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강증산의 유언
세계 통일국가-2“법사님 책에서도 미래의 종교에 대해 언급한 구절이 기억납니다. 자기철학, 명상, 자연이 어우러진 동호회 형태라고 했거든요. 놀라운 일치네요.”
지천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조기자는 검은 안경테를 쓸어 올리며 반골 기질을 확실히 드러냈다.
“글쎄요, 아무리 미륵불이지만 지금의 기독교인들이나 서양 사람들이 과연 믿을 수 있겠습니까? 특히 이슬람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은 죽었으면 죽었지 오로지 알라, 예수님만 찾게 될 텐데. 순교를 최고의 영광으로 치는데…….”
“그것도 천문에 쓰여 있었지요. 불도가 가장 왕성할 때 서양의 금(金)세력이 가라앉느니라.”
“왜? 어떻게?”
“…….”
조기자는 말이 끊긴 용화를 몰아붙였다.
“합리적이기 보다 용화선생의 신념이 아닐까요? 자칫하면 맹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조기자의 부정적인 평가에 용화는 초연하게 답했다.
“아무리 눈앞에 보여줘도 믿고 안 믿고는 여러분의 판단이지요. 같은 글이지만 그래서 천문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늘과 파장이 맞아 공명해야 통하는 법이지요.”
그날은 그렇게 의문만 별처럼 드러난 채 밤이 저물고 있었다.
5장. 일수사견(一水四見)
100년 만의 쾌거-1
9월 1일 네덜란드 헤이그 한국대사관. 사무실 책상 앞에서 한국 대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들이 오고 있다구요?”
참사관이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우리 측으로부터 방금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가 뭘 해줄 수 있겠어요?”
“글쎄요? 민간단체에서 국제사법재판소에 서류를 접수하는 게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걸 주지시켜줘야지요.”
“그게 문제가 아니죠. 박물관장의 말로는 접수가 안 되면 극단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기록에 남길 일을 저지를 사람들이라고 했잖습니까? 신문에 날 일이 벌어지기 전에 손을 써야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차법사란 분 그렇게 막무가내인 사람이 아니니 안심하셔도 될 겁니다. 공식적인 외교 조치만 빼고, 우리가 민간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지원하겠습니다. 그래도 정문 경비실을 통과할 순 없겠지만요.”
접수단 일행은 현지 교민 부부와 함께 차를 타고 한국 대사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절망상태였다. 박대표가 알고 있다는 현지 한국 국제 변호사 사무실에 어렵사리 전화를 할 수 있었으나 나중에 연락을 주겠다며 스케줄을 핑계삼아 접촉을 피한 상태였고, 박물관에서 알려준 브뤼셀 소재 EU(유럽연합)본부 상주 한국 특파원은 출장 중이라 갈 수 없다는 기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행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정부에서 중국의 압력을 우려해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꺼린 상황에서 현지 대사관의 태도 또한 정부 태도의 연장선일 것이 뻔했다.
헤이그 소재 네덜란드 한국 대사관은 국제사법재판소와 채 2Km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한국 대사관 옆에서 중국대사관이 담장을 맞대고 있는 이웃이었다. 태극기와 중화인민공화국기가 동시에 펄럭이고 있었다. 어른 키 정도 높이의 담장은 마치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대립한 국경선의 축소판 같았다. 일행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간도문제 또한 중국과 영토분쟁 아닌가.
중국 대사관 쪽에는 경비가 삼엄했다. 바리케이드는 물론이고 무장한 경비원도 여럿이 보였다. 최근 파륜궁 사건과 티베트 사건으로 부쩍 시위가 잦았기 때문이다. 김국장이 사진을 찍으려하니 경비원이 멀리서 위협적인 경고의 수신호를 보냈다. 일행은 쫓기듯 대사관으로 향했다.
“들어오세요.”
한국 대사관 인터폰에서 다행히 들어오라는 신호가 왔다. 가이드를 맞은 현지 교민과 함께 세 명의 일행이 대사관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전 여기 대사입니다.”
일행은 깜짝 놀랐다. 대사가 직접 웃으며 맞아줄 줄이야. 미리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어리둥절한 일행은 귀빈실로 안내되었다. 대사 옆에 있던 참사가 물었다.
“어느 분이 차길진법사시죠?”
“네?”
그랬다. 대사관에서는 일행이 만난 교민들로부터 소식을 들어 이미 알고 있었고, 가이드한 교민처럼 한국의 신문보도를 보고 차법사가 직접 온 줄 알고 환대했던 것이다.
대신 왔다는 일행의 자초지종을 듣던 대사관 인사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대사는 표시나지 않게 숨을 내쉬더니 일행에게 말했다.
“좋은 일 하시는데, 저희는 국가의 훈령을 받는 곳이라 직접 도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교민의 민원이라 생각하고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이보게, 참사관!”
“네.”
군기가 바짝 든 참사가 대사의 지시를 기다렸다.
“이분들 도울 수 있는 데까지 잘 도와드리라고.”
대사는 몇 마디 덕담을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일행은 덕분에 국제사법재판소에 맞는 양식으로 소송접수 서류를 다시 작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차법사가 동행하지 않은 이 단체의 정체성을 알고 싶어 했다.
“민족회의가 민족의 연합체대표들의 회의체라고 하셨는데, 북한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언제 들어왔는지 정보담당 대사관 직원이 물었다. 사실 대사관에서 가장 알고 싶어 하는 부분이었다. 김국장이 그 직원에게 차법사의 명함을 건네며 설명했다.
“민족회의는 사실 간도서류를 접수하기 위한 임시기구입니다. 북한과는 직접 연계가 없습니다. 100년이 되기 전에 어떤 공식적인 접수 또는 접수 시도 흔적을 남기려고 온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명을 하고 저희는 그 대표로 왔습니다. 이준열사는 아니더라도 반드시 그 자취를 남겨야합니다.”
일행들의 눈빛은 굳은 각오로 이글거렸다. 서류를 고치는 데 서너 시간이 걸렸다. 오후 3시가 넘어 일행이 국제사법재판소로 출발하려는 데 대사관측에서 연락이 왔다. 일단 정문 앞까지 동행하겠다는 것. 공무차원이 아닌 교민을 보호차원에서 내린 대사관 측의 특단의 조치가 취해졌다.
검은 색 바리케이드가 가로막은 국제사법재판소 경비실이 보였다. 대사관 직원을 뒤로한 일행은 접수 서류를 가슴에 안고 걸어 들어갔다. 예상대로 경비원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권총을 찬 경비가 위압적으로 물었다.
“대사관 직원입니까?”
“아니요?”
“대사관 일입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경비는 일행이 입장할 때부터 매우 혼란스러워했다. 접수 서류 양식이 정확했기 때문이다.
“약속이 되어 있습니까?”
“약속은 없지만 매우 중요한 서류입니다.”
“여긴 직접적인 서류접수는 안합니다. 우편으로 하세요.”
“우린 민족국가 연합체 대표입니다. 우편으로 할 수 있지만 중요한 서류라서 직접 접수해야 합니다.”
“대사관을 통해서 오세요.”
통역을 하는 교민은 주부였기에 정치, 법률 용어에 서툴렀다. 일행이 설명하는 민족주권과 국가주권의 개념을 통역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결정적인 도움이 될 줄이야!
물러서지 않고 ‘베리 임포턴트 다큐먼트(매우 중요한 서류입니다).’만 끈질기게 되풀이하는 결연한 기세에 당황한 경비원은 어디론가 전화 통화를 했다. 경비원은 자기 책임은 다했다는 듯 퉁명스럽게 손짓했다.
“오케이. 그럼 안으로 들어오랍니다.”
붉은 장미가 만발한 넓은 정원을 지나 국제사법재판소 행정실로 가는 길은 천리만리처럼 멀게 느껴졌다.
행정처 여직원이 날카롭게 물었다.
“왜 한국 대사관에서 오지 않고, 직접 왔습니까? 이곳은 소송 주체가 국가여야만 상대합니다. 돌아가세요.”
법규를 내세우는 행정사무원의 차가운 목소리에도 일행은 물러서지 않았다.
“우리는 국가의 대표가 아니라 남북한과 해외 동포들이 구성한 민족연합체의 대표입니다. 민족회의에서 구성한 통일준비정부 대표요. 그래서 한국 대사관과는 별개입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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