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장편소설 제 12회 천문 : 영본시대
김영수 장편소설 제 12회 천문 : 영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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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11-22 12:43
  • 승인 2010.11.22 12:43
  • 호수 865
  • 4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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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천지 도수(天地 度數)
일러스트 : 나은진

중생 면담-3

“그런데 법사님, 이 선시의 숨은 뜻이 있나요?”

습관적으로 또 질문을 하고 만 여교수에게 차법사는 기가 막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교수는 화들짝 그런 자신에 놀라며 고개를 젓는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또 개 버릇 남 주지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두 사람은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껄껄 웃었다. 여교수는 ‘왜요?’병에 걸린 자신을 보고, 차법사는 그런 장면 속의 두 사람을 보고 그렇게 웃고 말았다. 그 순간이야말로 서로 말없이 마음이 오가는 순간이었다.

이번엔 머리가 희끗한 반백의 차분한 몸가짐의 아주머니였다.

“법사님, 저희 남편이 연구원 정년퇴직을 했는데….”
하지만 차법사는 귀에 아주머니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아주머니 어깨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총소리와 화약 냄새, 그리고 아우성치는 비명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남편께서 몸이 아프시죠?”
“어머? 어떻게 그걸….”
“복부쪽이요. 병원에 가도 잘 낫지 않고.”
“어머, 맞아요!”
“구명시식을 하셔야겠네요.”
“정말이요? 그렇게 하기 어렵다는 구명시식인데… 고맙습니다!”

아주머니는 이렇게 쉽게 구명시식을 할 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처럼 쉽사리 구명시식을 올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구명시식 신청합니다.”

현직 공무원이라고 밝힌 사내는 들어서자마자 대뜸 구명시식을 요청했다. 차법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요…….”
“안 된다는 겁니까?”

공무원은 조목조목 따질 기세였다.

“병원에 가면 약만 받아오는 환자가 있고, 응급실에 들어가는 환자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약만 먹어도 되는 환자에게 응급실 입원시켜 수술을 하면 되겠습니까. 구명시식은 영혼의 응급실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약만 드셔도 될 정도인데요.”
“그런가요? 그래도 법사님이 하시는 구명시식에 참가하고 싶은데요.”
“의사가 수술실 구경시키는 것 봤나요. 제가 기를 넣은 사과를 하나 드릴 테니 좋은 일 생길 겁니다.”

공무원은 차법사의 기가 들어간 사과를 받고 자리를 나왔다.


당신이 차천자(車天子)요-1

용화는 차법사의 면담을 쭉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지켜볼수록 신기한 점이 있었다. 차법사가 앉아 있는 병풍 뒤로 들어간 면담자들은 기껏 3분, 길게는 10분 만에 일을 보고 나왔을 뿐인데 면담자들이 병풍 뒤에 다녀오면 표정이 180도 바뀌었다. 서럽게 흐느끼는 자가 있는가 하면, 해맑게 웃으면서 나오는 자도 있었다. 대체 병풍 뒤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용화선인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용화님. 들어오세요.”

드디어 그의 차례였다. 용화는 조심스레 책 보퉁이와 족자를 가슴에 안고 병풍 뒤로 걸어 들어갔다. 차법사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선풍의 기운이 강렬한 사내가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주저없이 가부좌를 틀었다.

“전생에 증산 공부를 하셨군요?”

차법사의 첫마디에 용화는 얼어붙는 것 같았다. 용화는 정신을 가다듬고 가져온 천문(天文)을 내밀었다.

“법사님, 이것 받으십시오.”

용화는 차법사 앞에 다짜고짜 책 보퉁이와 족자를 내놓았다.
“이게 뭡니까?”
“상제님의 천문을 받으시겠습니까?”
“상제님은 뭐고 천문은 뭐지요?”
“저는 모악산 구릿골에서 온 용화라는 사람입니다. 증산 상제님의 뜻을 받들어 미륵불을 호위할 도통군자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이 책과 두루마리에는 현무경 석 점과 상제님의 유언 두 점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에 천지공사의 도수가 다 들어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올 터이니 부디 성심껏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면담자리에는 참으로 별의별 인간군상이 나타나긴 하지만 이렇게 차법사에게 다짜고짜 숙제를 안겨주는 이는 처음이었다.

“저도 증산 선생님을 존경합니다만, 왜 이렇게 귀한 걸 제게….”

용화는 가방에서 16절지 크기의 사진을 한 장 꺼냈다. 손상되지 않게 단단하게 코팅이 되어 있었다. 매우 소중하게 간직하던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제령봉 서기가 찍힌 사진이었다.
용화는 차법사의 반응은 안중에도 없이 사연을 줄줄 말하기 시작했다.

“법사님이 정읍 제령봉을 다녀간 날 저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진에 서기가 내린 장관이 찍혔습니다. 제령봉은 증산의 제자 월곡이 살던 대흥리에 있지요. 보통일은 아닙니다. 법사님도 법사님의 전생쯤은 훤히 관(觀)하고 계실 테지요. 법사님께서 전생에 차천자(車天子)였기 때문입니다.”
“…….”
차천자의 호는 월곡(月谷)이요, 이름은 경석(京石)이다. 차천자는 증산의 수제자 중 한 명으로, 증산이 화천(化天)한 뒤, 29년간 일제강점기 600만 교도를 이끌던 보천교의 교주였다.
“월곡이 전생에 상제님을 보위했듯이 현생에서도 상제님의 천지공사의 일꾼으로 나서야 합니다. 천지개벽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다시 와서 천문에 대한 도담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기엔 열석자의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용화의 말투는 마치 문홍 선생처럼 변해있었다. 마치 용화가 문홍을 만나 가르침을 내리듯 그런 말투였다. 말없이 듣기만 하던 차법사가 입을 띠었다.
“열석자의 비밀이요?”

용화선인은 대꾸 없이 일어서 나가려 했다. 차법사는 용화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아이 머리통만한 사과를 하나 가져오게 했다. 차법사는 두툼한 손으로 사과를 가로로 쥐었다.

‘쩍-’

그 큰 사과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씨방을 가로질러 두 토막이 났다.

‘저 큰 사과를! 그것도 가로로… 대단한 손힘이군!’

차법사가 손가락 지문을 찍었다는 조약돌 프린팅 사진을 보긴 했지만 직접 눈앞에서 시범을 보니 더욱 실감이 났다.

“제 기를 넣은 겁니다. 몸부터 추스르셔야겠습니다.”

용화는 흠칫 놀랐다.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이 사내가 어떻게 자신의 지병을 훤히 알고 있다는 말인가. 차법사는 천진하게 말했다.

“참 희한한 일입니다. 월곡의 자료가 돌아온 날 하필 증산 선생의 천문을 받다니요.”
“월곡의 자료요?”

그랬다. 이날 오전에 차법사에게 소포가 하나 도착했는데 월곡에 관한 자료였다. 10년도 전에 절친한 교수 한분이 월곡 차경석에 대한 평전을 쓴다며 차법사에게 많은 자료를 구해간 일이 있었데, 그 교수는 책을 출간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해 동안 자료를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에야 반납한 것이었다.
차법사가 한 쪽에서 두툼한 책 보퉁이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 위에 빼곡히 메모된 글자와 밑줄 친 원고들이었다. 차법사는 용화에게 책을 한 권 건네주었다.

“그 교수가 지은 책입니다.”

《차천자의 꿈. (부제: 시국(時國)의 한)》

표지를 본 용화는 번개에 맞은 듯 숨이 멈췄다. 등골에 전율이 흘렀다.

‘시국……제령봉 서기…….’

책을 받아든 용화는 전기에 감전된 듯 얼어붙었다. 자신이 어떻게 선원을 빠져나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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