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장편소설 제 24 회
김영수 장편소설 제 2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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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02-21 16:31
  • 승인 2011.02.21 16:31
  • 호수 877
  • 3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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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강증산의 유언

지천태(地天泰)의 등장-3

‘썩 물러가라!’
‘키키키, 여긴 내 자리야. 니들 잡으러 온 저승사자지.’

말 그대로 그는 영계를 탈영한 저승사자였다. 원한이 서린 채 교통사고로 죽은 히스패닉계 영가는 지나가는 자동차에 올라타 교통사고를 일으켰던 것이고, 그 자리는 악명 높은 사고 다발지역이 된 것이다. 축축한 음기에 밖을 보니 그 자리에서 죽은 수백 명의 영가들이 좀비처럼 고속도로를 떠돌고 있었다.
차법사는 히스패닉 영가에게 강력한 염력를 보냈다. 히스패닉 영가는 움찔하며 어디론가 휙 사라졌다. 하지만 위기를 넘긴 것이 아니었다.

‘펑, 펑.’

순간 거대한 트레일러의 앞바퀴 2개가 커다란 굉음을 내며 연달아 터지고 그 파편이 차 유리창 쪽으로 날아왔다. 트레일러에는 수십 명의 영가가 들러붙어 있었다. 트레일러 운전자는 영문도 모른 채 정신이 혼미해져 영가들이 조종하는 데로 차법사 일행의 차로 돌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체이탈한 차법사가 엄청난 염파를 발산하자 가까스로 파편이 앞 유리를 비켜갔다. 하지만 이번엔 버스였다. 펑크난 트레일러가 휘청거리며 밴을 막아서는 하얀색 버스가 어느새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연쇄충돌 순간 차법사는 조금 전보다 더욱 강력한 염력으로 하얀색 버스를 밀어냈다.
사실 하얀 버스는 실체가 아니었다. 유령들이 만들어낸 유령버스였다. 그래서 승객이 한명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상대 운전자를 교란하여 금정거시켜 뒤이어오는 차들과 연쇄 추돌시키기 위한 일종의 눈속임이었다. 차법사의 염력에 유령버스는 수증기처럼 스스륵 사라졌다. 위기를 넘긴 차법사가 영가들을 꾸짖었다.

‘이승과 저승이 엄연히 구분되거늘 당신들은 왜 이승에서 떠도는가?’
‘나만 죽기는 억울해. 같이 죽어서 우리와 함께 있자고.’

영가들은 능글거리며 다음에 다가오는 자동차에 올라탈 준비를 했다. 차법사는 더욱 강력한 염력으로 영가들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붙잡았다.

‘그대들은 고통 속에서 헤매지 않고 새 몸으로 태어나고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은가?’
‘그러고 싶지. 그러나 그 누구도 우리를 돌봐주지 않았어. 부서진 자동차와 너덜너덜해진 시신만 끌고 가고 우리 영혼들은 그대로 방치했어. 우린 영원히 이곳을 떠나지 못해. 우리의 존재를 알려야해. 그래서 사고를 내는 거라구. 제발 우리를 천도시켜 달라구.’
‘세상에 우연은 없소. 여러분들의 사고는 우연히 아니오. 전생을 거슬러 여러분이 분명히 가해자가 된 사건이 있었고, 이생에서 그런 과보를 받은 것이오. 상대방을 원망하지 말고 스스로 원망하는 마음을 거두시오.’

여러 차례 설득이 이어졌다. 영가들도 서서히 차법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하나 둘씩 어디론가 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종의 간단한 구명시식 천도 의식이 진행되었던 셈이다.

걱정하는 일행에게 차법사가 덤덤하게 말했다.
“지선생, 이제 세도나가 얼마 안 남았으니 달립시다. 세도나 수호신들의 시험도 무사히 통과했으니 이제 안심해도 되겠어요. 역시 공짜는 없군요. 다시 달립시다.”

지천태는 꿈을 꾼 것인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단지 트레일러 파편이 운전석 위를 때려 긁힌 자국을 손가락으로 만져 보고야 생시라는 확신이 들었다. 파편이 조금만 아래로 날아와 운전석을 때렸다면…….

‘휴-’

지천태는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세도나에서 차법사와 헤어진 이후 지천태는 줄곧 차법사를 생각했다. 그날 일도 그렇고, 특히 그곳 세도나에서 전하는 흥미로운 예언 탓이었다.
볼텍스의 존재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1950년대 말 레스터 레븐슨이었다. 그는 뉴욕의 물리학자이자 사업가로 성공했지만 말년에 시한부 선고를 받고 스스로 자신을 통찰하여 죽음을 초월하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 깨달음을 제자들에게 전파하였는데 <의식혁명>의 저자인 데이빗 호킨스 박사는 유명한 제자 중 하나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제임스 레드필드의 소설 《천상의 예언》은 경이로운 영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그 무대가 바로 세도나인 것이다. 1994년 레스터 레븐슨은 숨을 거두기 전 유언을 남긴 게 있었다.

‘동양에서 온 깨달은 정신지도자에 의해서 새로운 정신문명시대를 열어갈 중심 가치를 이곳(세도나)이 크고 귀하게 쓰일 것’이라는 유언이었다. 그가 말한 ‘동양의 지도자’란 과연 누구일까? 혹시 차법사는 아닐까.

그렇게 세월이 흘러 서로는 소식이 멀어져갔다. 하지만 차법사가 남긴 마지막 말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선생, 언젠가 다시 만날 겁니다.”

이후 지천태는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인도, 티벳, 인도 등지를 순례하며 도인들을 찾아 유랑하였다. 그리고 주역을 비롯해 명리학, 심령학을 두루 섭렵하였다.

세월이 흘러 지천태는 다시 차법사를 찾았다. 아이처럼 천진하게 깔깔대며 웃는 지천태의 모습은 여전했다. 차법사가 그의 근황을 묻자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차를 팔고 있어요.”
“네? 차요? 자동차 세일즈?”
“하하하, 자동차할 때 차가 아니라 우려먹는 차(茶)입니다.”

지천태는 전직을 하여 어느새 차 전문점의 사장이 되어 있었다. 차를 달여 주위에 정성스럽게 대접하는 팽주(烹主)로 돌아온 것이다.
차법사는 지그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묘한 우연의 일치였다. 언론사 사장이었던 모 언론인이 작고하면서 유언으로 차법사에게 도선국사의 개태사 주장자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귀물을 전했고, 일부 유품은 사례를 주고 인수했는데, 그 중에는 오래 된 ‘보이차’가 있었다. 때마침 차법사에게 보이차가 들어오던 바로 그날 지천태가 연락을 해온 터였다. 기막힌 우연의 일치였다.

지천태는 네모난 붉은 벽돌 모양의 전차(煎茶) 포장을 뜯어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오늘은 희귀 보이차를 음미하시겠습니다. 감정해보니 30년 이상 된 귀한 차입니다.”

그는 전차를 손가락 만하게 쪼개서 차호에 넣더니 능숙한 손놀림으로 물을 붓고 진하게 올라오는 구수한 차향기를 음미했다. 붉은 빛이 도는 차호에 모락모락 김이 올랐다. 동지섣달 화로 곁에 둘러앉은 사랑방 같았다.
하지만 용화는 난처했다. 은밀하게 차법사에게만 천문을 전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불청객들이 함께 하면 천기누설이 되어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차법사가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오늘 서로 초면인 분들도 계시지만, 알고 보면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은 다 같은 고향사람이니 친하게 지냅시다.”
“동향이라고요? 저와 형님만 같지 않은 게 아니오?”

조기자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허허허, 태어나기 전에 어디 있었겠어요.”
“…….”
“모두 저 세상에서 왔잖아요. 영혼이 어디서 왔겠어요.”
“…….”
“그러니 같은 고향사람이라는 겁니다.”

하하하-
차법사의 넌센스 퀴즈에 모두 허탈해 했다. 그러나 차법사는 농담이 아니었다.

“아마도 이 자리에 동석하게 된 인연이 있을 겝니다. 중요한 목격자들이 될 수 있으니까요.”

차법사의 말을 듣고 보니 용화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증산도 남녀평등시대가 도래하는 천지공사를 보면서 ‘지천태의 운수로 후천 세상을 열어간다’고 했다. 차법사와 지천태의 인연 이야기를 듣던 용화는 후천세계가 도래했다는 천문을 전하러 온 자리에 지천태가 동석한 인연 또한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들면서, 마음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북두칠성의 기운-1

지천태는 자사(紫紗)라는 붉은 색이 도는 돌가루를 갈아서 반죽하여 빚은 자사차호(紫砂茶壺)를 기울여 능숙하게 잔에 따랐다. 용화는 한입 머금고 혀를 한 바퀴 돌려 맛을 음미했다. 목구멍을 넘어가고 조금 지나자 단전에서 어떤 뜨거운 기운이 응어리지더니 이내 활화산처럼 용솟음쳤다. 용화도 다선일미(茶禪一味)라 하며 도담(道談)을 나눌 때 자주 마셔보았지만, 이처럼 기운을 돋우는 차는 처음이었다.

“허 참, 이 차는 기운이 참 특별납니다.”

용화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지천태가 지그시 미소 지으며 말을 받았다.

“등짝이 뜨겁고 이마에서 약간 땀이 베어날 겁니다. 기 순환이 된다는 증거지요. 20년 이상 묵은 좋은 보이차 한 잔은 한약 수백 첩보다 낫고, 웬만한 단전호흡보다 효과가 월등합니다, 하하하.”

지천태는 말끝마다 환한 미소와 함께 천진한 웃음소리를 잊지 않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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