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장편소설 제 44 회
김영수 장편소설 제 4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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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07-12 13:39
  • 승인 2011.07.12 13:39
  • 호수 897
  • 4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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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일수사견(一水四見)

한 가지 물에도 네 개의 눈이 있다(一水四見)-3

“다음 주 토요일에 구명시식이 있으니 다들 동참하세요.”

한마디로, 더 이상 말이 아니라 직접 영혼의 세계를 느끼라는 것이었다.

“구명시식을 볼 수 있는 게요, 형님?”

구명시식은 제주 이외에는 절대로 공개하지 않는 비밀스런 의식이었기에 귀한 초대장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특히 용화선생께서는 조상님 위패를 올리도록 하세요. 다른 분들은 참관만 하시고. 용화선생께선 제주가 되는 겁니다.”
“아따, 형님. 누군 하고 누군 안하고, 법사님께서 용화선생만 편애하시는 거 아닙니까?”

조기자가 너스레를 섞어 따지는 시늉을 했다.

“그런 건 아니구…….”

지천태의 호기심이 발동되었다.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구명시식 대상 기준이 따로 있습니까?”
“있지요.”

조기자의 눈이 빛났다.

“뭡니까?”
“장미꽃을 그리는 화가가 있다고 칩시다. 화가가 그리는 것일까, 장미가 그리게 하는 것일까?”

조기자는 차법사가 뻔한 질문을 할 것 같지가 않아 넘겨짚었다.
“장미가 그린단 말씀이오?”
“그렇지. 수 많은 대상 중에 왜 하필 화가가 장미를 택했겠나. 장미의 간절한 염원이 있기 때문이지.”
“…….”
“영혼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영혼을 부르는 것 같지만, 사실 영혼이 나를 부르는 일이 훨씬 많죠. 자손이 조상을 부르는 것 같지만, 거꾸로 조상 영가가 자손을 부르는 겁니다.”
“구명시식 올릴 사람은 영계에서 주문이 들어온다는 것이네요.”
“병원에 가면 약 줄 환자, 응급실 환자, 수술 환자로 나뉘는 것처럼, 구명시식은 일종의 위급한 환자 대수술이라고 보면 돼요. 가장 난감한 경우가 고위 공직자나 재력가, 정계인사들입니다. 이런 VIP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당일 면담비와 구명시식 비용을 모두 지불할 테니 혼자 하게 해달라고 주문하거든요. 자판기처럼 뚝딱 되는 줄 착각하는 거지요.”
“어디 가나 VIP가 있기 마련이죠.”
“여기 대통령이 있고 재벌회장이 있다고 칩시다. 과연 대통령이 있고, 재벌회장이 있을까요?”
“…….”
“나라 일을 업으로 하는 개인, 큰 장사를 하는 개인만 있을 뿐입니다. 영혼의 세계엔 민족이나 국가는 없으니까요.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업장을 가진 영혼만이 있는 것이지요.”
“참, 쉽고도 어려운 말씀이네.”
“그래서 인연이 중요합니다. 조금 더 큰 눈으로 보면 모든 게 인연이죠.”
“인연이요?”
“보이는 인연, 시간을 초월한 보이지 않는 인연. 오죽하면 부처님도 정업(正業)은 못 면하고, 인연 없는 중생은 구제하지 못한다고 했을까요. 영가가 산 자를 부르는 것도 다 인연입니다. 구명시식은 그 인연을 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할지 몰라요.”

조기자는 궁금한 게 많았다.

“형님, 몇 분간의 짧은 시간에 면담자의 일신상을 어떻게 간파한다요?”
“허허허. 영혼의 세계에는 시간이 없어. 순식간에 몇 천 년, 수 개의 전생을 오갈 수도 있지. 나도 달리 설명할 수가 없네. 생각의 찌꺼기가 한 티끌만이라도 있으면 안 되거든. 구명시식 동참자들은 '믿음'이 중요해. 알아서 믿기보다 믿어서 아는 지혜.”
“어떻게 형님을 취재하면 할수록 더 미궁에 빠지는지 모르것소. 참 거시기허요.”
“허허허, 거시기라? 그게 정상이야. 나도 영혼을 탐험하면 탐험할수록 더욱 모르겠거든. 우주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더 무변광대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어도 보이는 사람만 보이니까.”
“음, 기자로서 한계가 오네.”
“아는 자는 알지 못하는 바가 있고, 알지 못하는 자야말로 아는 바가 있지. 가장 많이 아는 자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자야. 그러니 내 말 몇 마디로 절대 단정하지 말게. 알다가도 모를 곳이 영혼의 세계이니. 특히 구명시식에는. 쿨럭, 쿨럭.”

갑자기 차법사가 발작적으로 기침을 해댔다. 차법사는 조금 전보다 더욱 안색이 초췌해져 있어 눈두덩이 주위엔 검은 테가 둘러싸여 있고 입까지 부르터 있었다. 지천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많이 편찮으신데요.”
“쿨럭, 쿨럭, 아, 감기가 조금 들었나봅니다.”
“병원에 가보셨어요?”
“병원은 뭐. 그냥 지어놓은 약 먹었는데 괜찮겠죠.”
“매우 피로해 보이세요. 어제 밤 새셨죠?”
“그런가? 생각해보니 일하다 그냥 나온 것 같아.”
“법사님은 하루 두, 세 시간도 안 주무시니까 그렇죠? 잠 안 자고 버틸 장사 없어요. 제가 잘 아는 병원이 있는데 영양제 한대 맞으세요.”
“나는 주사바늘이 제일 무서워.”
“네? 귀신도 한방에 쓰러뜨리면서 엄살은……. 예쁜 간호사가 손도 잡아줄지 몰라요.”

일행은 차법사가 체면상 완곡하게 거절하는 것이라 여겨 여러 차례 권유했다. 하지만 차법사는 덕담으로 받아넘길 뿐, 평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완고하게 거절했다.

“내 병은 내가 잘 압니다.”

불덩이 같이 열이 올랐다 내렸다 하고, 침에서 쓴 물이 돌았다. 물에 젖은 솜처럼 온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구명시식을 앞두고 흔히 있는 현상이지만 이번엔 그 정도가 심했다. 특히 배가 뒤틀리도록 복통이 심했다. 입맛이 돌지 않아 제대로 된 식사를 한 지가 이틀 전이었다. 그나마 어제 밤부터는 먹은 건 물 뿐이었다. 이럴 때 병원에 간 적은 없다. 일행들의 끈질긴 재촉이 이어지자 차법사는 화제를 돌렸다.

“뜨끈한 차나 한 잔 마시자고. 몸이 확 풀릴 겁니다. 구명시식 끝나면 말끔할 텐데 뭐.”

차법사의 병환은 이번 구명시식도 만만치 않으리란 예고였다.

“그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차에는 약리작용도 있으니까요.”

차호를 다시 데우고 물을 붓는 지천태의 손놀림이 능숙했다. 차법사는 마치 소가 쓰러지듯 힘겹게 몸을 뉘였다. 두 사람이 달려들어 그를 부축했다.
차법사 눈에는 수십 명의 환자영가들이 어른거렸다. 머리카락이 없고, 온 몸에 칼 수술 자국이 선명한 앙상한 영가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인민군 복장을 하고 피투성이가 된 영가도 있었다. 비릿한 역겨운 냄새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고통을 호소하는 신음소리에 차법사는 마치 지옥의 한가운데 떨어진 것 같았다.


6장. 구명시식(救命施食)

이리하여도, 저리하여도 옳지 아니하다-1

동숭동 대학로엔 어둠이 내렸다. 구명시식을 올리는 선원의 밤은 더욱 짙었다. 법단 중앙엔 검지를 손으로 쥐어 가린 비로자나 불상, 좌측엔 소박한 지장보살 석상, 우측엔 영가 위패를 모신 영단이 자리하고 있다. 양쪽의 촛불은 미동도 없이 고요히 타올랐다. 방음벽으로 둘러싸인 선원은 깊은 동굴처럼 고즈넉했다. 이 모두가 영가들이 좋아하는 음기를 모으기 위한 조치였다.
본래 구명시식(救命施食)은 고승들이 중생들의 병을 치유하려는 의식인 구병시식(救病施食)에서 따온 말이었지만 차법사가 영혼을 천도하여 생명을 구하는 의식으로 발전하서 구명시식이란 고유명사로 자리 잡게 되었다. 형식은 여느 천도제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내용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용화, 조기자, 지천태는 20여명의 동참자와 함께 나란히 뒷자리에서 본식이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10가족을 모신 영단 위패는 말이 없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30분가량의 묵상의 침묵이 흘렀다. 참관하는 조기자와 지천태는 느긋했지만, 제단에 이름을 올린 용화는 그렇지 못했다.
돌아가신 동곡 스승과 대화를 나눌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만약 증산과도 통할 수 있다면 그 어찌 영광이 아니겠는가. 용화는 내심 그 분들로부터 어떤 계시를 내려 받길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기대와 흥분으로 입이 바짝 타들어갔다.
식을 진행하는 예불 스님이 지장경 7품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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