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강증산의 유언

증산 선생 유서
용화의 해설은 거침이 없었다.
『증산 선생유서(甑山先生遺書)』
“단주수명서라고 불리는 이 유서는 상제님의 친필유언인데 본래 제목이 없었지요. 김형렬 선생이 주관했던 종교단체에서 이 유서를 베껴 쓰고 증산 선생 유서라고 쓴 것입니다.”
지천태가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물었다.
“한 날 한 시 한 곳에서 쓴 것치곤 문장 길이에서 차이가 크네요?”
“해설을 모두 듣고 나면 알겠지만 문장 길이만 차이가 있지 핵심 내용은 같습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상제님 이력이 앞에 더 붙고, 결정적으로 각각 천지도수(天地度數)가 다릅니다.”
“천지도수(天地度數)요?”
“보이지 않게 두 장에 나누어 천기를 숨긴 것이지요.”
“당시에는 증산을 상제님으로 부르지 않고 선생이라고 했네요?”
“당시 종도들은 상제님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금 나와 있는 수십 종의 증산 계열의 경들은 당시에 쓰인 게 아닙니까?”
“네. 화천하시고 수십 년 뒤에 종도들을 찾아 구술을 정리한 게 지금 시중의 경(經)들이지요.”
“음, 그것 참 모순이네요. 상제임을 알아보지 못한 종도들, 또 그 종도들의 구술을 채록하였다니. 그럼 정확성이 떨어지지 않나요?”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마다 틀리거든요. 그래서 저마다 해석한 경이 수십 종이나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구술된 경이 아닌 상제님 친필과 유언을 직접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 이 천문도 각자 해석차가 생길 가능성이 있겠네요?”
조기자의 질문에 용화는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제 스승이 30년, 제가 10년을 연구하였고, 5장의 천문 도수가 한 치의 어김도 없습니다.”
용화는 단호한 자세로 곧바로 유서 해석에 들어갔다.
“내가 서천 서역 대법국 천계탑에서 동양을 향하다가 금산사 미륵불에 깃들어 잇게 되었다. 호남 서신이 관장하는 사명기(생명을 좌우하는 권한 상징)의 지휘에 따라 객망리 강씨 문중에 태어났다. 경자년(1900)에 천문을 받들고 세상에 나왔으며, 신축년(1901) 북두칠성 기운이 내리는 7월 7일 모악산 대원사에서 인도통을 하였다. 임인년(1902)에 첫 제자인 김형렬을 만나, 세상에 덕을 베풀길 굳게 약속하였다. 세간에서 충효열윤리가 세상에 사라지고 있으므로, 사물약재로써 병을 고쳐야 한다. 구릿골에서 선화하면 금산사 불상의 형태가 될 것인데, 떠도는 혼은 전생이 펼쳐졌던 옛길에 다시 나타나리라. 미륵불이 세상에 나타나면 화와 복을 내려주고, 비로소 그때야 세상을 보는 안목이 열리게 되리라. 인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듣고 찾아와 모여, 그 뜻을 도와 세상을 밝히며 천지에 공덕을 닦는다. 단주의 명령은 신장공사도의 푸른 하늘을 날아가는 푸른 기러기이며, 장신궁(長信宮) 누각에 사람이 그 뜻을 받드는데, 그 형상이 대롱에 갇힌 큰 기러기이니라. 여기에서 보듯이 유서가 신장공사도에 미륵을 숨기고 있다는 암시를 하고 있지요.”
용화는 의기양양하게 설명을 쏟아냈다. 지천태와 조기자는 그저 학생처럼 수강하는 수 밖에 없었다.
“색을 함부로 쓰면 호해처럼 허망하게 죽으니, 무릇 정사라는 것은 창포와 갈대처럼 유연하게 나부껴야 하느니라. 저수지에서 물을 머금고 비행을 할 때, 하늘의 뜻을 받아 큰 기러기가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강남 갔던 제비가 옛 주인을 찾아오듯, 끝내는 새로운 성인의 덕을 닦는다. 설명하고 있는 마지막 문단이 특히 중요합니다. 신장공사도는 해방 전후의 천지공사 도수뿐 아니라 미륵 출세의 도수가 숨겨져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문단은 중요합니다. 신미년(1871년) 태어나 신축년(1901.7. 7) 대원사에서 도통을 하고 임술생 김형렬을 임인년(1902)에 만났다. 고대엔 4월 8일에 석가불이 탄생하고, 금세 4월 8일엔 미륵불이 탄생하느니라. 이 부분은 기유년(1909년) 6월 24일 24절기에 맞추어 돌아가시고, 금세 미륵불이 4월8일에 태어난 것은 8궤의 기운에 응해 맞춘 것이다. 그런고로 선천에 일어났던 일은 어김이 없었으니, 앞으로 후천에 일어날 일도 천시를 받들라. 시(때)란 하늘과 땅이 함께 작용해서 오느니라. 상제님께서 철저하게 천지도수에 맞추어 공사를 보신 것이지요.”
용화는 입이 말라 들어가자 차한잔을 마시고 지체없이 해설을 이었다.
“미륵은 불가의 형체를 하고, 선가의 조화, 유가의 범절을 받는다. 이것을 우두머리로 하여 백성을 가르치고 교화하여, 도를 미륵불에 옮기라. 불도는 인간의 일상사에서 이루어지느니라. 하늘은 사람을 통해 보이게 함으로써 사람은 하늘로부터 증험하며, 천도와 인도는 한 가지 이치로 통달하게 되어 있느니라.”
조기자와 지천태는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이었다. 지천태는 어느새 메모지에 뭔가 열심히 받아 적고 있었다. 용화는 간간히 차법사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상하게 차법사는 화장실을 드나들고 휴대전화 통화를 위해 종종 자리를 뜨기까지 했다. 용화는 그런 차법사의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현무경 풀이가 틀렸다는 뜻일까? 아니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침묵은 뭘 뜻할까?’
잠깐이지만 별별 생각이 다 스쳤다. 입이 마른 용화는 차 한 잔을 입안에 머금었다. 차법사의 눈동자는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몸만 그 곳에 있지 눈동자의 초점은 멀리 어딘가에 맞춰져 있었다.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 1인 시위-1
용화가 천문 해석에 기염을 토하는 시각,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공항. 8월 29일 차법사가 이준 열사의 심정으로 가라는 징표로 준 ‘위법망구’ 4글자를 품고 네덜란드행 비행기에서 내렸다.
하지만 박대표와 김국장은 공항 로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동참하기로 했던 민족회의 간부들, 간도 찾기에 뜻있는 분들과 제소장 초안을 작성한 미국동포를 비롯하여 많은 단체의 간부들이 어찌 된 연유에서인지 모두 불참하였고, 암스테르담 공항엔 달랑 두 명만 도착해 있었다. 목숨을 바칠 듯 입에 게거품을 물고 비장하게 간도 반환을 부르짖던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출발부터 처음 예상과는 많이 빗나가 있었다.
아무도 마중 나와 있지 않는 이역만리 낯선 곳에 떨어진 두 사람은 막막했다. 통역 없이 헤이그 숙소를 찾아가는 게 문제였다. 두 사람은 이준 열사 또한 이러한 심정으로 헤이그로 달려갔을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손짓발짓 영어로 1시간을 더듬더듬 수화한 끝에 헤이그행 기차를 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불가사의한 일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헤이그 시내 지리를 전혀 몰라 두리번거리던 일행은 번화가에서 한인 간판이 걸린 식당으로 무작정 들어갔다. 다행히 주인은 한인이었다. 식당 주인은 친절하게 이준 열사 박물관의 약도와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이준 열사 박물관부터 찾았다. 걸어서 1시간 거리 박물관은 이준 열사가 순국한 호텔을 개조한 오래된 건물이었다. 입구에 나부끼는 태극기가 인상적이었다. 박물관 관장 부부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두 사람은 이준 열사가 순국한 침대 앞에 섰다. 묵념을 올렸다. 일행은 헤이그에 온 목적을 설명했다. 진지하게 듣고 있던 부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두 분의 뜻은 훌륭합니다만, 국제사법재판소에서는 민간인의 서류를 받지 않아요.”
우회적인 표현이었지만 부질없는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현실적 장벽에 굴복했더라면 헤이그까지 오지도 않았을 일행이었다.
기자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