시 범인도 알고 계십니까?”

차법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뭇거리는 순간 조씨가 기어코 그 말을 하고 말았다.

“OOO가 범인이죠? 맞죠? 저는 옛날부터 그놈이 범인인 걸 알고 있었습니다.”

A씨의 눈동자에서 할아버지 영가를 어렸다. 조씨의 전생은 바로 연해주에서 살해된 할아버지였다. 그는 무의식중에 전생의 살인범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조씨도 그 순간 자신이 왜 그토록 할아버지를 그리워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전생이었기 때문이다. 연해주에서 억울하게 죽은 자신을 생각하면 무의식적으로 원통해하며 슬퍼했던 것이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차법사로서는 등골이 서늘했다.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었다. 전생의 살인자를 찾아낸 그가 어떤 일을 저지를 것인가.

“할아버지께서는 억울하게 돌아가셨지만 큰 눈으로 보면 그렇게 당할 만한 전전생이 또 있지 않겠습니까? 누가 피해자인지 누가 가해자인지 가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보복의 사슬을 끊는 게 중요하지요.”

그랬다. 악연의 인연을 끊는 게 중요했다. 차법사가 신벌을 각오하면서까지 조씨의 구명시식을 강행한 건 그런 기대 때문이었다. 조씨는 과연 악연의 악순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것인가.
조씨는 구명시식이 끝나자마자 그 친척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그 친척은 오래전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연해주에서 돌아온 친척은 큰 사업을 하다가 이듬해 6·25전쟁이 터지자 다른 친척에게 밀고를 당해 인민군에게 끌려가 억울하게 옥사하고 만 것이다. 그 후손들도 넉넉지 못하게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다. 고스란히 선대의 과보를 받고 있었다. 조씨는 그 전말을 되돌아보며 느낀바가 컸다.
그때부터 조씨에게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업이 대박 난 것이다. 연고도 없는 곳 여기저기서 주문이 들어오고 큰 계약이 밀려들어왔다. 겁이 날 정도였다. 조씨는 선원을 찾아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저에게 너무 복이 넘칩니다. 제 복을 형제들에게 나눠주세요.”

차법사는 조씨의 기도를 듣고 있었다. 참으로 갸륵했다. 백이면 백 차법사를 찾아온 사람들은 대박을 염원했고, 대박이 터지면 더 큰 대박을 소원하기 일쑤였다. 이렇게 대박을 마다하는 사람은 정말 드물었다. 조씨의 행동은 영혼들을 감화시켰고, 그래서 복을 만드는 법을 훌륭하게 체득하고 있었다.
이듬해 조씨는 정말 간신히 입에 풀칠만 할 정도로 사업이 저조했다. 하지만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차법사가 조씨를 다시 불렀던 것이다.

“구명시식 한번 다시 합시다. 이번엔 시신이 없으니 두 분의 밤나무로 목신을 만들어 오세요.”
조씨는 기가 막혔다. 얼마 전 마침 실향민 공원묘지에 할아버지 묘자리를 마련한 것을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조씨는 구명시식 영단에 목신을 가지런히 올리고 마지막 절을 올렸다. 차법사는 가슴이 뿌듯했다. 동참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감회를 대신했다. 

“잘 들으세요. 죄(罪)의 한자를 파자하면 ‘사(四) +비(非)’입니다. 4가지를 부정한다는 뜻입니다. 이 4가지란 생년월일시(生年月日時) 사주(四柱)를 말합니다. 죄란 지금 이 시간 이 순간을 부정하는 것이지요. 현실이란 전생으로부터 형성된 과보가 관철된 것이니 자신의 과보를 알지 못하고, 무작정 남 탓을 하는 게 얼마나 큰 죄입니까. 남 탓을 하는 원한이란 자신의 과보를 제대로 관조하지 못하는 데서 나옵니다.”

인간의 법에 의해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되었지만 ‘하늘의 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죽고 죽인 죄가 없음을 알려주는 자리였다. 차법사는 경건한 염불로 자리를 정돈했다.

자살은 영혼의 타살-1

“땡그랑, 땡그랑, 땡그랑-”

청량한 요령소리와 함께 영단 앞으로 나온 중년의 부부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미안하다, 얘야. 니가 그렇게 마음이 아팠던 줄 정말 몰랐다. 이 무심한 어미가 너무 미안하구나. 니가 원하던 걸 들어주었어도…….”

부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17살 아들을 잃은 부부였다.
애지중지 다 키운 자식을 하루아침에 잃었으니 그 슬픔이 얼마나 클까. 부부가 이 자리에 온 것은 아들이 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아들의 잘못을 속죄하고 싶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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