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장편소설 제 41 회
김영수 장편소설 제 41 회
  •  기자
  • 입력 2011-06-21 14:13
  • 승인 2011.06.21 14:13
  • 호수 894
  • 4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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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일수사견(一水四見)

미륵은 하나인가-2

“말씀 중 죄송합니다. 조금 눈 좀 부쳤더니 이제 가뿐하네요.”
“형님, 벌써 다 주무신 거요? 집에 가서 편히 주무시지 만날 쪽잠이요.”
“타고나서 어쩔 수 없어. 야행성 체질이라 밤엔 정신이 말똥말똥하고, 낮에는 사람들 만나니 잘 틈을 놓쳐서 그렇지 뭐. 이름에도 쓰여 있잖아.”
“이름에? 그건 또 뭔 소리요?”
“내 이름이 별 진(辰)자, 길할 길(吉)자니까 별이 길한 밤에만 빛나니 야행성일 수밖에.”

오랜만에 살벌했던 설전공방을 잊고 좌중에 웃음이 일었다.

“하시던 말씀들 하세요. 저도 비몽사몽 듣고 있었으니까요.”
“말 잘했소. 형님께 뭐 하나 물을 게 있소.”
“뭘?”
“형님 생일이 정해(丁亥)년 4월 8일 맞소?”
“내 생일? 그게… 그렇기도 하고, 안 그렇기도 하지.”
“아따, 그건 또 무슨 말씀이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여러 날 나누어서 태어난 사람도 있소?”
“아, 농담이 아니야. 왜 그러냐하면… 몇 해 전에 하나가 더 늘어서 그래. 그래서 생일이 세 개야.”
“네에?”

좌중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지천태는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또 하나는 또 뭔가요?”
“들어보세요. 그동안 내가 알아오기론, 4월 8일 태어났지만 호적에 올릴 때 친척 분이 4월 7일로 올렸대요. 나는 죽 그런 줄 알고 그동안 4월 8일에 생일을 지내오고 있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게 본래 생일이라며 다른 날을 말씀해주시는 게 아닙니까.”
“본래 생일? 거참, 이건 출생의 비밀이구먼.”
“1947(丁亥)년 4월 10일 생이라는 거였어요.”
“아니, 왜 그동안 틀린 날에 생일을 했답디까?”
“이유가 있지요. 용한 역술가가 4월 10일은 인신사해(寅申巳亥)가 모두 들어간 사주, 즉 세상을 바꿀 역모 사주라 해서 살아남질 못한다고 했대요. 그래서 남몰래 그렇게 8일로 임의로 바꾸었데요. 호적엔 대충 7일로 신고 했나 봐요. 부모님께서 호적생일과 다른 8일로 지내면서도 왜 굳이 호적일인 7일로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으셨는지, 그때서야 처음 알았지요.”

명리학에 일견이 있는 지천태가 중얼거렸다.

“인신사해가 함께 들어간 사주는 처음 보는데…….”
“허, 참. 겁나게 어렵소, 형님. 이것이 한마디로 기른 부모가 진짜 부모냐, 생모가 진짜 부모냐, 아니면 호적상의 부모가 진짜냐 하는 거 아니오?”

조기자가 일견을 냈다.

“이름도 호적에 뭐라 되어 있든, 평소 불리는 이름이 진짜 이름인 것처럼 생일도 실제로 한 갑자 넘게 미역국 올린 4월 8일로 보면 되는 거 아닌가?”

지천태가 문득 스치는 생각을 던졌다.

“용화선생께서 성장공사도에서 매화 가짓수가 4개라 4월이고, 반달은 7.5라 했는데, 7.5는 7일도 아니요 8일도 아니라서 그랬을까요?”

그 말에 용화가 토끼처럼 귀를 세웠다. 좌중을 돌아봐도 서로 눈길이 맞는자가 없었다. 조기자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찌거나 저찌거나 난 두발 두 손 들었소. 갈수록 첩첩산중, 한치 앞이 오리무중일세. 호적 따로, 난 날 따로, 지낸 날 따로…….”
천기의 응집은 산맥처럼 고르지 않아서 가감(加減)이 있는 입체적 아날로그인데, 획일적이고 균등한 평면적 디지털 숫자로 꿰맞추려는 시도 자체가 어불성설인지 모를 일이었다.

“형님께서 판결을 좀 내야 쓰것소.”

조기자가 차법사에게 공을 떠넘겼다.

“무슨 판결?”
“톡 까놓고 야그좀 하소. 인류 종말이 언제요? 또 출세한 미륵은 누구요?”
“…….”
“아따, 용화 선인께선 13번째 지도자가 미륵이고 2014년에 세상이 통일 된다고 하고, 형님은 2012년이라 하고, 누구는 미륵이 여럿이라 하고……. 난 당최 종잡을 수가 없소.”

일제히 차법사를 바라보았지만 차법사는 곤란한 표정만 지을 뿐, 옳다 그르다 말이 없었다. 답답한 듯 조기자가 차법사를 조르다시피 했다.

“형님, 뭐라 말 좀 하소. 멀리서 정성스럽게 천문을 해설하러 온 사람의 성의를 봐서라도 무슨 논평을 해야 하는 게 도리 아닙니까?”

도리까지 들먹이며 압박하자 차법사가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인간의 번뇌를 끊은 존재가 부처나 신으로 생각하지만, 나는 108번뇌야말로 부처의 본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108번뇌의 공약수가 탐욕, 화냄, 어리석음의 탐진치(貪瞋痴)이고, 이 탐진치야 말로 부처의 본성이라고 보는데……. 번뇌 없이 어떻게 깨칠 수 있을까요? 빛과 그림자 아닐까요? 둘이면서 하나고, 하나면서 둘인.”
“…….”

뜬금없는 108번뇌 운운에 일행은 짙은 안개 속이었다. 차법사의 음성은 시냇물처럼 조용히 흘렀다.

“누군가 부처도 인과법칙(因果法則)을 받느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조기자가 볼멘소리를 했다.

“부처가 번뇌하고 과보를 받으면 부첩니까? 중생이지.”
“나는 달리 생각하네. 부처도 번뇌에 든다고.”
“그럼 불자들은 뭐하러 부처님을 믿습니까. 번뇌를 벗어나는 게 기도하고 염불하는 불자들은 뭐란 말이오?”
“너무 흥분하지 말고……. 중생이나 부처나 인과를 벗어날 순 없어요. 부처는 중생들처럼 병에 안 걸리고 죽지 않았나요?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잤지요. 다만 중생과 부처가 다른 점은, 부처는 그 번뇌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잘 안다는 것이에요. 그 오가는 길이 도(道) 아닐까요. 그러니 도를 모르는 중생은 눈을 떠도 장님인 게지요.”
“…….”
“사람들은 곤경에 처하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전생에 지은 과보 때문에’ 이렇게 말들 많이 하더라구.”
“형님, 그게 틀렸단 겝니까?”
“그럼 내가 물어보겠네. 동생은 당신의 전생을 아는가? 업보를 아는가?”
“그야…….”
“말에 속지 말라구. 말로는 쉽게 전생, 업보라고들 하지만 정작 본인의 전생이나 업보를 아는가? 말해서 머리로 이해하면 그걸 안다고 착각하지. 그래서 언어는 거대한 환상이라 하는 거야. 사람을 판단할 때, 상대방이 말을 잘하는 것인지, 깨닫고 행실을 그렇게 하는 것인지 잘 구별해야 안 속는다고.”

조기자가 끄덕거렸다.
“음…….”
“인간의 비밀이 우주의 비밀입니다. 비밀을 푸는 열쇠는 자기 안에 있어요. 그런데 그걸 밖에서 구하려고들 해요. 자기 안에서 핀 꽃이 가장 아름다운데…….”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차법사가 조기자를 바라보며 문제를 냈다.

“대인(大人)과 소인(小人)이 어떻게 다르겠나?”
“지금 제게 물은 거요?”
“그래.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생각난 대로 답해.”
“마음이 넓으면 대인 아니것소. 틀리오?”
“글쎄?”
“남을 위해 베풀 줄 알면 대인인가?”

조기자뿐 아니라 저마다 가장 이상적인 인물상을 그리고 있었다. 차법사의 대답은 간단했다.

“목욕탕에 가보면 알지.”
“목욕탕?”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어. 목욕탕 매표소에서 초등학생 이상이면 대인, 미만이면 소인이니까.”

후하하-

세 사람은 오랜만에 파안대소했다. 차법사는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알고 보면 대인과 소인을 구별하는 요령 또한 이에 못지않게 간단합니다. 부처와 중생의 차이점 중의 하나이기도 해요. 중생은 부처와 중생을 따로 구분하지만 부처는 두두물물 모든 것이 부처라고 답하지요. 나와 너를 구분하면 소인이요, 분별심(分別心)이 없이 모두 ‘나’이면 대인입니다. 어때, 그럴싸하지요?”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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