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경천동지(驚天動地)

국혼(國魂)을 불어넣을 때-1
2009년 7월 7일,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 자리 잡은 지하 2층의 소극장. 간밤에 천둥번개가 콩 볶듯 하더니 억수같은 비가 내렸다. 차법사가 큰일을 시작할 때면 어김없이 비가 내리곤 했다. 이번에도 차법사는 조용히 모종의 거사를 도모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차법사는 소극장에 제단을 마련하고 나라를 연 13분의 개국(開國) 열성조(列聖朝)영정을 정성스레 점검하고 있었다. 고조선 단군, 고구려 고주몽, 백제 온조, 신라 박혁거세, 가야 김수로, 고려 태조 왕건, 후고구려 궁예, 후백제 견훤, 발해 대조영, 조선 태조 이성계, 청의 누르하치, 대한제국 고종, 대한민국 이승만. 무대 좌우측에는 옥으로 조각한 단군 좌상 두 개가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었다.
150여석의 자리를 가득 메운 동참자들은 대부분 선원 회원들이었다.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구명시식은 보통 밀폐된 공간에서 초대된 가족들만 동참해 올려지는데, 이렇게 공개된 무대 위에서 하는 구명시식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100일간이나 지속한다니 그 영문을 아는 이는 없었다.
말쑥한 두루마기차림으로 무대에 오른 차법사가 150여 명의 동참자들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대 위의 구명시식은 뭐고, 또 장장 100일간이나 한다니 그 이유가 궁금들 하실 겁니다. 하지만 차차 알게 되실 겁니다. 이왕 여기서 저와 동참하신다면 알아서 믿지 말고, 믿어서 알아가세요.”
차법사의 일은 늘 퍼즐 같다. 처음엔 불쑥 던져진 한 조각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서로 긴밀하게 연관을 지으며 모양이 드러나는 퍼즐. 그건 고도로 머릿속에 계산되었다기보다 장애물을 만나도 끊임없이 그리고 유연하게 흘러 결국 물길을 만들어 찾아가는 흐르는 물과 같은 그만의 독특한 방식이었다.
“그래도 힌트는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는 가족 중심의 조상 구명시식이었습니다. 가령, 나의 아버지를 비롯해 동참자들의 돌아가신 가족 조상영가와 사건으로 인연 있는 주위 영가들. 그런데 여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자식이 전교 1등을 해도 아버지가 사업이 망하면 식솔들은 그 운명을 따라갈 수밖에 없잖습니까. 만약 국가의 운명이 달린 일이 발생하면 개인의 운은 거기 휩쓸려 갈 수밖에 없어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비장하기까지 했다. 단상이 있었다면 아마 주먹으로 내려칠 기세였다.
“그러나 이번 100일 구명시식은 다릅니다. 가족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구명시식이 아닙니다. 국혼을 되살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국혼이 사라지면 우리도 없는 것입니다.”
동참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법사 뒤를 이어 식을 진행하는 예불 스님이 무대 위에 올라왔다. 장정 두 아름이나 되는 큰 징을 들어올렸다.
‘부왕, 부왕, 부왕!’
극장을 붕괴시킬 듯 세 번의 천둥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가무단의 살풀이와 요령이 이어졌다. <선구자> 노래를 배경으로 대형 스크린에는 그간의 차법사와 회원들이 올린 미국 9·11테러 위령제, 일본 북해도 한인 강제 징용자 위령제, 백두산 일송정 위령제 등 크고 작은 위령제 장면이 주마등처럼 비춰졌다.
그때였다.
‘쿠르릉-’
갑자기 무대 쪽에서 땅을 뒤흔드는 소리가 나더니 뭉게뭉게 흰 구름이 몰려왔다. 무대는 없어지고 순식간에 광활한 산맥으로 바뀌어있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영안(靈眼)을 가진 차법사의 눈에만 펼쳐지는 광경이었다. 차법사는 긴장했지만 기다렸다는 듯 차분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흰 구름이 걷히더니 흰 도복을 입은 6척 거구 사내가 나타났다. 살집이 있고 얼굴이 붉고 눈이 작은 젊은 사내였다.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태양을 쳐다보았을 때 눈부심처럼 차법사도 정면으로 눈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 염력을 통한 대화가 오갔다.
‘어서오십시오.’
차법사가 공손히 예를 취했다. 사내는 차법사를 알아보고 부드럽지만 위엄 있는 중저음으로 예를 받았다.
차법사와 단군왕검은 초면이 아니었다. 이미 수십 년 전 구명시식 자리에 초혼된 바 있었다. 당시 나타난 단군의 영혼은 차법사에게 다짜고짜 ‘무릎을 꿇으라’고 호령했다. 차법사가 당황하자 ‘이런 일하는 것으로 말하면 내가 제일’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란 영혼을 부리는 일을 말한다. 제정일치 시대의 지도자로서 상상을 초월한 영능력였다.
단군이란 말도 몽골에서 왔다. 몽고어의 탱그리(천신)가 어원이다. ‘단군’은 영혼을 다스리는 샤먼(무당)을, ‘왕검’은 육신의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을 뜻한다. 즉 단군왕검은 ‘샤먼과 임금’이란 뜻이다. 지금이야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있지만 고대만 해도 정치적 국왕과 종교적 제사장이 한 인물이었던 제정일치 사회였기 때문이다.
단군이란 말은 단골(당골)에서 왔다. 최남선 선생은 단골이 단굴과 혼동에서 오는 와음이라고 전제하고 ‘단굴’을 한자로 표기하면 ‘단군(檀君)’이 된다고 했다. 다시 말해 단군은 우리가 쓰는 단골이란 말의 한자 표기다.
자주 가는 가게를 말할 때 ‘단골 가게’의 그 단골이다. 이 단골은 원래 마을의 무속 신앙을 주관하던 세습 무당을 일컫는다. 종교와 의술이 없던 그 예날 사람들은 무당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해 하루가 멀다 하고 단골집(무당의 집)을 찾았고, 지금의 단골이란 말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실제로 전남의 진도에서는 세습무당을 단골 혹은 당골로 부르고 있다.
차법사도 구명시식을 행할 때마다, 이른바 설치고 힘이 세고 심술 사나운 영가를 만날 때, 그들이 덤비면 영력으로 그들을 제압하곤 했는데 단군은 어린 시절 아버지 차일혁 총경의 죽음 이후 차법사가 가졌던 영능력을 능가하는 힘이었다. 차법사는 얼떨결에 단군 영가가 시키는 대로 무릎을 꿇을 정도였다.
차법사는 구명시식에 나타난 단군과 대화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 상식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천상에서 내려온 환웅과 웅녀의 아들이 아니라, 중국 북부 만주 지방에서 먼저 청동기 문명을 발달시킨 부족의 한 명이었다. 특히 고아시아족들이 살고 있는 한반도를 침략하는 데 앞장 선 전투부대 대장이었다.
단군 자신은 ‘태백산 신단수 아래서 환웅이 곰과 만나 아들을 낳으니 이가 단군이다’라는 대목에 대해서도 설명을 했다.
한반도 북부를 평정한 단군의 아버지, 곧 환웅의 전투부대가 토착부족, 특히 곰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숭상하던 부족들 중에 곰 부족의 한 귀족 딸을 부인으로 맞아 낳은 아들이 바로 단군 자신이라는 것.
단군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쑥과 마늘을 가지고 동굴에서 견디라’는 이야기는, 그 당시 단군의 어머니와 같은 지배자의 부인들은 다른 여자들과 같이 밖에 나가서 잡혼을 하지 않고 한 집에 머무르면서 지배자만을 섬기게 되어 있었던 것을 뜻한다고 했다.
고대 최초의 국가 고조선의 도읍지에 대해서도 설이 많은데, 단군 영혼은 도읍지에 대해서도 말했다. 종합해 유추해보니 지금의 내몽골 지역이었다.
단군의 존재는 배달민족에게 매우 중요하다. 한반도를 근거로 하는 배달민족의 정신적 원형이기도 하지만 생물학적, 인종학적 출발의 모습이다. 과거 칭기즈칸도 샤먼을 등에 업고 전 세계를 통일하려했다. 샤먼은 러시아, 몽고, 중국 동부, 한반도는 물론이고 일본의 ‘마쯔리’라는 거대한 제천의식에도 보듯이 현재 동아시아의 정신과 문화에 뿌리 깊게 살아있다.
단군은 동아시아인들의 종교와 정신과 문화의 원형이다. 개인으로 치자면 내 아버지가 누구인가와 같은 의문의 종착역이다. 단군왕검은 작은 단군들에게 샤먼 중의 샤먼, 즉 그레이트 샤먼인 셈이었다. 단군왕검의 정체를 규명하는 것은 배달민족 이해의 출발일 뿐 아니라 동아시아와 관련된 종교, 학술, 예술, 생활, 문화 등 거의 전 분야의 틀을 잡는 것과 동일한 말이 된다. 단군을 모신 100일 구명시식은 여느 형식적인 제천제가 아니라 상식적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스케일의 천지공사였던 것이다.
예를 마친 차법사에게 단군이 물었다.
‘어찌 다시 불렀는가?’
‘작금에 이르러 당신의 자손들이 더불어 잘 사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을 잃고 약육강식의 파국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단군의 출현이나 둘 사이의 대화를 알아챈 동참자는 없었다. 오직 차법사의 영안에만 보이는 광경이었다. 단지 엄청난 염력이 오간 흔적은 남았다.
‘쿵!’
갑자기 제상에 차려둔 과일들이 굴러 떨어졌다.
“어머나, 놀래라!”
팽팽한 긴장감 속에 조용히 기도를 올리면 동참자들이 화들짝 놀라며 혹시나 무대가 무너진 것은 아닌지 주변을 두리번거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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