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장편소설 제 34 회
김영수 장편소설 제 34 회
  •  기자
  • 입력 2011-05-03 10:16
  • 승인 2011.05.03 10:16
  • 호수 887
  • 62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5장. 일수사견(一水四見)
언어가 끊어진 곳-2

삐걱거리는 시골 버스를 타고 먼지가 뽀얗게 이는 시골길을 지나 산사에 접어드는 큰 길, 일주문을 지나 극락암에 올랐다.
경봉스님은 구산스님이 왔다는 말을 상좌에게 전해 듣고 직접 신발을 신고 내려와서 구산스님을 맞았다. 이미 경봉과 구산은 한국 불교계에서 선의 거인으로서 알려져 있었으나 그들이 만나 서로 반가워 손을 잡고 즐거워하는 것은 여타 시골농부들이 표현하는 감정과 별다른 점을 찾지 못했다.
두 선지식은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들을 가끔 쓰시면서 서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셨다. 차법사는 경봉스님의 상좌와 다른 스님들과 함께 시중을 들면서 의도적으로 스님들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서로의 대화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긴장시켰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드디어 본격적인 도담(道談)이 시작될 것이라는 예상이 들었기 때문이다.

“구산스님은 요새 행상을 하고 다니신다면서요?”

이것은 구산스님께서 한곳의 절에 머물지 않고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법문을 하시고 불교를 전파하고 제자를 수백, 수천 명씩 불문에 입문시키는 일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수행자가 한 곳에 가만히 앉아서 도나 닦을 일이지 세간에 쉽게 나가 활동하는 것을 약간 비꼬아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자 구산스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야 가계가 엿장수 아들이니까 가난합니다. 스님이야 백화점을 가지고 계시니까 저처럼 행상을 다니시지 않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요즘은 외국까지 나가서 행상을 한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경봉스님은 껄껄껄 크게 웃었다. 이야기인즉 구산스님의 은사이신 효봉스님이 만행을 할 때 엿장수를 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닌 것을 말한 것이었고, 또한 백화점은 당시 경봉스님을 만나기 위해 운해처럼 모여들던 극락암의 모습을 빗댄 것이었다. 외국에 나가서 행상을 한다는 것은 구산스님이 70년대 말, 80년대 초 미국의 LA 등지를 법문하면서 방문, 외국인 제자들을 수백 명씩 한국으로 수학하게끔 만들었던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경봉스님은 구산스님의 세간체류를 비꼬려다가 구산스님의 백화점 이야기에 오히려 비꼬임을 당하신 것이다.
경봉스님은 몸을 앞으로 내밀며 웃는 모습으로 말했다.

“산천경계를 다 보면서 세상을 돌아다니시니 얼마나 좋으시겠습니까? 그거야 스님이 아직 저보다 근력이 좋으시니 그런 것 아닙니까? 그렇죠?”

하루 종일 그런 범부(凡夫)들의 잡담이 이어졌다. 용호상박이 겨루는 선문답을 바라던 젊은 차법사의 기대는 와르르 무너졌다.
차법사는 추억에서 깨어나듯 김이 모락모락 피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어요. 하지만 그날 두 분의 소박한 대화에서 다른 것을 알게 되었죠.”

다들 귀를 쫑긋 세웠다.

“그것은 바로 수도의 깊은 경지나 선의 궁극이 일반 범부들의 세상살이의 즐거움과 결코 다르지만은 않다는 매우 평범한, 그러나 호흡이 긴 알음알이라는 사실을 얻게 된 겁니다.”
“…….”
“그맘때 이야기입니다.”

차법사는 다른 이야기로 옮아갔다.

“그 암자에는 도력이 높은 스님이 한분 계셨어요. 그런데 지역유지 한 분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풀이 죽어서 제게 하소연했어요. ‘차거사,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이 뭐요? 이 양반이 스님을 뵙고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자 스님이 던진 말이었어요. 자기가 며칠 밤을 새워 아무리 풀려 해도 알 수가 없다나요. 여기 계신 분들 과연 전삼삼 후삼삼이 무슨 뜻일까요?”
“글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가벼운 퀴즈 푼다고 생각하세요.”

용화가 자신 있게 나섰다.

“전쟁 현생 후생의 삼생이라고 봅니다. 또한 삼은 천지인 삼수 기본을 말하는 것이고요.”

해박한 풀이가 과연 맞을지 차법사 입만 쳐다보았다.

“내가 그 유지분께 뭐라 했는지 아세요? 사장님,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뒤로 세 발자국, 앞으로 세 발자국 걸어보세요.”
“그럼 제자리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 분도 같은 말을 했어요. 그게 답 아닐까요? 하하하!”

조기자도 한바탕 웃어젖힌 후 말을 꺼냈다.
“형님, 재미나오. 큰스님 말이라고 너무 깊이 생각했으니 어려울 수밖에.”
“그래. 대부분 불가에서 견성을 했다거나 아니면 선방에서 몇 십 년 선수행을 한 선객들은 어딘지 모르게 눈빛이 남다르고 감히 범할 수 없는 강한 영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 일반 사람들은 쉽게 느끼지 못하지만 어느 정도 그런 스님들을 대할 기회가 있었던 사람이면 수행이 높은 스님들의 눈만 보고도 그 스님의 법력을 가늠할 수 있게 돼. 대부분 고승들은 자신들의 선지식을 구하러 온 납자들을 상견할 때 몇 마디 화두를 던져 그 그릇을 시험해보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눈만 보고, 아니면 더 나아가서 눈도 보지 않고 앉아 있는 모습이나 걸음걸이, 목소리만 듣고도 그의 능력과 수행 정도를 파악하고 되돌려 보내는 경우가 허다해. 그야말로 언어도단의 입정처에는 묵언만이 있지.”
“언어도단의 입정처라…….”
“어려울 거 없어. 어느 대성당 앞에 거지가 있었어. 휴일이면 수천 명씩 오가는 신도들 앞에서 매일 구걸했지. 한 신도가 신부에게 말했어. 신성한 성당 앞에 지저분한 거지가 돌아다녀 보기 싫으니 내쫓으란 거였지. 그러자 신부 왈, ‘왜 여러분의 스승을 몰아내려 하십니까? 거지는 여러분의 스승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보다 거지를 보면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하며 열심히 살잖아요. 저 거지야말로 여러분이 섬겨야 할 살아 있는 성인입니다.’”

와하하하.

일동은 웃음을 터뜨렸다. 옛날이야기 듣는 사랑방 같은 분위기였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그 묵직한 무언가가 있었다.


도수(度數)가 획수(劃數)일까-1

차법사는 갑자기 일행에게 양해를 구했다.
“미안한 말씀을 드려야겠어요. 오늘 몸이 많이 안 좋습니다. 제가 며칠간 통 잠을 못 자서요. 저쪽에서 잠시 눈을 붙여도 되겠습니까?”

차법사 안색이 몰라보게 안 좋았다. 다크서클이 짖고 피부가 누렇게 떠 있었다.

“아까부터 많이 피곤해 보이시더만, 가서 푹 쉬소. 이거 우리가 눈치 없이 앉아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것소?”

조기자가 미안한 듯 엉덩이를 들썩였다.

“아니, 아니, 난 한숨 쉬면 곧 회복돼. 내가 날 잘 알잖아. 곧 합석할 테니 차 한 잔들 하고 이야기 나누세요. 그리고 조기자는 살살 하라고.”
“네, 뭐라셨소?”

차법사는 더 이상 대꾸 없이 병풍을 치고 그 뒤로 들어가 버렸다.
용화는 힘이 쭉 빠졌다. 작심하고 천문의 핵심을 전달하길 별렀는데 정작 차법사가 빠지니 이건 팥소 빠진 찐빵이었다. 그래도 곧 합석하리란 언질에 좀 위안이 되었다. 이런저런 잡담으로 시간을 보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조기자와 지천태는 그럴 마음이 아니었다.
“저번 해설을 듣고 나름대로 공부해보았습니다. 원론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 유언이 진짜란 증거가 있습니까?”

너무도 도발적이고 단도직입적인 조기자의 질문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조기자는 개의치 않고 몰아붙였다.

“과연 천문이란 것이 증산의 친필이냐 하는 겁니다. 증산 선생은 천지공사한 글은 남기기지 않았다는데요?”
“…….”
“일설에 의하면 모두 차경석의 필체라고 합니다. 증산에게 하사받은 게 아니라 증산이 천문을 태우려 할 때마다 기억했다가 집에서 재현했다고 합니다.”

용화는 침착하게 답했다.

“어디서 보셨는지 모르지만, 저도 그런 설은 익히 알고 있지요. 특히 일부 증산 종파에서는 더 많은 의심을 하지요. 그렇게 험한 말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어요.”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