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경천동지(驚天動地)

변화의 도수(度數) 100-2
“하하하. 조기자, 미국의 한인 방송국 생각나는가?”
“물론이죠. 아무리 흰 머리카락이 늘었어도, 교민방송국을 잊을 리가 있나요. 그때가 참 좋았소.”
“그때도 내가 조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지. 당시 10만 불로 큰 집을 지을 거라 하니까 조기자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는가?”
“글씨요, 기억이 가물가물…….”
“큰 절을 지을 거냐고 묻더구만. 그래서 나는 그런다고 했어. 그리고 그 돈을 방송국에 줘버렸어. 방송국이야말로 교민들에게 가장 큰 집 아닌가.”
“아, 맞소. 생각나네. 그때 그랬죠.”
“지금도 마찬가지야. 나는 보이지 않는 집을 짓고 있네.”
“허허허, 이거 또 형님께 한방 먹었소.”
조기자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오늘의 본론에 들어가자는 뜻이었다.
“그나저나 조기자가 나와 인연은 인연인가 보네. 여러 신문사 기자들을 초청했는데, 달려온 건 조기자뿐일세. 100일 구명시식은 참 중요한 건데….”
100은 변화의 도수(度數)였다. 단군의 탄생도 100일 기도 덕분이었다. 잡혼이 성행하던 시대 웅녀는 쑥과 마늘로 버티며 토굴에서 100일을 기도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다. 단군으로 시작되는 문명국 고조선이 태동하게 된 것이다. 근대 의학에서도 뇌의 변화는 100일 동안 반복해야 비로소 뇌의 일부로 습관이 된다고 인정했다. 100일은 새로운 판을 짜는 중요한 변화 도수였다.
“연락 받고 참 의외라고 생각했소, 형님.”
“왜?”
“불교 구병시식(救病施食)은 병에서 구하는 것이지만, 법사님 구명시식(救命施食)은 그야말로 생명을 구하는 의식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미 수백, 수천 년 전에 돌아가신 개국 열성조를 위한 100일 기도를 하신다고 해서요. 혹시 구명시식에서 대중 부흥회로 사업 변경을 한 겝니까?”
그는 기자답게 넘겨짚고 있었다.
“허허허.”
차법사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파도나 바다나.”
“예? 내가 머리가 나쁜께, 알아듣게 좀 말하소.”
“예전에 동해바다에 갔는데 관광차에서 내린 아주머니들이 버스 기사에게 항의를 하더라구. 기사가 여기가 바다라고 하자 파도가 없는 바다가 어디 있냐고 항의하는 게야. 그날따라 바람이 없어 파도가 잔잔했던 것인데. 아주머니는 파도가 있어야 바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 바다가 파도이고 파도가 바다 아니겠나.”
“허, 재미있기는 한데, 딱 머리로 이해가 안 되네.”
“미국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가본 적 있지?”
“물론이죠. 뉴욕 살면서 매일 그 앞을 지나다니다시피 했잖소.”
“그 건물 아래 가면 외국 관광객들이 지도를 들고 두리번거리며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많더라구.”
“뭐라구…….”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어디 있냐는 거야. 허허허.”
“맞아요. 저도 경험했죠. 코앞에 두고 못 찾더라구.”
“멀리서 보면 보이던 게, 가까이서 보면 전체가 사라져 안 보이는 법이지.”
“가만, 법사님 말씀인즉 100일 기도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라는 거요?”
“그런 셈이지.”
“개인 구명시식이나 개국 열성조 구명시식도 바다와 파도와 같은 관계라는 말이시….”
“역시 센스가 빨라. 국가와 사람이 따로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 우리 민족은 세 집만 다리 놓으면 모두 친인척 관계야. 자기 조상은 섬기면서 국가의 공통조상은 이상한 눈초리로 보더라고. 바다가 파도이고, 파도가 바다 아닌가.”
조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조기자, 명함 보니 이제 편집국장이라고 해야 하나? 이렇게 편집국장이 직접 와도 되시나? 취재기자를 보내지 그랬어?”
“형님 일인데 제가 직접 달려와야 지라. 그냥 말콤 시절 맹키로 조기자라고 부르소.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님은 그렇게 부르소.”
“군인이 군복 입을 때 가장 아름답지. 역시 조기자는 기자일 때가 제일 빛나.”
“여기 오는 건 어렵지 않은데, 사실 기사로 다루기에 애로사항이 큽니다.”
“그래?”
“구명시식 때문이오. 구명시식을 한마디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것소?”
“말 그대로 생명을 구하는 식이라고 대충 하면 되지 뭐.”
“간단치가 않아요. 다른 종교나 학자들이 항의합니다.”
“그래? 무슨 이유로?”
“한마디로 이단이라는 거지라. 구명시식이 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형님 경전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존의 율법에 맞춘 것도 아니고…….”
“그건 간단한 문제인데.”
“간단하다고라?”
“문 안으로 들어오면 돼.”
“…….”
“문 밖에 서서 방 안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묻지만 말고, 자기가 직접 문을 열고 방 안에 들어오면 간단한데…. 영혼에 무슨 종교가 있누. 그저 겪어보지도 않은 지식으로 시비선악(是非善惡)을 가르고 승부를 보려니 그렇지.”
간단한 차가 나왔다.
“형님, 아까 전에 무대 위에서 가족 중심의 구명시식에서 국혼을 불어넣는 구명시식이라고 하셨는디, 혹시 앞으로 나라에 큰일이라도 생기요?”
허허실실하면서도 눈치가 빠른 조기자의 근성에 할 말이 없었다.
“…….”
“형님은 남들 모르게 귀신처럼 일을 하시잖소. 그런데 이렇게 기자까지 부른 걸 보면 뭔가 대중적으로 경고할 일이 있으신 것 아니요?”
“귀신은 속여도 조기자는 못 속이겠구먼.”
[다음호에 계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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