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일수사견(一水四見)
도수(度數)가 획수(劃數)일까-2“들어봅시다, 그 이유가 뭔지.”
“유훈 해석이 특정 종파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서 고의적으로 위작을 만들었다고들 주장하지요.”
조기자는 검은 뿔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종파 간 정통성과 세력다툼이군.”
“허나 친필이 아니라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은 일관된 주장을 해야만 합니다. 만약 증산 친필이 아무 것도 없다면 지금 수많은 경들은 무엇이지요?”
“…….”
“모두 구전된 것을 수십 년 지나 채록한 것입니다. 이걸 진본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진본이 아니라 못 믿겠다면 어찌 구전 채록한 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자기 얼굴에 침 뱉기지요.”
“…….”
“저는 천문이 당연히 진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용화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그래서 어떤 근거가 있을 거 아닙니까?”
“필적을 보아도 그렇지요. 기초동량이란 글자가 나머지 현무경과 일치합니다. 이것저것 떠나서 결정적인 것은 천지공사의 내용입니다. 천문은 도수가 물샐틈없이 정밀하게 설계되어 있으니까요. 이보다 더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요.”
조기자가 한발 물러섰다.
“결국 유물 진위 문제보다 누가 제대로 해석을 했느냐 하는 게 관건이 되겠군요.”
“그렇지요.”
“저번에 천문에 대한 좋은 말씀 듣고 복사본 주신 것으로 나름대로 연구를 했습니다. 그런데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지천태가 연구했다는 말에 용화는 천문해설이 헛되지 않았구나 싶었다.
“뭐든 성심껏 해설해드리지요. 다만 천기누설은 빼구요.”
“천지도수가 과연 획수냐 하는 겁니다. 아니 과연 도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
너무나 기본적인 토대를 의심하고 있기에 용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천태는 신장공사도를 폈다.
“가령 이 현무경의 청조의 날개 숫자만 해도 그렇습니다. 자세히 확대된 그림을 보니 획이 한 두 개 더 들어 있습디다. 세는 바에 따라 8개가 아니라 7개도 9개도 될 수 있소. 양날개 총합이 14나 16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21개의 점이 찍힌 불상 아래 좌우로 뻗은 갈대 숫자 또한 얼마든지 두세 개를 넣고 뺄 수 있구요.”
당황한 용화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지천태는 나름대로 해석을 계속했다.
“성장공사도에서도 그렇습니다. 매화 가짓수가 4개라 4월이고, 반달은 7.5라 8일이라고 했고, 그래서 출세한 미륵이 경신년 4월 8일 생이라며 증산 선생 유서 말미에 써 있는 4월 8일과 같다고 했는데, 매화 나뭇가지 수는 크게는 5가지, 안쪽으로 꺾여 감긴 3개를 합하면 8개가 됩니다. 보통 매화는 초봄을 상징하고 4월에 꽃이 피긴 하지만 그림 획수에 있어서는 분명 4수리는 아닙니다.”
“…….”
“그뿐인가요. 어떤 글자는 옥편 획수로 세고, 어떤 글자는 파자(破字) 절문으로 세고 하니 일관성이 없는 거 아닌가요?”
조기자는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고무된 지천태는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그야말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여러 개의 자의적 변수를 두어 획수를 센다면 자기가 원하는 획수를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지요. 한 획 한 도수가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면 과연 획수가 도수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
여전히 용화는 입술을 굳게 닫고 있었다.
“그래서 천문에 도수가 있기나 한 건지 아니면 해석이 잘못된 건지 의심이 됩니다.”
날카로운 논리에 용화는 몇 번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도수를 세는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요. ‘천지사풍이제원’도 세기에 따라 105가 되기도 하고 106수가 되기도 하지요. 그러니 여러 장의 천문을 전체적인 맥락을 본 뒤에 선택을 해야 합니다. 문의 이치를 서로 접속하여 혈맥이 관통하도록 해석하라고 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도수는 한 치도 어김없이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말 그대로라면 하나만 틀려도 모두 틀린 것이 되지 않습니까?”
“상제님의 도수는 분명히 있습니다. 다만 공부하는 우리들이 아직도 연구가 모자라 제대로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승님이 놓친 부분을 찾기도 했지만, 저에게도 분명 미비한 부분이 있을 겁니다. 상제님의 유서 전체적 의미에서 큰 뜻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지요.”
초반부터 지천태의 예리한 문제제기에 용화는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지천태의 날선 질문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천문에 예언한 미륵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겁니다. 물론 천기누설이라며 말씀은 안 하졌지만요.”
용화가 물었다.
“지선생께선 누구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사실 유훈 두 점에 대해 저는 처음부터 다른 해석을 내렸습니다. 용화선인께서 신장공사도, 미륵탄생공사서, 단주수명서를 설명하실 때, 머릿속에 내내 차법사님이 미륵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차법사란 이름이 튀어나오자 용화뿐 아니라 조기자도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
“현무경을 처음 볼 때 용화와는 달리 나름대로 직관적으로 느낀 점이 있습니다. 저는 해석보다는 눈에 보이는 글자 그대로 보았습니다.”
“글자 그대로라면…….”
“가령, 혁필인 신장공사도 신(信)자의 인(人)자는 사람이니까 증산 이후 천지공사를 할 인물을 가리키며, 그 인물이란 두 마리 학으로 묘사했다고 행각합니다. 언(言)자는 증산 선생이 전하고자 하는 말로 보았습니다. 즉 신(信)이란 21년간 불교식으로 해원을 하는 인물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장공사도 성(誠)자의 언(言)자 역시 증산 선생이 전하고자 하는 말이고, 이룰 성(成)자는 무언가 이루는 것을 의미하는데, 위패를 모시고 해원하여 이룬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장공사도 또한 증산 선생께서 경(敬)대신 예(禮)로 대치한 것은 예(禮)자의 보일 시(示)를 써서 ‘역(易)을 보여준다’라는 뜻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니 또 그럴듯하네.”
조기자는 지천태의 해석에 눈을 끔벅거렸다.
“저는 증산의 경이나 책을 정식으로 본 적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보이는 대로 즉석에서 해석했을 뿐입니다. 너무 허무맹랑한가요?”
지천태가 용화의 눈치를 살폈다. 용화는 굳은 표정에 여전히 말이 없었다.
“…….”
“이왕 말 나온 김에 계속 말씀 드리죠. 불상이 21수리에 맞게 출세한 미륵이고 그 위치가 금산의 오류봉 아래 금곡 저수지를 말하는 것이라 설명하셨는데, 순간 저는 법사님 작년까지 계셨던 잠실 송파선원이 떠올랐습니다. 법사님께선 21년간 잠실 송파에서 구명시식을 하셨으니까요.”
“…….”
용화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
“선원이 위치한 송파는 백제 근초고왕릉을 비롯해 초기 백제 왕릉이 위치한 곳이고,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처음으로 한반도에 불교를 전한 의미심장한 터입니다. 또한 북쪽에 올림픽 공원이 있는 오륜동에 위치하고, 그 아래 송파나루 습지가 펼쳐 있다는 사실도 일치합니다. 오류봉은 오륜동, 습지는 송파를 뜻한다는 게 아닌가요?”
“…….”
“불상형태의 사람 몸에 찍힌 21개의 점이 21년간의 구명시식을 뜻하고요.”
지천태는 출세한 미륵이 차법사란 증거를 조목조목 열거하자 용화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계속해보세요.”
하지만 조기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천태를 부추겼다. 지천태는 이제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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